• 한국문화사
  • 35권 ‘몸’으로 본 한국여성사
  • Ⅲ. 몸, 정신에서 해방되다-1 몸의 가치와 모성의 저항
  • 03. 여성의 건강과 민족의 모성
  • 신여성․농촌 여성의 몸과 모성
  • 3. 신여성의 어머니 되기: 나혜석을 중심으로
신영숙
확대보기
나혜석
나혜석
팝업창 닫기

여성의 몸이 모성을 위한 것이 되기 전에, 그리고 남자들이 여성에게 모성적 사랑을 추구한다 해도 남녀간의 몸의 만남은 쾌락과 행복임을 신여성은 노래한 바 있다. 그러나 남녀의 근대적 만남이 큰 괴리와 모순, 불합리성을 갖는다는 것을 감지한 신여성 정월 나혜석과 일엽 김원주 등은 몸부림치듯이 온 몸으로 대응하였다. 그들의 벅찬 현실과 꿈을, 여기서는 어머니 되는 개인 여성의 입장에서 알아보고자 한다.412) 신영숙, 「나혜석의 자기 실현의 길-신여성, 김일엽과 비교 고찰」, 2008년 제11회 나혜석 바로알기 심포지엄 자료집, pp.41∼66 참고.

… 너와 나와는 두 몸이되 한 몸이로다

너희 두 몸의 장래는 무엇이 있기에

이다지도 다정한고

허허, 무엇이 그리 기쁜고?

여자야!… (「4년 전의 일기 중에서」)413) 이상경, 앞의 책, p.145 재인용.

나혜석은 이렇게 사랑을 몸으로 노래하였다. 김일엽이 영육일치의 ‘사랑’을 구가한 것과 비슷하게 나혜석도 “영과 육이 부딪칠 때, 존경, 이해, 동정이 얽힐 때, 피는 지글지글 끓고, 살은 자릿자릿하고 맥은 펄펄 뛰며, 꼬집어 뜯고도 싶고, 투덕투덕 두드리고도 싶어 부지불각 중에 손이 가고 입이 가고 생리적 변동이 생기나니 거기에는 아무 이유 없고 아무 타산이 없이 영육이 일치되는 것이요, 가면 에 영육을 따로 생각하리까?”라고 하였다.414) 「영이냐, 육이냐, 영육이냐」,『삼천리』 1937년 12월, pp.326∼327. 여성이 자기 목소리로 남녀간의 사랑을 이렇게 몸으로 적나라하게 그린 예는 드문 편이다. 남녀간의 낭만적인 연애 감정을 몸으로 표현하고 몸을 중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개체인 둘의 몸이 하나로, 이른바 ‘일심동체’라는 당시의 근대적 일부일처관을 표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미가 되면서 나혜석의 몸은 또 달라진다. 낭만성보다는 몸의 실제적 고통에 몸서리친다. 아니, 한 몸 안에 여성성과 모성이 갈등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나혜석의 끊임없는 자아 추구 안에서 몸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 나오고, 자기 정체성은 몸과 불가분의 관계임을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혜석은 이미 소설 『경희』에서 여자의 팔, 다리가 남자와 특별히 다르지 않은 사람의 것으로,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한 것임을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식민지형 어머니 만들기의 일환으로 자녀 양육 방식에까지 개입한 일제의 모성 정책에 내몰린 나혜석은 화가로서의 자신의 일과 가정을 병행하고자 안간힘을 썼다. 직장의 고단함으로 여성의 몸이 이중삼중으로 견디어내기 어려움을 일찍이 간파한 그녀는 모성은 본능이 아니라고 역설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처음 어머니되기의 두려움과 고통으로 인해 자신의 임신을 당혹스럽게 여기고, 어머니 되기에 상당한 거부 반응을 보인다. 입덧, 젖먹이기, 수면 부족 등으로 임신과 출산 후 양육 과정에서 여성의 몸은 견디기 힘든 고통을 치른다는 것이다. 25세의 기혼녀 정월은 입덧이 시작되자 임신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으며, 달게 감수하기보다는 강한 거부감을 느껴 ‘억울함’으로, 그 충격과 당혹감이 엄청났다고 고백한다. 자신의 임신에 대해, “모든 사람의 말은 나를 저주하는 것 같고 바람에 날려 들리는 웃음소리는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너무나 억울하였다.… 이렇게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 또 있겠느냐!”(‘모된 감상기’)는 심한 넋 두리까지 하였다. 임신한 자신이 사랑스런 아이를 갖고 있다는 모성적 감정에 앞서 자신의 육체의 힘듦을 호소한 것이었으며, 자기를 계발하고 발휘하는 절정의 시기에 자신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여기는 임신이 자신에게는 바로 충격이었던 것이다. 이는 나혜석만이 아닌 대부분의 여성들이 겪는 문제였을 것이고, 그만큼 여성에게 임신, 출산이란 적응하기 어려운 것이었음을 뜻한다. 그나마 나혜석은 만삭의 몸으로 유화개인전 등을 개최하여 자신의 몸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정면 돌파함으로써, 여성의 몸을 꽃피웠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또한 어머니의 자격을 논하며, 아이를 넷이나 낳고 키움으로 어머니로서도 철저하였다. 이혼 후 그 여성으로서 그의 몸은 오히려 모성과 거의 일치하는 것이 되었다. “내가 사람의 어머니가 될 자격이 있을까? 생리상 구조의 자격 외에는 겸사가 아니라 정신상으로는 아무 자격이 없다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고 하였지만. 그러나 잠시 태어날 새 생명에 대한 기대로 환희를 맛보기도 하고, 생명에 대한 경외 같은 것도 느낀 것 역시 당연한 모성으로서의 삶의 일부임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몸과 정신이 이원화되어 이해되고 있지만, 결국 그녀의 모성은 복잡하고도 미묘한 심리 변화를 겪으며 출산과 양육을 감당하게 된다. 동시에 출산과 육아의 고통을 시로 또는 글로 써서 여성의 몸의 실체를 알리는 작업을 통해 그녀는 여성의 몸은 바로 소중한 자신이고 그로 인한 고통은 감수해야 하는 것으로 승화하였던 것이리라. 여성의 몸은 가까이는 후세를 잇고, 넓게는 인류 사회를 위해 헌신한다는 숭고한 정신도 그 안에 내포돼 있다고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래도 그녀에게 자녀 양육의 어려움은 출산의 고통 못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잠을 못자는 것이 가장 큰 고통으로, “(모성의) ‘솟는 정’이라는 것은 순결성, 즉 자연성이 아니요. 가연성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종종 유모에게 맡겨 포육케 한 자식에게는 별로 어머니의 사랑이 그다지 솟지 않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천성으로 구비한 사랑이 아니라 포육할 시간 중에서 발하는 가연성이 아닐까 싶다.”고 말할 정도였다.415) 이상경, 앞의 책, p.216.

젖 먹일 때나 잠을 자지 못할 때, 노동과 모성에 얽매인 여성들의 일상생활의 피폐함은, 특히 수유에 관한 민요가 많이 나와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수면 부족에 따른 여성 몸의 고통을 절감한 그는 처음 아기에게 젖을 먹이라는 산파의 말에 놀라 당황하였다. “나는 어쩐지 선뜻하였다. 냉수를 등에다 쭉 끼치는 듯하였다.… 이게 웬일인가? 살은 분명히 내 몸에 붙은 살인데 절대의 소유자는 저 쪼그만 핏덩이로구나!” 나혜석은 자신의 몸에 대해 그의 딸에게서조차 침해 받고 싶지 않은 자신을 보고, 자신이 아닌 외부의 명령이나 지배에 대해 심한 저항감을 느꼈다. 흔히 일반적으로 강조되는 모성과 개인 여성간의 싸움에 자신도 그것이 서로 모순됨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분명 잠을 요구하는 몸은 자식이 원수 같이 여겨졌다. “나는 ‘자식이란 모체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라고, 그러나 재삼 숙고하여 볼 때마다 이런 걸작이 없을 듯이 생각하였다.” 마침내 자식에 대해 여성의 몸은 두 손을 들어 항복함으로써 모성이 승리하였다고 해야 할지. 악마 같이 여겨지는 자식을 이기지 못하는 여성, 그게 바로 모성으로 인간의 종족 번식과 생존 번영의 순리라 할 것인지. 개인과 가족, 그리고 사회라는 그 지극한 유기적 관계는 벗어날 수 없는 것이었고, 도저히 거스를 수도 없었던 것으로 짐작해본다.

“잠 오는 때 잠자지 못하는 자처럼 불행 고통은 없을 터이다.… 모든 모가 불쌍한 줄을 알았다”고 한 그는 몸의 한계를 절실히 드러내고 정신력의 고양, 또는 일상적인 사회 관례에 따른 여성의 몸에 대한 억압내지는 강요를 절감한 듯하다. 어쩌면 여성의 몸과 섹 슈얼리티, 그리고 모성이란 면에서 중층적이고도 복합적인 관리 통제로 인한 여성 억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혜석도 끝내 모성에 대한 부정은커녕 다수의 자녀를 위해 이혼을 거부하려고 하였다. 다만, 몸의 고통을 결코 부정하지 않고 고백함으로써 그리고 다른 여성의 고통까지 생각함으로써 자신의 선진적 역할을 다한 것이라 하겠다.

그의 몸은 자식에 대한 사랑과 인정으로, 다시 말하면 몸에 대한 자기애 못지 않게 자식도 그에게 의미 있는 사랑스런 존재였음을 고백한다. 양자 간의 괴리에 대한 괴로움은 단순히 시대를 앞서가는 혁명적인 것이라기보다 그걸 뛰어넘는 인간적인 것으로 보인다. 모된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자기를 분명히 인식하고, 다시 그것을 초극하여 해방감을 얻으려 한 것이나, 자녀에 대한 사랑을 감정뿐 아니라 오감, 그리고 몸 전체로 느끼고 수용한 것이었다. 때문에 그녀에게서 당당한 여성 의식과 몸을 통한 모성은 통합 가능한 것이었다. 여성도 사람으로서 자기 긍정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과 동시에 모성을 굳이 여성의 특권이나 의무로 특화할 것이 아니라 부모로서의 인간적 도리이자, 사랑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녀의 신식육아법은 시간 맞춰 우유를 먹이는 것에서부터 처음부터 제대로 된 말 가르치기, 냉수를 먹이고 얇게 입힌다든지 등으로 자녀의 건강한 몸에 책임을 다하는 세심한 것이었다. 그녀의 이러한 모성애는 친구 일엽이 불가피하게 외면한 아들 김태신에게까지 적절히 발휘되었다. 또한, 당시 직업 여성의 경우, 사회적 배려가 있을 때 모성도 따라서 우월해지므로 가정에 갇혀 있는 것에 비해 오히려 사회 속에서 모성이 진보할 수 있다고도 보았다. 그러므로 노동 조건을 개선하여 직업 부인의 건강을 보장해야 한다는 그녀의 주장은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것이었다.416) 야마시타 영애, 「근대조선에 있어서 “신여성”의 주장과 갈등-양화가 나혜석을 중심으로」, 『日本國家와 女』, 靑弓社, 2000. 그러한 그녀도 역시 자녀의 출산 터울 조절, 즉 산아 제한에는 그리 성공하지 못한 것 같다.

임신 출산을 위한 여성의 몸은 식민지 인구 정책 아래 관리, 통제되는 몸으로 재현되는 본질적 제한성을 갖는다. 또한, 현모양처 이데올로기 교육에 의해 여성의 몸은 그 내면과 외면의 균열이 차츰 줄어들도록 여성 안에 내면화되어 갔다. 여성을 끊임없이 대상화한 식민지 사회에서 나혜석의 몸·모성론은 나름대로 젠더 인식을 반영한, 시대를 앞서 간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