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6권 한 해, 사계절에 담긴 우리 풍속
  • 1 총론
  • 02. 세시와 역법의 인지 체계

달의 위상 변화를 태양의 운행과 맞추어 날을 정하는 우리나라의 태음 태양력 체계에서는 태양의 운행을 기준으로 24기(氣)를 정함으로써 계절의 변화를 고려한다. 24기는 12절기(節氣)와 12중기(中氣)로 구성된다.

날은 10간(干) 12지(支)로 일진(日辰)을 정하는데, 건양(建陽) 1년, 즉 1896년에 태양력을 채택한 이후에도 이 일진 체계만은 실생활에 광범위하게 적용되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달력에 기재되어 왔다. 태음·태양력 체계에서의 세시 주기와 태양력이 채택된 이후의 변화를 살피는 것은 매우 기초적이면서도 중요한 작업이다.

역법 체계에 관심을 갖고 보급에 힘쓴 임금은 조선 세종이다. 1444년(세종 26)에 왕명을 받은 이순지(李純之) 등이 3책으로 간행한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이 출간되었는데, 명나라 『칠정추보(七政推步)』 등을 연구하여 원나라 『수시력(授時曆)』을 이해하기 쉽게 해설한 책이다. 내용 중에는 절기와 기후의 관련성도 언급하여 농사에도 도움을 줄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고대 중국의 역법은 황제력(黃帝曆)·전욱력(顓頊曆)·하력(夏曆)·은력 (殷曆)·주력(周曆)·노력(魯曆) 등 시대와 지역에 따라 변화를 거치면서 내려오다가 기원전 104년 한 무제 태초(太初) 1년에 비로소 정립된다. 그중 하력이 중국과 주변 국가들의 기본 역법으로 통용되어 오다가 청나라 순치(順治) 2년인 1645년에 서양 역법 체계를 수용한 시헌력(時憲曆)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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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세력』 1777년
『천세력』 177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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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헌력』 1707년 속
『시헌력』 1707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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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역법으로서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보급된 시헌력 체계는 효종 4년(1653)부터 태양력을 채택하기 전인 1895년까지 지속되었는데, 주로 시헌서(時憲書)라는 이름으로 민간에까지 보급되었다. 이 책에는 국가적 축제 행사 내용은 물론 이삿날 등 일상생활에서의 길일까지 명시되어 있어 18세기 후반에 편찬된 『백중력(百中曆)』, 『천세력(千歲曆)』 등과 고종 때 발간된 『만세력(萬歲曆)』과 함께 세시 풍속을 연구하는데 기본 도서가 되고 있다.

조선 중기 기록을 보면 삼짇날은 답청(踏靑) 등 각종 모임이 열렸다. 이문건(李文楗, 1495∼1567)의 『묵재일기(黙齋日記)』의 기사를 참고하면 다음과 같다.

양 성주(城主)가 신원(新院)의 산 아래로 가서 답청의 자리를 마련하고 사우(士遇)와 경우(景遇)를 초대하고 나도 오라고 하여 아침밥을 먹고 모임에 갔 다. 먼저 술자리를 마련하여 점심때까지 술을 마셨다. 점심을 마치자 기생을 불러 노래를 부르고 술을 권하게 하였다. 날이 저물어서 모임을 파하고 헤어졌다(1556년 3월 3일).

청명과 한식은 같은 날이기도 하지만 대개 한식 다음날 청명이 오던 것이 시헌력을 적용하기 시작한 1654년 이후로 청명이 먼저 오게 되었다. 이경석의 문집 『백헌집(白軒集)』은 시헌력 적용 이후의 한식과 청명의 선후 관계의 변화를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갑오년(1654)부터 탕약망(아담 샬)의 역법을 사용하면서 대통력을 시헌력으로 바꾸었다. 시헌력은 청나라 역법의 이름이다. 시각의 수가 주야로 줄어 100각이 96각으로 되었고 이에 따라 절기의 순서가 어그러져 옛날에는 한식 하루를 지나 청명이 왔는데 지금은 청명이 한식보다 먼저 온다(自甲午年 用湯若望曆法 大統曆變爲時憲曆 時憲乃淸曆之名也 刻數減晝夜 古則百刻而今則九十六刻 節序舛 古則寒食後一日乃淸明 而今則淸明先於寒食矣).

청명에 묘에 오르는 기사들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 경우는 묘제(墓祭)를 지낸다기보다는 성묘(省墓)의 의미를 갖는다. 다음은 이러한 예다. “청명일에 산소를 청소하니 날이 밝았다(淸明日 展掃景出先壟 仍宿齋庵示諸姪).”[『학봉집(鶴峯集)』,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청명일에 선조와 형의 묘에 올랐다(淸明 上先祖幷兄墓).”[『경정집(敬亭集)』, 이민성(李民宬), 1570∼1629], “청명일에 왕부 산소에서 절을 올리니 만감이 든다(淸明 拜王父墓志感).”[『희암집(希菴集)』, 채팽윤(蔡彭胤), 1669∼1731].

다시 『묵재일기』의 한식 기사를 인용한다.

파루(罷漏) 후에 노원으로 출발하여, 선영 아래 도착하여 막(幕)에서 기다렸다가 올라가 묘제(墓祭)를 행하였다. 제(祭)를 필한 후 토지제(土地祭)를 행하였다(1537년 2월 17일 「한식일」).

한식은 묘제에 치중하는 전통적인 관행과 관련하여 조선시기 내내 보편적인 속절 풍속의 하나로 인식되어 왔다. 『가례』에서 ‘三月上旬之祭’라고 한 것은 ‘親未盡之位’, 즉 고조까지에 대한 묘제로서 한식 때 이를 행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에도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어서 그 양상과 원인에 대한 세밀하고도 심도있는 검토가 요구된다. 예컨대 한식과 이와 근접한 삼짇날과의 관계를 보면, 앞의 『묵재일기』와 같이 조선 중기까지는 중양절의 등고(登高)처럼 삼짇날은 답청 외에 간혹 간단히 주과를 놓고 지내는 제사가 있을 뿐 묘제를 행하는 한식에 비하면 속절로서 크게 중요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후기에 들어와 삼짇날과 중양일이 함께, 또는 둘 중의 하나가 원래 중월(仲月)에 복일(卜日)하여 행하는 시제의 한 축으로 설정되는 경향이 나타났는데, 이러한 경우 이 날과 근접해 있는 한식날의 묘제 행사는 자연히 등한시되거나 생략되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삼짇날이 속절에서도 빠지는 지역도 나타났으며 이 경우에 한식 묘제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또한, 피지배층에 있어서는 논농사의 확대와 함께 묘제가 추석에 집중되면서 상대적으로 추수철이 아닌 한식 행사의 비중과 중요성은 약화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사고전서(四庫全書)』 사부(史部) 중 시령류(時令類)의 서문들을 보면 시령(時令) 또는 월령(月令)에 관한 책들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즉, 이것은 선왕들의 정치가 갖는 근본이 천도(天道)에 따라 인사(人事)의 절(節)을 세우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율곡전서(栗谷全書)』 권5, 잡저2 중 「절서책(節序策)」에 임금과 율곡 선생이 절서에 관하여 나눈 다음과 같은 대화가 실려 있는데 이 역시 위와 유사한 내용들을 주고받았다.

임금이 묻기를 “절서(節序)는 천도(天道)와 인사(人事)에 있어서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삼황(三皇)·오제(五帝) 이전에는 어떤 달로 한 해의 첫 머리를 삼았으며, 그 때의 명절에 대해서도 또한 말할 만한 것이 있었는가.” 율곡 선생이 답하기를 “삼가 제 견해를 말씀드리자면, 한 원기(元氣)가 우주 간에 운행하여 끊이지 않고 계속되면서 양으로써 만물을 화생시키고 음으로써 만물을 성숙시키는 것은 천리(天理)요, 천명을 받아서 음양에 순응하며 우러러 천문(天文)을 보고 굽어보아 지리를 살펴서 조화에 묵묵히 합하는 것은 인도입니다. 그러므로 성인이 하늘의 도를 계승하여 인간의 표준을 세워, 사시의 차서를 정하고 한서(寒暑)의 절기를 나누었으니, 율력(律曆)의 서적과 명절의 호칭이 그래서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대저 봄은 만물을 화생시키는 공이 있으나 저절로 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성인이 있은 연후에 봄의 명칭이 있게 되고, 가을은 만물을 성숙시키는 공이 있으나 저절로 가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성인이 있은 연후에 가을의 명칭이 있게 되며, 절서는 스스로 그 절서가 됨을 알지 못하고 성인이 있은 연후에 절서의 명칭이 있게 되는 것이니 진실로 성인이 없다면 천기(天機)의 운행이 인사(人事)에 관여됨이 없을 것입니다.

이에 음양의 기후를 관찰하여 동작하고 휴식하며 일월의 운행을 율력으로 만들어 맞이하고 보내는 것이 모두가 자연의 도리로써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는 것이니, 성인의 제도란 이와 같은 데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런데 후세에 이르러 성왕(聖王)이 나오지 아니하고 사설(邪說)이 횡행하여 이른바 명절이라고 하는 것이 혹은 잘못된 풍속에서 나오고 그 유관(遊觀)하는 까닭이 혹은 인심의 사치에서 나오기도 하니 그것들이 어떻게 다 선왕의 가르침에 부합될 수 있겠습니까. 진실로 그 숭상하는 바가 의리에 합당하기만 하다면 비록 삼대의 제도가 아니더라도 오히려 괜찮겠지만 만약에 혹시라도 의리에 부합되지 않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단지 혹세무민(惑世誣 民)하는 자료에 지나지 않을 뿐인 것입니다. 어찌 족히 취택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농경 사회의 풍속은 대부분이 1년을 주기로 하는 농사력에 따른다. 그러므로 풍속, 특히 세시 풍속의 형성과 변화에는 이러한 농사력을 변화시키는 농업 생산력의 발전이 선행되기 마련이다. 세시 풍속은 음력의 월별(月別), 24절후(節候), 명절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고 이에 따른 의식, 의례 행사 및 놀이를 포괄한다. 따라서 세시 풍속은 직접 생산자인 민중들의 주기적이고 반복적인 삶의 반영일 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시간적 개념과 관념을 함축하고 있는 역법 체계의 표현인 것이다.

우리는 24절기라는 말에 익숙하다. 그러면서도 구체적으로 24절기를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우선 24개 절기에 어떤 것이 있는 지부터 알아본다.

계절 절기
봄(음력 1, 2, 3월) 입춘(立春) 우수(雨水) 경칩(驚蟄) 춘분(春分) 청명(淸明) 곡우(穀雨)
여름(음력 4, 5, 6월) 입하(立夏) 소만(小滿) 망종(芒種) 하지(夏至) 소서(小暑) 대서(大暑)
가을(음력 7, 8, 9월) 입추(立秋) 처서(處暑) 백로(白露) 추분(秋分) 한로(寒露) 상강(霜降)
겨울(음력 10, 11, 12월) 입동(立冬) 소설(小雪) 대설(大雪) 동지(冬至) 소한(小寒) 대한(大寒)

위와 같이 정리해보니 24절기는 사계절에 6개씩, 각 달에는 두 개씩 배당되어 있다. 절기 개념을 좀 더 정확히 쓰면 24절기의 절기란 원래는 절기와 중기의 합친 말로서 12절기와 12중기로 나뉜다. 그리고 12개의 절기는 월초에, 12개의 중기는 월중에 들어있다.

예컨대 입춘은 1월의 절기이고 우수는 1월의 중기이다. 여기서 기(氣)란 5일을 1후(候)라고 하였을 때 3후, 즉 15일을 말한다. 현행대로 태양력에 따르면 절기는 매월 4∼8일에 있게 되고, 중기는 매월 하순에 있게 된다. 그런데 위의 분류는 음력을 기준으로 배치한 것으로, 계절의 변화는 태양이 주도하기 때문에 정확히 맞지 않는다. 예컨대 입춘이 음력 12월말에 오는 경우가 그렇다. 그러므로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나누어 놓은 절기를 음력에 반영하기 위해서는 윤달(閏月)을 넣어 계절에 맞게 조정할 필요가 있는데, 그 방법은 음력 달에서 중기가 빠진 달이 생기면 그 달을 윤달로 하면 된다.

다음은 명절과 절기의 관계를 알아보자.

우리는 유두(流頭)나 한가위 추석과 같은 중국에 없는 고유 명절이 있다. 추석은 사명일(四名日)이라고 하여 대표적인 명절에 들어가는데 나머지는 설, 한식, 단오로 모두 24절기가 아니다. 한식 대신 음력 9월 9일 중양(重陽)이나 24절기의 하나인 동지를 치는 경우도 더러 있지만 이 4명절은 각각의 계절을 대표하며 이 때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낸다.

명절에는 도교의 영향을 받은 것들도 있다. 상원(上元)·중원(中元)·하원(下元)은 각각 1월과 7월과 10월의 보름을 말한다. 상원, 즉 정월 대보름에는 전국 어디를 가나 농민들의 축제를 볼 수 있다. 중원의 경우는 불교의 우란분재나 김매기를 끝낸 농민들의 백중놀이가 벌어지는 때이다. 상원에 등을 달고 한식 때 반선(伴仙), 즉 그네를 뛰는 중국과 달리 우리는 사월 초파일 때 등석(燈夕)을 하고 단오 때 그네를 뛴다. 이는 양국의 기후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데, 음력 4월 8일을 부처님 탄생일로 보는 우리식 해석도 작용한 것 같다. 3월 3일 삼짇날, 5월 5일 단오절, 그리고 구구절, 또는 중양절처럼 양수인 홀수가 겹치는 날을 명절로 삼는 것도 그 근본을 도교에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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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경제(山林經濟)』에는 입택(入宅)할 때 축일(丑日), 인일(寅日), 기방공완일(起房空完日)을 꺼리고 제식(祭式)은 향촉과 정화수 한 그릇과 버드나무 한가지와 푸른 채소 한 접시를 신전에 놓고 천지와 가신과 조왕신에게 절을 한 후 신 앞에 놓았던 정화수를 문기둥에 뿌린다고 하였다. 이것은 역서(曆書)에 실린 살(煞)을 피하는 일로 도교와 불교가 섞여있는 풍속이다.

때를 놓치지 않고 농사를 지으려면 태양의 움직임을 반영하는 24절기를 따라야 한다. 음력을 사용하던 전통 사회에서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는 정치가 갖는 근본이 천도(天道)에 따라 인사(人事)의 절(節)을 세우는 것이라는 국왕의 거창한 뜻에 따라 만들어졌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농민들에게 태양력을 반영하는 절기를 주지시키는 데 있었다. 예컨대 망종은 음력 5월의 절기로 양력으로는 6월 6일 경인데 곡식의 씨앗을 뿌리기에 적당한 때라는 뜻으로, 보리는 익어서 수확을 기다리고 볏모는 자라서 모내기를 해야 하므로 “발등에 오줌 싼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일년 중 가장 바쁜 때다. 하지는 남쪽 일부 지방을 제외하고는 모내기의 마지노선으로 삼아 이때를 전후한 모내기를 만앙(晩秧)이라고 하고 하지가 지나도 비가 오지 않아 모를 심지 못하면 일년 농사를 망치게 된다. 기우제를 지내는 것도 이때쯤이다.

명절과 절기가 혼합된 하선동력(夏扇冬曆)이란 말이 있는데 여기서 여름은 단오를, 겨울은 동지를 말한다. 선(扇), 즉 부채는 “겨울에도 쥐고 다닌다.”고 할 정도로 조선 풍속의 일각을 이루었으며 계층을 막론하고 그에 대한 기호(嗜好) 또한 대단하였던 것 같다. 당색으로 사분오열된 양반 사대부들이 모여 살던 조선 후기 서울에서는 적대적 관계의 사람들을 길에서 만날 것을 대비하여 얼굴가리개 용도로 부채를 들고 다녔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단오절에 전라도와 경상도 두 도의 감사와 통제사가 공조(工曹)를 통해 진상한 절선은 관례에 따라 임금이 조정의 대신들과 궁중의 시종들에게 선사하고, 이것은 다시 그들의 친척과 친우들에게 선사된다. 부채를 만드는 고을의 수령들도 역시 임금에게 진상하고 친우들에게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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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감 관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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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관상감(觀象監)에서 동지에 맞추어 임금에게 달력을 만들어 올렸다. 새 달력이 나오면 관리들은 이를 본으로 만든 달력을 서로 나누는 풍속이 있었다. 달력을 돌리는 일은 아전들이 주로 하였는데, 이들이 무슨 돈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새로 벼슬살이하는 집으로부터 받은 당참전(堂參錢), 즉 필요한 서류를 꾸며준 댓가로 받은 수고비로 달력을 구입해 그 집에 선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단오에는 관리가 아전에게 부채를, 동지에는 아전이 관리에게 달력을 준다는 말이 생겼다.

동지 팥죽 한 그릇에 나이 한 살 더 먹는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오랜 과거 부터 동지를 설로 여겼던 관습이 남아 전하기 때문이다. 동지를 아세(亞歲, 설날 버금간다는 뜻)라고 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낮의 길이가 가장 짧은 이날 이후부터는 그 동안 기승을 부리던 음의 세력이 약화되기 시작하고 반대로 양의 세력은 점점 커져 만물이 생동하는 시점이기 때문에 고대부터 이날을 한 해의 시작으로 여겼던 것이다.

동지가 음력으로 초순에 들면 애동지, 중순에 들면 중동지, 하순에 들면 노동지라고 한다. 동짓달이 되면 어느 가정에서나 팥죽을 쑤어 먹는다. 팥을 삶아 으깨거나 체에 걸러서 그 물에다 찹쌀로 단자를 새알만큼씩 만들어서 죽을 쑨다. 이 단자를 새알심, 옹시미, 옹실내미 등으로 부른다. 이 새알심은 나이 수만큼 아이들에게 먹인다. 그러나 애동지에는 아이에게 좋지 않다고 하여 팥죽을 쓰지 않고 대신 팥떡을 해서 먹는다. 아이에게 좋지 않은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사람마다, 또는 시대마다 조금씩 다를 것이나 대체로 아이의 건강과 운세를 염두에 둔 말이다.

동지는 팥죽을 쑤어 먹는다는 점에서 계층을 막론한 전국적인 세시 풍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잘 알려지지 않은 풍속으로 사일(蜡日)이라는 것이 있는데 납일과 같은 뜻으로 주로 백성들이 즐긴 풍속이었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은 “사일엔 백성들이 마음이 즐겁나니 온 나라가 미친다고 누가 말하였던고(『점필재집(佔畢齋集)』, 「二十四日臘」, “蜡日民心樂 誰言一國狂”).”이라고 하여 그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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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직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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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기』 「월령」에 “늦겨울에 천자가 친히 왕림하여 물고기를 맛보시는데 먼저 종묘에 천신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11월에 임금이 청어를 종묘에 천신하는 것 은 이를 따른 것이다. 재상집과 양반집에서도 마찬가지로 천신제를 행한다. 제주도에서는 귤·유자·감귤 등을 진상하고 임금은 이것으로 역시 종묘에 천신한 다음 궁중의 가까운 신하들에게 하사한다.

납일(臘日)은 원래 동지 후 3번째 오는 술일(戌日)이었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 동지 후 3번째 미일(未日)로 정하여 종묘와 사직에 큰 제사를 지낸다. 우리나라에서 납일을 미일로 한 것은 대개 동방이 목(木)에 속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세속의 관념에는 윤달에는 장가가고 시집가기에 좋다고 하고, 또 죽은 자에게 입히는 수의(壽衣)를 만들기에도 좋다고 하는데 이는 모든 일에 꺼리는 것이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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