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5권 ‘몸’으로 본 한국여성사
  • Ⅲ. 몸, 정신에서 해방되다-1 몸의 가치와 모성의 저항
  • 03. 여성의 건강과 민족의 모성
  • 신여성․농촌 여성의 몸과 모성
  • 2. 농촌 여성의 몸과 모성
신영숙

모성에 대한 여성들의 대응 태도도 삶의 조건이나 생활 환경에 따라 크게 달랐다. 도회지 여성들은 젖이 부족한데 비해, 농촌 부인들은 젖은 많으나 아기가 오히려 약한 이유는 과로와 영양 부족의 직간접적 영향이 컸던 것이다. 농촌 부인네들은 농번기에 농사바라지를 헌신적으로 하다 보니 아이에게 젖을 충분히 먹이지 못하였고, 겨울에도 갑자기 바쁠 때는 엄마가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여, 모체의 영양 부족으로 아기의 발육이 당연히 부진하였다.

흔히 새벽에 별을 보며 가장 먼저 일어나고, 밤에 별을 보며 가장 늦게 자리에 든다는 이른바 후방의 농촌 여성, 가장 못 먹고도 소처럼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당시 농촌 여성의 몸이 만나는 현실이자, 현장이었다. 피임, 산아제한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실제로는 잘 알지도 못하였고, 오로지 다산과 우량아 양육이라는 사회정책적 요구에 순응하여 잘하면 표창 받고, 미담의 주인공이 될 것을 종용 받았던 것이다.

또한, 1920년대 농촌 여성들은 주경야독으로 야학이나 강습소에서 한글 공부도 하였다. 아이를 등에 업고 젊은 아낙은 공부하는 몸으로 변신하는데 이 또한 자녀 양육에 필수 조건이 되는 것이었다. 동시에 1930년대 농촌진흥운동에 따라 여성의 노동은 가중되어, 김매기, 밭 갈기, 벼 베기에 품앗이로 참여하는 등 농촌 여성의 노동력 동원은 강화되어 갔다. 옥외 노동과 양잠, 새끼 꼬기 등의 부업, 그밖의 각종 마을 일들이 공동 작업으로 조직적으로 강행됨으로써 여성의 몸은 혹사될 수밖에 없었다.417) 최석완․임명수 역, 『일본 여성의 어제와 오늘』, 어문학사, 2006 참고. 근대 일본 농촌 여성들도 거의 비슷하게 힘든 삶을 살아야 하였다.

농사일에 덧붙여, 가족을 위한 식사 준비, 베 짜기와 바느질, 빨래 다림질, 육아와 어른 시중까지 말 그대로 허리가 끊어지도록 쉴 새없이 손발을 놀려야 하는 농촌 여성에게 실제 자녀 출산은 의무였지만 양육은 뒷전이었다. 가족 안에서 시부모를 위한 며느리 역할이 오히려 모성에 앞섰다. 그리고 가족 생계를 위해 출산 후 바로, 또는 길어야 3일만에 부엌으로, 들판으로 내몰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농촌 여성은 고작해야 “이고 지고 들고, 농촌 여자는 소보다도 쓸모 있고 소보다도 힘세고 소보다도 끈기 있다.”는 노동력으로 평가되곤 하였다. 이런 상황은 남성 가장의 부재 중 여성이 가장 노릇을 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상황에서 더욱 흔히 일어났다. 가내 수공업에서 양잠을 보면, 1930년 잠업 인구가 전 농업 인구의 3%이며, 그 중 여성이 95.6%를 차지하는 것이 좋은 예이다. 뽕나무 묘목 재배에서부터 양잠, 그리고 실잣기까지 전 과정을 여성이 담당하는 것은 물론 면화 재배에서 직포까지 모두 다 여성의 몫이었다. 여성 가장은 전시 체제 아래에서는 초근목피, 쑥, 감자, 나뭇잎 채취와 콩깻묵 등으로 연명하는 데도 몸을 써야 하였다. 생계를 위한 여성의 노동력이 최우선으로 모성에 앞선 상황에서 농촌 여성의 모성과 육아 문제는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일제의 각종 농업 정책에 여성은 동원되기 일쑤였다. 마을의 공동 증산을 위한 각종 부인 강습회뿐만 아니라 일어강습회, 그리고 방공 훈련 등 시국 인식의 철저한 심화를 도모하는데 동원된 농촌 여성의 몸은 일상적으로 그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운 정도 였다. 더욱이 전쟁이 확대됨에 따라 국가의 모성 역할에 대한 기대와 요구도 더욱 커져, 교과서에서 모성이 자주 언급되고, 강조되었다. 고등여학교의 국민과의 교수 방침에는 “교육칙어의 취지를 받들고 다음 세대 국민의 어머니로서의 덕조와 신념을 함양할 것”이라며 아동 보육 실습이 중시되었다. 즉, 강건한 모체를 위한 훈련을 어머니들에게 요구하였으며, 전시 동원을 위한 ‘낳아라, 불려라’ 정책은 여성의 몸을 혹사하였다. 이야말로 여성성에서도 최상의 가치라 하는 모성을 표방한 여성 희생에 다름 아니었다.

당시 일본은 높은 유아 사망률, 결핵, 성병 등의 만연으로 국민의 열악한 건강 상태에 큰 관심을 갖고 1937년 보건소법을 제정하고 중·일전쟁 개시 이후 후생성을 설립, 전시 전투력과 노동력 공급에 주력하였다. 즉, 여성의 출산력과 국민 체력 향상을 위한 모성이 전쟁의 관건이었던 것이다.418) 안태윤, 앞의 책, p.102 참조. 결국 후방 농촌 여성의 몸이야말로 그만큼 노동력과 모성의 모순 현상을 배제할 수 없었으며, 몸에 각인할 수밖에 없었다.

전시 농촌 여성들은 가족의 생계 부담이 더욱 증가함에 따라 열악한 생존 조건에서 자신의 몸을 가누기도 어려웠지만, 그에 앞서 다산, 양육의 책임을 고스란히 떠안고, 자신의 몸을 희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옥외 노동을 권장하기 위한 탁아소가 명분상 있었고, 이를 통한 노동 착취는 가능하다 하더라도 아이들은 방치, 유기되기 쉬웠다. 여성의 몸은 이 모든 것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자녀를 양육해야 하는 어머니, 모성의 희생이란 허명 아래 이와 같은 일제의 정책적 강요는 전쟁 동원기에 더 심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모성적 희생은 아름답기만 하다.’는 말도 일제시기에 길들여진 폐습 또는 그 잔재의 흔적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이다.

어쨌거나 1941년 총독부는 ‘농촌 노동력 조정’ 방침을 결정하고, 각 시도에 시달하였다. 부인작업반이 편성되어 농업 공동작업반 중 1944년에는 여성이 34%나 차지하였다. 여성의 몸을 최대한 활용하고자 공동 탁아와419) 1942년에만 34,711개가 설립되었다. 공동 취사도 장려되었으며, 부인 지도원 훈련은 더욱 가속화된다. 전시 체제 여성은 전쟁에 아들을 내보내는 국가의 몸으로 계속 변신할 것을 요청받았고, 그런 와중에 위문단 노릇까지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후방 농촌 여성의 삶과 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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