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6권 한 해, 사계절에 담긴 우리 풍속
  • 1 총론
  • 01. 세시 풍속의 문화사적 의미

이 책은 세시 풍속과 그 변화에 대한 이해를 통해 한국 문화의 역사적 흐름을 드러내는데 그 목적을 두었다. 이 책에서 다루는 주제와 대상은 우리의 문화사를 재구성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 지식이기도 하다. 학술적으로는 역사상 지배층의 생활과 관련한 그들의 사상과 그 변화를, 피지배층에 대해서는 시기마다의 농업 생산력을 반영하는 농사력 주기와 그에 따른 생활 패턴을 파악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세시 풍속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들보다는 민속연구자들이 주로 다루어왔던 분야이지만 이들이 그간에 대상으로 한 자료가 매우 한정적이고 관점도 제대로 정립되지 못하다 보니 이를 통해 시대적 변화는 물론 생활상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주제는 이미 조선시대의 실학적인 연구에서 광범위하게 다루어진 분야의 하나다. 예컨대 유득공(柳得恭)의 『경도잡지(京都雜志)』(정조 연간), 김매순(金邁淳)의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1819), 홍석모(洪錫謨)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등은 대표적인 세시 관련 종합서다. 정동유(鄭東愈, 1744∼1808)의 『주영편(晝永編)』(1805),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 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도 많은 자료가 실려 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장지연(張志淵, 1864∼1920)의 『조선세시기(朝鮮歲時記)』, 최영년(崔永年)의 『해동죽지(海東竹枝)』(1921),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의 『조선상식(朝鮮常識)』―풍속·지리·역사편(1948) 등이 나왔는데, 이전 시기의 맥을 잇는 종합서의 하나다. 『조선상식』 중 세시류(歲時類)에는 세배부터 제석까지 30항목의 세시 용어에 대한 해설이 있다.

위와 같은 선현들의 기록에 근거하여 필자는 다음과 같은 점을 밝히면서 세시 풍속의 본질에 접근하고자 한다.

첫째는 세시 풍속 현상을 주도한 주체를 파악하는 것이다.

삼국시대와 고려 및 조선이, 그리고 조선의 경우는 초·중기와 후기가 풍속에 있어서 여러 가지로 차이를 갖는데, 이는 특히 행사의 주체가 어떠한 세력이었나를 밝힘으로써 그 본질과 변화의 단서를 파악할 수 있다. 행사 단위의 변천은 곧 행사 주체의 변화를 의미한다. 예를 들면 조선 초기에 사직, 성황, 여제, 기우제 등 세시 의례의 행사 단위는 국가에서부터 군·현까지였으며 그 이하로는 시행되지 않았으나 조선 후기로 내려오면서 불교나 무속의 주변화와 병행하여 변형된 형태로서, 또는 새롭게 만들어진 의례들이 마을이나 개인 단위로까지 확산되어 시행되었다. 후기의 민촌의 형성과 궤를 같이 한 동제의 확산은 군·현 단위 위주의 조선전·중기 행사에 비하면 행사 주체가 민중이 되는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서는 기존의 체제로 유지되는 곳도 있고 무당, 유랑 광대 등 촌락 밖의 전문인에 의해 행해지는 경우도 나타났다.

그러므로 행사의 주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행사의 지역적 범위와 단위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행사의 단위를 개인, 마을, 면, 군·현, 도, 나라 전체 등으로 구분한다면 그 중 어디에 해당하는지, 행사의 범위가 어떻게 정해져 있는지를 무엇보다 먼저 알아야 한 다. 정월 보름에 거의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줄다리기는 행사 며칠 전에 아이들의 골목줄에서 시작된다. 아이들의 줄다리기는 어른들의 동네 줄다리기로, 동네 줄은 몇 개의 면을 단위로, 크게는 군을 단위로 하는 큰 줄로 확대된다. 이것이 갖는 의미는 단순한 놀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통시대 민중들의 교류의 범주와 이를 통한 사회 조직의 일면을 볼 수 있다는 데에까지 이른다.

둘째는 농업 생산력의 발전과 이에 따른 세시상의 변화를 분석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농업 생산력의 발전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시점은 연작(連作)체계로 발전한 고려 말기와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이앙법(移秧法)이 적용되어간 17세기 후반경이다. 이 시점들을 전후하여 지역적인 생산력의 보급 범위와 편차, 이에 따른 변화의 양상을 추적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고려와 조선의 농사력 주기는 연작법 시행을 전후하여 크게 바뀌었으며, 이앙법 보급 또한 마찬가지로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지역적으로는 한전 지역과 수전 지역에서의 차이가 세시 풍속에 반영되어 있으며, 수전 지역 내에서도 이앙법의 보급으로 벼의 추수 시기가 추석 이후로 늦어진 삼남 지역에서는 추석보다는 정월로 행사의 축이 이동한다.

셋째로 세시 풍속의 종교적 연원을 통해 그 유래를 밝히는 것 이다.

조선시대 이전의 세시 풍속에는 도교와 불교의 요소들이 그 이후 시대보다 상대적으로 많다. 상원(上元, 정월 15일), 중원(中元, 7월 15일), 하원(下元, 10월 15일)의 삼원체계는 도교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려의 풍속을 조선의 그것과 가장 특징적으로 구별해 주는 연등회(燃燈會), 팔관회(八關會) 등의 행사는 불교 의례다. 석가탄신일인 초파일 밤의 등놀이는 아직도 우리의 고유 세시 풍속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것은 신라 적부터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널리 성행한 것은 고 려시대에 들어와 불교가 장려되면서부터이다. 이 중 초파일 행사와 관련 있는 등놀이는 연등회다. 고려 때의 연등 행사는 조선과는 달리 정월 보름 때 행하였고 현종(顯宗, 992∼1031) 원년 이후로는 2월 보름으로 옮겼으나 민간에서는 원래대로 정월 보름에 행해졌던 것 같다(『高麗史』 卷69, 志23, 禮11 嘉禮雜儀 중 上元燃燈會儀). 『동국세시기』에서 홍석모는 『고려사』 기록을 들어 “왕궁이 있는 국도로부터 시골 마을에 이르기까지 정월 보름에 이틀 저녁 연등하던 것을 최이(崔怡, ?∼1249)가 4월 8일로 옮겼다.”고 하였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이때가 힘든 농사일을 한고비 넘기고 잠시 쉴 수 있는 시점이었음을 고려하면 그 변화의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에 들어와서 사찰의 연중 행사는 민간의 풍속 주기에 맞추어졌다. 정초 불공이나 입춘 불공, 백중, 동지 불공 등이 그러하다. 특히, 백중은 기존의 도교와 불교적인 전통에 조선 후기의 변화된 농경 세시 주기가 반영된 것으로 이 세 가지 요인이 한꺼번에 어우러져 형성된 큰 명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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윷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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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은 세시 연구에 더하여 우리는 행위의 상징성에서 세시 풍속의 본질에 더욱 접근해 갈 수 있다. 정월의 대표적인 세시 놀이의 하나로 윷놀이가 있다. 이 놀이를 왜 이때 많이 하는가에 대한 해답은 놀이가 갖는 상징성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윷놀이는 원래 음양 원리와 천체를 비유하여 만든 놀이이면서 동시에 점(占)의 한 방식임을 인식한다면 곧 정월 놀이로서의 윷놀이가 갖는 의미는 자명해진다. 윷이 바로서거나 뒤집히는 것은 곧 양과 음이 교차되는 것과 일치하므로, 이로 인해 천지의 만물이 형 성됨을 상징한다고 하겠다. 우리의 조상들이 새해를 맞이하여 놀이를 통해 단순히 노는데 그치지 않고 이와 같이 천지의 이치를 깨닫고, 이를 통해 지상의 길흉화복과 흉풍(凶豊)을 점치려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세시 풍속의 문화사적 접근은 무엇보다도 이를 통해 일상생활에 표현된 시간 및 계절에 대한 개념과 이의 변화상을 파악할 수 있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 세시에 절기가 반영되어 있듯이 그대로는 밋밋한 일 년을 마치 악보처럼 마디(節)로 끊어준다는 점으로부터 세시의 개념과 인식이 출발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기초 연구는 물론 다음 단계로서 그 방식과 근거가 무엇인가를 밝히는 것이 곧 문화사적인 과제인 것이다. 그래서 지배층의 세시 문화사에는 지배 이념인 불교와 유교의 교차와 대체 현상이 나타나고, 피지배층의 세시 문화사에는 생산력의 변화가 반영되어 양자 사이의 긴밀한 관련성도 파악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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