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5권 ‘몸’으로 본 한국여성사
  • Ⅲ. 몸, 정신에서 해방되다-2 미, 노동 그리고 출산
  • 03. 출산의 제한과 통제 사이
  • 애국하는 몸? 규제받는 몸!
김미정

해방 이후 군정으로 시작된 미군의 주둔으로 기지촌은 급속히 증가하였고 기지촌에는 빈곤으로 인해 다른 생존 수단을 찾고 있던 많은 한국 여성들이 유입되었다. 6·25전쟁 이후 미국은 남한 전역의 주요 도시마다 미국의 주력 부대들이 진주하면서 전국의 곳곳에 미군 기지촌이 형성되었다.479) 기지촌여성과 관련한 연구는 다음을 참고 바란다. 이나영, 「기지촌의 공고화 과정에 관한 연구(1950-1960): 국가, 성별화된 민족주의, 여성의 저항」, 『한국여성학』 23권 4호, 2007 ; 『위험한 여성: 젠더와 한국의 민족주의』, 삼인, 2001 ; 김현선, 「주한미군과 여성인권」, 『2001년 제주도 인권학술회의 발표문』, 2001 ; 김연자, 『아메리카타운 왕언니, 죽기 오분전까지 악을 쓰다』, 삼인, 2005.

1971년 미군 당국은 한국 정부에 기지촌 정화 사업을 요구하였고, 박정희 정권은 미군 당국의 요구를 받아들여 기지촌 여성들에 대한 성병 진료를 정기적으로 실시하도록 하였다.480) 김현선, 앞의 글. 병 진료를 통한 기지촌 여성들의 관리는 미군들을 위해 이루어졌다. 이 여성들은 ‘양공주’, ‘양갈보’ 등으로 불리며 한국 사회에서 온갖 멸시를 당하였다.

송탄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교양강좌를 한다고 각 홀에서 일하는 양공주님들은 모두 한성예식장에 집합하라고 하였다 … 자매회에서는 여자들을 모아 자주 교양강좌를 하였는데, 제 발로 나온 여자들은 없었다. 모두들 검진증을 뺏기지 않으려고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앞쪽 좌우로 군수, 보안과장, 평택군청 복지과장, 자매회 회장 김은희가 앉아 있었다. …

“에. 여러분은 애국자입니다. 용기와 긍지를 갖고 달러 획득에 기여함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예. 저는 여러분과 같은 숨은 애국자 여러분께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미국 군인들이 우리나라를 도우려고 왔으니 그 앞에서 옷도 단정히 입고, 그 저속하고 쌍스러운 말은 좀 쓰지 마세요.”… 보안과장이 인사하고 보건소 소장이 성병 진료를 잘 받아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다.…481) 김연자, 앞의 책, p.123에서 발췌. (강조는 필자)

비난과 멸시의 몸으로 때로는 국가에 의해 애국하는 몸으로 포장당하는 이중적 현실이 드러나는 이야기이다. ‘애국심’이라는482) 캐서린 문, 「한미관계에 있어서 기지촌 여성의 몸과 젠더화된 국가」, 『위험한 여성』, 삼인, 2001. 외피속에 규정된 기지촌 여성의 몸은 이 시기 국가의 통제에 놓인 또 다른 몸이었다.

1971년 12월 22일 기지촌 정화 정책을 공식화하고 이를 청와대가 직접 챙기도록 지시하여 각 부처 차관급을 중심으로 정화위원회가 구성되었다. 1972년 10월 유신 직후 설치된 계엄사령부는 그 해 10월 28일 각 계엄 사무소와 계엄 분소, 내무부, 법무부, 보사부 등에 ‘기지촌 정화 대책’이라는483) 1972년 10월 30일 관보 제6290호. 조치 사항은 두 가지였다. 마약사범을 구속하라는 것과 성병감염자는 완전 치료한다는 것이다. 1977년 4월 대통령비서실 기지촌정화대책(국가기록원 EA0006492). 1977년 현재 기지촌 주변의 윤락여성은 9935명, 성병진료기관은 62개소. 문건을 내려 보내 기지촌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기지촌 정화 대책으로 혜택을 받은 이들은 미군이었다. 기지촌 여성은 성병을 옮기는 ‘주범’으로 관리되고 규제의 대상으로 존재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관리 대상이 된 기지촌 여성의 몸은 규제의 대상이자 검사의 대상이었다. 기지촌 여성의 몸은 미군에 의해, 업주에 의해 그리고 그들을 멸시하는 사람들에 의해 통제되었다. 이는 그들에게만 국한된 문제로 끝나지 않고 그들이 낳은 아이들에까지 그들의 당면 문제들을 고스란히 대물림하였다.

기지촌 여성에게 국가가 요구한 몸은 성애화된 몸으로서의 기능이었다. 국가는 그녀들에게 아이를 낳는 몸, 즉 재생산을 위한 몸의 기능을 원하지 않았다. 재생산을 거부해야 하는 몸, 일상적인 폭력과 질병에 노출된 몸, 국가에 의해 통제받는 몸 그것이 기지촌 여성들의 몸이었다.

재생산의 역할을 부여받지 못한 이들 여성들이 낳은 혼혈아의 경우 그들의 삶 또한 평탄할 수는 없었다. 6·25전쟁기에 생겨난 혼혈아 뿐 아니라, 기지촌 여성들이 낳은 혼혈아들은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에서 ‘튀기’라 불리며 무시당하였다. 혼혈인들이 자라 10대 20대가 되어 학교나 가정 밖에서 차별 대우를 받게 되 면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이는 큰 상처로 남게 되었다. 특히, 흑인 혼혈아들은 국적이 한국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도, 미국인 어느 쪽으로도 살지 못한 채 철저히 외면 당한 삶을 살아갔다. 이러한 차별과 배제는 자라나는 아이들로 하여금 충동적이고 부정적인 행동을 유발시키기도 하였다. 유흥비로 학비를 써버리거나, 정상적인 교육을 받고 있던 소녀가 기지촌으로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다.484) 여기서의 서술한 ‘혼혈인’은 기지촌 여성들,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 미군 등에 의해 출산된 이들만을 한정한 것임을 미리 밝힌다(『동아일보』 1971년 5월 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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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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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혼혈아 보호방법이라고 하였던 것이라 봐야 13세까지 해외에 입양시키는 것, 어머니와 함께 살게 하여 한국 시민으로 정착하도록 교육비와 생활비 등을 지원하는 것, 어머니마저 부양의 책임을 맡지 않으려 할 때 시설에 아이를 수용하도록 하는 정도였다.485) 『동아일보』 1971년 5월 22일자. 이 모두는 주로 외국인의 원조가 뒷받침이 되었던 일이었다.

한국 국적의 혼혈아 등은 살 곳과 일자리를 갈망하였으나 이들의 외침에 귀담아 주는 이는 많지 않았다.486) 『동아일보』 1974년 11월 2일자. 혼혈인들이 구할 수 있는 직업이 제한되어 있는 현실에서 혼혈인 여성들의 경우 해외로 입양을 가지 않으면 기지촌에서 성매매를 할 위험에 노출되곤 하였다.487) 『기지촌 혼혈인 인권실태조사』,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상황실태조사 연구용역사업보고서, 2003.

기지촌 여성을 어머니로 둔 혼혈아들은 그들 어머니의 몸이 받았던 상처뿐 아니라, 그들의 빈곤한 생활고까지 대물림 받았다. 기지촌 여성들 혹은 6·25전쟁기 미군의 강간 등에 의해 아이를 낳은 여성들의 몸은 순결 이데올로기가 강한 한국 사회에서 그들이 남은 아이들에게로까지 차별과 배제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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