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5권 ‘몸’으로 본 한국여성사
  • Ⅲ. 몸, 정신에서 해방되다-2 미, 노동 그리고 출산
  • 01. 미인의 시대
  • 미인대회의 등장
김미정

1957년 5월 20일 대한 늬우스에서는 미스코리아대회가 소개되었다. 한국일보 등의 주최로 열린 미스코리아대회는 서울시 공보관에서 세계 미인 대회에 참가할 미스코리아 선발을 위한 예선 대회였다. 예선에서 선발되어 최종 결선에서 오른 7명에 대한 한복과 수영복 심사도 진행되었다.426) 『대한민국정부사진집』 1, 국정홍보처, 1999, pp.230∼231을 확인해본 결과 1952년 1월21일 미스코리아선발대회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껏 제1회 미스코리아대회는 1957년에 5월19일에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었다(http://misskorea.hankooki.com) 참고. 당시 응모 자격은 만18세 이상 28세까지의 한국 여성으로서 지·덕·체와 진선미를 겸비한 사람, 직업의 유무는 불문하나 흥행 단체 또는 접객 업소에 종사한 일이 없는 미혼 여성이었다.

미스코리아대회는 이후 매년 개최되었다. 미인대회는 일반 성인 여성뿐 아니라, 여군, 미성년인 여고생들도 그 대상이 되었다. 1960년대 들어서면서 이러한 대회는 대중들의 많은 관심을 받게 되었고, 다양한 이름이 붙은 미인 대회는 계속 열렸다. 그 가운데 <미스 각선미>·<미스 여군 선발>과 같은 대회는 미스코리아대회처럼 일간 신문에 기사화되기도 하였다.

1964년에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앞두고 여군에서는 미스 여군 선발대회를 열었다. 육군 본부를 비롯한 예하 각 군에서 예선을 거친 11명의 미인 후보자를 뽑아 그 가운데 미스 여군 진, 선, 미를 선발하였다.427) e-영상역사관(http://www.e-history.co.kr), 「대한뉴스」 제469호 미스여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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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미스코리아 진 박현옥
1957년 미스코리아 진 박현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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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대회에 출전하는 미스코리아가 출국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1957년 5월 14일
세계대회에 출전하는 미스코리아가 출국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1957년 5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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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코리아 결선대회 출전자들의 수영복 심사 풍경, 1957년 5월 14일
미스코리아 결선대회 출전자들의 수영복 심사 풍경, 1957년 5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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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여군 선발자
미스여군 선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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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여훈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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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군의 경우 미스 <여훈(女訓)>,428) 『경향신문』 1961년 7월 11일자 미스여훈탄생 21세의 오봉선 병장. <미스여군선발>이 1960년대부터 여군 창설식에 맞춰 거의 매년 이루어지고 있었다.429) 『동아일보』 1963년 9월 6일자 여군창설13돌 미스여군대관식 ; 『동아일보』 1964년 5월 15일자 미스여군탄생 ; 『동아일보』 1965년 5월 15일자 미스여군탄생 ; 『경향신문』 1968년 9월 6일자 여군창설18돌 ; 『경향신문』 1970년 9월 4일자 미스여군선발도 여군창설 20돌 ; 『동아일보』 1971년 9월 6일자 여군창설21돌. 미스코리아대회처럼 미스 여군 선발에서도 수영복 심사는 빠지지 않는 중요한 심사 기준의 하나였다. 선발된 여군은 진, 선, 미 또는 지, 용, 미로 불리는 여느 미인 대회와 마찬가지로 순위를 나누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선발된 여성 가운데에는 당해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본선에 나간 경우도 있었다.430) 『동아일보』 1965년 5월 15일자 미스여군탄생.

물론 여군의 능력 평가는 타자 경연 대회라든가 체련 경기 등과 같은 다른 행사를 통해서도 다양하게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미스 여군 선발과 같은 경우 여군이라는 직업의 특성과는 다소 무관하다고 할 수 있는 대회를 지속적으로 개최하였다는 점에서 당대 직업 여성에게 요구된 여성미는 직업의 내용 및 업무의 성격과는 별개의 의미로 취급되고 있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 다. 특히, 선발의 방식이 당시 미스코리아대회나 다른 미인대회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유사한 내용과 기준을 적용하였다는 점은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1968년 12월에 있었던 제1회 <미스각선미대회>의 경우 대회의장을 맡은 여류 시인 모윤숙은, “구미 각국을 비롯한 일본에서도 오래전부터 미스 각선미대회를 개최하고 있는데, 각선미에 더 큰 관심을 가진 한국 여성에게 이같은 대회가 없었다는 것은 뒤늦은 감이 있어 이번에 부랴부랴 대회를 마련하였다.”며431) 『경향신문』 1968년 11월 25일자 미스각선미선발. 대회 취지를 설명하였다.

이는 당시 서구를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 진행되던 각종 미인대회 등에 사람들의 이목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 이러한 관심을 통해 여성의 몸에 대한 아름다움의 기준도 달라지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잡지나 영화 등과 같은 매체를 통해 보다 본격화되었다.

아래의 기사에서 보이는 다양한 미인대회를 통해 당시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이 주로 외모에 치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미스 코리아, 미스 아시아, 미스 태평양, 미스 아이, 미스 덴탈, 햇님공주, 미스 여군 등 각종 미스 콘테스트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때에 미스 각선미대회는 전체적인 아름다움만이 강조되던 여태까지의 콘테스트와는 달리 여성의 각선미라는 부분적 아름다움을 발굴키 위한 것으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 같다.432) 『경향신문』 1968년 11월 25일자 5면. (제1회 <미스 각선미 선발 대회> 기사 중)

○ MBC-1TV에서는 한국일보사가 주최하는 제1회 <미스 영 인터내셔널> 최종 심사를 어제 하오 5시 30분부터 공개 방송하였다. 13명의 젊은 미녀들은 수영복 차림으로 경염을 벌였는데 유한철, 신성일, 구정, 이수흥, 한문식, 허윤 등 심사위원들의 엄격한 심사가 두 번이나 있은 다음 영예의 미스 영 인터내셔널에 ○○○양이 선발되었다.433) 『매일경제』 1970년 1월 27일자 6면. (당선자 이름 생략, 강조: 필자)(제1회 <미스 영 인터내셔널>기사 중)

○ 문화방송 경향신문 후원으로 개최된 제1회 <미스 비너스 선발 대회>에서 진에는 방년 19세의 ○○○양이 영광을 차지하였고, 선, 미에는 모두 17세의 ○○○양과 ○○○양이 각각 선발됐다 … 미스 코리아 선발 대회가 활짝 핀 꽃의 제전이라면 미스 영 선발 대회는 개화를 앞둔 복스러운 꽃봉오리의 경연이라고나 할까. 17세 이상의 미혼 여성이 참가할 수 있는 주니어급의 미녀 선발 대회인 것이다 … 선발은 미스 코리아 선발과 똑같이 평상복 및 수영복 차림위 외모 심사와 1분 동안의 스피치로 진행됐다.434) 『경향신문』 1975년 3월 15일자 4면. (당선자 이름 생략, 강조: 필자)(제1회 <미스 비너스 선발 대회> 기사 중)

미인대회는 1970년대 들어 지상파에 의해 실황 중계되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더욱 끌게 되었다.435) 1972년 미스코리아 전국선발대회는 전국으로 각 지상파 3사에 의해 실황중계 되었다(『한국일보』 1972년 4월 22일자 8면). 각종 미인대회를 통해 ‘보여지는 몸’ 혹은 ‘보이기 위한 몸’으로써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기준들은 여성의 신체를 수치로 표현함으로써 관리의 대상으로서, 그리고 소비의 대상으로서의 의미를 여성의 몸에 부여한다. 각종 미인대회에서의 수영복 심사는 이 시기에도 중요한 선발기준의 하나였고, 여성의 키, 몸무게, 가슴 둘레와 엉덩이 둘레 등과 같은 신체의 각종 치수가 아름다운 몸을 평가하는 데 중요한 요소의 하나가 되었다.

이렇듯 많은 미인대회가 개최되면서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사회의 시각은 여성의 몸에 대한 수치화, 도구화, 상품화를 가속시키고 있었다. 그 결과 여성의 아름다움이 큰 키와 가슴 그리고 잘록한 허리와 엉덩이라는 섹슈얼리티로 왜곡되어 각인되었다.

미 군정 시기를 거치면서 서구의 미에 대한 기준이 대중 매체를 통해 유입되면서 여성들은 서구의 기준에 의한 몸에 더욱 주목하였다. 육체에 대한 수치화 및 그 기준에 맞는 정형화된 아름다운 여성 의 몸에 대한 관심은 대중매체의 발달과 함께 더욱 증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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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코리아 전국선발 중계 기사 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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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1960년대 여성 잡지들에서는 헤어스타일법에서, 화장법, 아름다운 다리 관리법, 연령에 따른 피부 손질, 다양한 스타일의 옷차림 등과 관련한 기사들이 많은 관심 속에 연재되고 있었다.436) 『女苑』 2권 9호, 1956년 10월 職業女性의 化粧과 衣裳 ; 『女性界』 6권 1호, 1957년 팔등신미인스타일로 되는 옷차림 ; 『女性界』 6권 2호, 1957년 다리는 美의 포인트 ; 『女苑』」 3권 5호, 1957년 化粧은 本能이다 女性은 最大限度까지 아름다워야 ; 『女苑』 3권 9호, 1957년 한여름의 머리 스타일 ; 『女性界』 7권 2호, 1958년 헤어·스타일과 化粧, 皮膚에 관한 이달의 주의 ; 『女性界』 8권 1호, 1959년 現代醫術은 全部 美人으로 만들 수 있다 ; 『女性界』 8권 1호 1959년 美容整形敎室 ; 『女苑』 6권 6호, 1960년 여름철의 화장 ; 『女苑』 7권 4호, 1961년 주니어를 위한 헤어·스타일. 아름다운 몸을 위해서는 치장하고 꾸미는 것에 대한 여성들의 끊임없는 관심과 지속적인 노력을 요구하였다. 미용실 광고를 비롯한 각종 화장품 광고 등은 계속해서 여성들을 자극하고 있었다. ‘아름다워지고 싶으면 가꾸어라’, ‘가꾸기 위해서는 이렇게 해야’ 한다와 같은 소개가 제공되고 제공된 정보를 통해 ‘보이기 위한 몸’을 위한 치장과 꾸밈이 능력있는 여성의 자기 관리 방법인 것처럼 소개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변화 속에 1950년대 후반이 되면서부터 여성지에는 미용․성형․교정을 하는 병원 광고도 등장한다.437) 『女苑』 4권 5호, 1958년 5월, p.237 광고 미용성형전문 최신미국 스미스부라운式 美는 여성의 특권·美는 새로운 행복을 약속한다! ; 『女苑』 6권 5호, 1960년 6월, p.269 광고 미용·정형·교정을 지성형외과 ; 『女苑』 7권 2호, 1961년 2월, p.332 미용정형 전통과 신용기술을 자랑하는 이화정형의 미용정형! ; 『女苑』 7권 3호, 1961년 3월, p.297 미용정형·피부과 빠고다의원. 현재와 같은 성형을 위한 병원인 셈이다.438) 1950년대 중후반 서울의 대부분의 미용정형 전문의들은 일본에서 유학하고 귀국해 서울에서 병원을 연 경우가 많았고, 당시 일본 의학계에서는 ‘整形외과’ 안에서 미용정형분야가 특화·재편되는 등 급속한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조재한, 「1950년대 여성의 몸을 통한 근대화와 소비욕망의 형성-전후 1955-1959년 여성잡지 <여원>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9, p.50). 치료 목적에서 아름답게 꾸미기 위한 기능이 더욱 강조된 ‘미용정형(美容整形)’의 등장은 ‘치장하는 몸’과 ‘보여지는 몸’으로의 변화가 본격화됨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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