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6권 한 해, 사계절에 담긴 우리 풍속
  • 2 세시 풍속과 사회·문화
  • 01. 세시와 국가 정책
  • 세시와 국가 정책
정승모

풍속은 ‘백리부동풍 십리부동속(百里不同風 十里不同俗)’이라는 말처럼 지역에 따라 다른 것이 특징이다. 인구 이동이 심한 산업 사회와는 달리 정착 생활을 하는 농경 사회에서는 문화의 지역적 전승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주민들은 이를 기반으로 지역 공동체를 형성하고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공유해 왔다. 백리, 혹은 십리만 떨어져도 풍속이 다르다는 위의 표현은 전통 사회의 이와 같은 사정을 반영한 것이다. 단지 조선 이전에는 지역 공동체의 형성이 미약하고 자료 또한 이를 반영하고 있지 않아 그 실체를 밝히기 힘들다.

고구려의 대표적인 왕실의 세시 행사는 동맹(東盟)으로 10월에 왕이 친히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또 『수서(隋書)』에 의하면 “해마다 연초에 패수(浿水)가에 모여 놀이를 하면 왕이 요여(腰轝)를 타고 우의(羽儀)를 펼치고 이를 구경한다. 그 다음에 왕이 옷을 입은 채로 물에 들어가(入水) 좌우로 두 패를 만들면 양쪽이 서로 물과 돌을 뿌리거 나 던지며 소리치며 쫓고 쫓기기를 두세 번 하다가 그친다.”(『수서』 권81, 열전46, 고구려)고 하였다. 이것은 석전(石戰)을 연상시키는 일종의 기풍 의례(祈豊儀禮)였던 것 같다.

그밖에 부여에서는 12월에 국중 대회로 영고(迎鼓)가, 동예에서는 10월에 제천 행사인 무천(舞天)이, 가야에서는 매년 7월 29일에 수로왕(首露王)에 대한 제사가 행해졌다.

백제는 마한의 제천 의식을 이어 시조묘 제사를 지냈고 한성에서 사비로 옮겨오면서부터는 시조묘 제사보다는 오방신 제사를 국가 의례로 발전시켰으며 중국 풍속을 수용하여 12월 인일(寅日)에 신성(新城) 북문에서 소를 제물로 팔자(八䄍), 즉 8신에 대한 납향(臘享) 제사를 지냈다.

신라는 시조신 박혁거세에 대한 제사를 시조묘(始祖廟)에서 사시(四時), 즉 각 계절마다 일년에 4번 지냈다. 또 왕이 새로 즉위한 후 처음 맞는 해 정월이나 2월에 시조묘 제사를 지냈다. 650년(진덕왕 4)에는 당나라 연호를 사용하고 그 다음 해인 651년 이후부터는 정월 초하루에 왕이 백관의 신정 하례를 받는 하정례(賀正禮) 의식을 행하였다. 또 중국의 종묘제를 받아들여 13대 미추왕(味鄒王)을 김성(金姓)의 시조로 하는 5묘(五廟)를 세우고 그곳에서 정월 2일과 5일, 5월 5일, 7월 상순, 8월 1일과 5일 등 6번의 제사를 지냈다.

또한, 신라에서는 소지왕의 사금갑(射琴匣) 신화와 관련하여 정월 상해(上亥)·상자(上子)·상오(上午) 등의 날에 온갖 일을 삼가하였고 16일을 오기지일(烏忌之日)로 삼아 찰밥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5월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기 이전인 데도 8월의 가배 행사처럼 이미 단오 행사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의 세시 행사는 왕실을 중심으로 정월의 태조 제사나 도소주(屠蘇酒)를 마시는 풍속, 1월 7일의 인일(人日) 행사, 2월의 중화절(中和節) 행사, 3월의 상사절(上巳節), 4월 종묘 제사인 체제(禘祭), 5월 단 오의 연회와 석전(石戰), 7월 칠석 행사, 8월 추석의 조상 제사와 달구경, 9월 중구절(重九節)의 선대왕 추모와 국화 구경, 10월의 협제(祫祭)와 재제(齋祭), 동지 때의 팥죽 절식 등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정월이나 2월의 연등회, 4월의 초파일 행사, 7월 백중의 우란분재, 10월 또는 11월의 팔관회 등 불교 관련 행사가 많아 이들은 4장 종교 편에서 집중적으로 소개하기로 한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유교적 이념에 기초한 국가 체제의 확립과 지방 통치를 위해 국가 단위의 의례와 지방 단위의 의례를 설정하고 이를 실행하였다. 지역마다 의례가 형식상으로 일치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이전 시대에 각 지역마다 행한 고유한 의례는 물론이고, 위와 같이 지방 통치의 수단으로 국가에서 그 시행을 명한 각종 의례들도 시대가 내려올수록 그 형식이 변하고 지역적 특색이 가해져 결국은 지역마다 차이를 나타내게 된다.

성황제, 여제, 기우제 등 유교적 국가 질서 속에서 행해지던 군·현 단위의 의례들은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서 형식만 유지되는 등 쇠퇴의 길을 걷다가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이를 뒷받침하던 제도가 소멸하고 이를 담당해 온 향리층이 기존의 향촌 조직에서 빠져나감으로써 자연히 중단되었다. 군·현 단위의 의례가 사라진 반면 마을 공동체를 단위로 하는 동제는 1930년대까지는 크게 위축되지 않은 상태에서 지속되었다. 또한, 향리층이 주도해 온 성황제와 같은 읍치 의례 중에는 마을 단위로 축소되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사례도 보인다.

이미 언급한 대로 농경 사회의 풍속은 대부분이 1년을 주기로 하는 농사력에 따른다. 풍속의 형성과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농사력과 이를 변화시키는 농업 생산력의 발전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이에 더하여 군·현을 단위로 하여 각 지역마다 겪게 되는 조선초·중기의 지배 세력의 동향과 교체의 추이도 풍속의 지 역적 특색을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가 되어왔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국가 차원의 사전 의례는 크게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로 분류된다. 이미 신라시대에 이와 같은 분류로 삼산(三山)과 오악(五嶽)과 명산대천(名山大川)에 제사를 지냈다. 조선 건국 직후에 대사로 지정한 의례는 사직(社稷)과 종묘(宗廟)에서의 의례이다. 고려 때의 대사였던 원(환)구(圜丘), 방택(方澤) 등 천제(天祭)와 관련된 것들은 국왕이 중국의 천자와 맺는 관계의 성격에 따라 부침(浮沈)하였는데, 중국의 정권 교체기이기도 한 조선 건국기, 그리고 명나라가 망한 17세기 초 이후에는 특히 천제의 시행을 통해 조선국의 자주성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대사(大祀)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① 사직

사직의 사(社)는 토신(土神), 직(稷)은 곡신(穀神)을 뜻한다. 중국의 천자나 제후들이 건국을 하면 먼저 사직단(社稷壇)을 세웠다. 우리나라는 783년(선덕왕 4), 991년(성종 10), 그리고 1394년(태조 3)에 각각 사직단을 세웠다.

국가 사직의 위치는 도성 안 서부(西部) 인달방(仁達坊)이다. 국사(國社)는 동쪽에 있고 국직(國稷)은 서쪽에 있다. 두 단 모두 신좌(神座)가 북향하고 있다. 매년 중춘과 중추, 즉 2월과 8월의 상무일(上戊日, 그 달에 처음 맞는 戊日)과 납일(臘日, 동지 후 세 번째 未日)에 대향(大享)을 지내고 맹춘(孟春), 즉 정월 상신일(上辛日)에 기곡제(祈穀祭)를 지낸다. 축문(祝文)에는 조선 국왕의 성(姓)과 휘(諱, 이름)를 적으며, 아악(雅樂)을 사용하였다. 문선왕(文宣王), 즉 공자를 위한 석전제(釋奠祭) 때도 제사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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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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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종묘

종묘(宗廟)는 1394년(태조 3)에 한양의 동부 연화방(蓮花坊)에 세웠다. 사계절 중 첫 달 상순과 납일에 큰 향사가 있고 초하루, 보름 및 시속명절, 즉 정조(正朝)·한식(寒食)·단오(端午)·추석(秋夕)·동지(冬至)에 작은 제사가 있었다.

③ 천제(天祭) 관련 대사(大祀)

원단(圓壇)은 한강 서동(西洞)에 있었다. 국초에는 천제를 지내는 장소였으며 세종 때 폐지하였지만 그것도 잠시이고 곧 복설(復設)하였다. 세조 때 친행(親幸)하여 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순조 이후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에는 단묘대보단(壇廟大報壇)이 대사로 추가되어 있다. 이것은 창경궁 북쪽 담밖에 위치한다. 1704년(숙종 30)에 명나라 신종(神宗)에 대한 향사를 위해 건립한 것으로 매년 3월에 제를 지낸다. 1749년(영조 25)에 증축하여 명나라 태조(太祖)와 의종(毅宗)을 추가로 제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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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보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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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사(中祀)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① 풍운뇌우산천성황단(風雲雷雨山川城隍壇)

지금 남단(南壇)이라 칭하는 것으로 청파역(靑坡驛)에 위치한다. 풍운뇌우신이 가운데에, 산천신이 왼쪽에, 성황신이 오른쪽에 남향하고 있다. 매년 2월과 8월의 상순에 길일을 택하여 제사를 지낸다.

② 악해독단(嶽海瀆壇)

3칸의 묘(廟)가 남쪽 교외에 있었으며 남단의 제도와 같다. 악(嶽)은 남쪽은 지리산, 중앙은 삼각산, 서쪽은 송악산, 북쪽은 비백산(鼻白山)과 백두산이다. 해(海)는 동해·남해·서해다. 독(瀆)은 남쪽은 웅진과 가야진, 중앙은 한강, 서쪽은 덕진·평양강·압록강, 북쪽은 두만강이다. 제사일은 성황단과 같다.

③ 선농단(先農壇)

동교(東郊), 즉 서울 동쪽 교외의 보제원(普濟院) 동동(東洞)에 위치한 다. 남단의 제도와 동일하다. 신농씨와 후직씨를 모시는데 신농씨는 북쪽에 남향하였고, 후직씨는 동쪽에 서향하였다. 매년 경칩 후 길한 해일(亥日)을 골라 제사한다. 1476년(성종 7) 정월에 임금이 친히 임하여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고, 1704년(숙종 30)에도 임금이 친히 기우제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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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농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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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선잠단(先蠶壇)

동교의 혜화문 밖에 위치한다. 남단의 제도와 동일하다. 서릉씨(西陵氏)를 모시는데, 북쪽에서 남향을 하고 있으며 3월 중 길한 사일(巳日)을 택하여 제사한다.

⑤ 우사단(雩祀壇)

동교에 위치한다. 남단의 제도와 동일하다. 흉망씨(匈芒氏), 축융씨(祝瀜氏), 후토씨(后土氏), 욕수씨(蓐收氏, 형벌을 맡은 가을의 신), 현명씨(玄冥氏), 후직씨(后稷氏)를 모신다. 신의 위치는 모두 북쪽에서 남향을 하고 있으며 서쪽을 높은 곳으로 친다. 매년 정월 상순 중 택일하여 제사한다. 1739년(영조 15)에 임금이 기우제를 친히 열었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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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잠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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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잠제를 재현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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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밖에 문선왕(文宣王), 조선 단군(朝鮮檀君), 후조선 시조(後朝鮮始祖) 기자(箕子), 고려 시조(高麗始祖)가 각각 중사의 대상이었다. 문선왕인 공자를 제향하는 곳을 문묘(文廟)라고 하는데 서울에서는 성균관 남쪽 대성전에 위치한다. 이곳에서는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알성례(謁聖禮)를 지내고 봄, 즉 2월 초정일[初丁日, 각 달에 10(干) 중 처음 丁자가 드는 날]과 가을, 즉 8월 초정일(初丁日)에 석전례를 행한다. 각 지방 향교의 대성전에서도 석전례를 지냈는데 그 목적은 공자를 비롯한 유교 성현들에 대한 제사를 통하여 지방민에게 그 이념을 확산시키고 교화시키는데 있었다.

기자를 모시는 기자사(箕子祠)는 고려 이래로 평양성 안에 있었다. 즉, 1105년(숙종 10)에 왕이 서경에 행행(行幸)하였을 때 정당문학(政堂文學) 정문(鄭文)이 사우(祠宇) 세우기를 건의하여 중사로 제사를 지내왔고, 1430년(세종 12)에 비(碑)를 세웠다.

소사(小祀)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① 영성단(靈星壇)

남교(南郊), 즉 서울 남쪽 교외에 위치한다. 북쪽에서 남향하고 있으며 매년 입추 후 진일(辰日)에 제사를 지낸다.

② 명산대천단(名山大川壇)

형식은 영성단과 같으나 실제 단은 없고 3칸의 묘(廟)가 있다. 북쪽에서 남향하고 있다. 명산은 동쪽에 치악산, 남쪽에 계룡산, 죽령산, 우불산(亏佛山), 주흘산(主屹山), 금성산(錦城山), 중앙에 목멱산, 서쪽에 오관산(五冠山), 우이산(牛耳山), 북쪽에 감악산(紺岳山), 의관산(義舘山) 등이고, 대천은 남쪽에 양진명소(楊津溟所), 중앙에 양진(楊津), 서쪽에 장산곶(長山串), 하사진(河斯津), 송곶(松串), 청천강(淸川江), 구진(九津), 익수(溺水), 북쪽에 덕진명소(德津溟所), 불류수(沸流水) 등이다. 매년 2월과 8월에 날을 택하여 제사지낸다.

③ 사한단(司寒壇)

사한단은 남교의 동빙고 빙실(氷室) 북쪽에 있으며 현명씨(玄蓂氏)를 향사한다. 형식은 영성단과 같다. 매년 춘분 때 개빙(開氷)하고 12월 상순에 택일하여 장빙(藏氷)하고 제사한다.

④ 포단(酺壇)

형식은 마보단과 같으며 포신을 향사한다. 명황(螟蝗), 즉 해충들이 있으면 제사한다.

⑤ 여단(厲壇)

북부 창의문(彰義門) 밖 장의사동(藏義寺洞)에 있다. 형식은 영성단과 같다. 1452년(문종 2)에 설치하였다. 성황신은 단 북쪽에 남향하고 제사를 받지 못하는 귀신 15위는 단 아래에 좌우로 서로 마주보게 설치하였다. 매년 청명, 7월 15일, 10월 초하루에 제사를 지낸다.

⑥ 노인성단(老人星壇)

남교에 위치한다. 북쪽에 남향하고 있으며 매년 추분일(秋分日)에 제사를 지낸다.

⑦ 마조단(馬祖壇)

남교에 위치한다. 북쪽에 남향하고 있으며 매년 2월의 중기(中氣), 즉 춘분이 지난 후 바로 오는 강일(剛日)에 말의 조상인 천사(天駟)에게 제사를 지낸다.

⑧ 선목단(先牧壇)

처음 말을 기른 자를 향사하는 단이다. 1749년(영조 25)에 우역(牛疫)이 돌아 단을 쌓고 위판을 만들어 제사하였다. 매년 5월 중기, 즉 하지 후에 오는 강일에 제사를 지낸다.

⑨ 마사단(馬社壇)

처음 말을 탄 자를 향사하는 단이다. 매년 8월 중기, 즉 추분 후 강일에 제사를 지낸다.

⑩ 마보단(馬步壇)

해마신(害馬神)에게 향사하는 단이다. 매년 11월 중기, 즉 동지 후 강일에 제사를 지낸다.

이상 4개의 단은 모두 동교의 살곶이 목장 안에 있다.

⑪ 마제단(禡祭壇)

동북쪽 교외에 있다. 치우신(蚩尤神)을 향사한다. 강무(講武) 하루 전에 제사지낸다. 그런데 영성단 이하 소사는 모두 폐지되었다. 단지 마조단은 1796년(정조 20)에 복설되었다.

다음은 마조단의 경우와 같이 추가·보완된 국가의 세시 의례들을 모았다. 조선 초기에 설치된 유교적 의례들은 거의가 그대로 조선 말기까지 유지되었으며 도중에 추가·보완된 것들이 있다.

계성사(啓星祠)는 문묘 서북쪽에 위치한다. 1699년(숙종 25)에 건립하였다. 공자를 주향으로 하고 안씨(顔氏), 공씨(孔氏), 증씨(曾氏), 맹씨(孟氏)를 배향한다. 매번 석전일 자시(子時)에 작은 짐승을 희생물로 선제 (先祭)한다.

숭절사(崇節祠)는 문묘 동쪽에 위치한다. 1683년(숙종 9)에 건립하였다. 진(晉)의 동양(董養), 당(唐)의 하번(何蕃), 송(宋)의 진동(陳東)과 구양철(歐陽徹)을 제사한다.

반면 천제와 관련된 도교 의례는 조선 초에 잠시 시행되었을 뿐 곧바로 국가 중심의 의식으로서의 위치를 상실하였으며, 정치적·사회적 중요성도 잃었다. 특히,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재초의식(齋醮儀式)은 유교적 이념과 이에 따른 정치적 질서에 맞지 않아 이른 시기에 유신들에 의해 거부되었다.

고려시대 이래 도교 신에 대한 초제(醮祭)를 관장하던 소격전(昭格殿)은 1466년(세조 12)에 그 규모를 축소하여 소격서(昭格署)로 개칭되었고, 1518년(중종 13)에 삼사(三司)에서 이를 파하도록 청하고 부제학 조광조가 상소로서 간하여 잠시 혁파되었다가 곧 복구되었는데, 결국 임진왜란 후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성신초제(星辰醮祭)를 지냈던 강화의 마니산단(摩尼山壇, 摩利山壇)은 1639년(인조 17)에 단을 수리하였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임란 이후에도 폐지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경상도 선산 서쪽 5리에 있는 죽장사(竹杖寺) 옆에 제성단(祭星壇)이 있다. 고려 때 남극노인성(南極老人星)이 이곳에 나타났다고 하여 매년 춘추로 중기일(中氣日)을 정하여 분향하고 제사를 지냈으나 조선에 들어와서 그 제사는 폐지되고 석단(石壇)만 남았다. 제성단은 함흥의 남쪽 40리 도련포(都連浦) 위에도 있다. 태조가 등극한 후 태백성(太白星)에게 제사지내기 위해 창설하여 매년 단오 때 어의(御衣)와 안마(鞍馬)를 보내 제사지냈다.

충청도 문의현의 구룡산(九龍山) 마루에는 노인성전(老人星殿) 터가 있다. 노인성제는 수명장수를 기원하기 위하여 노인성에게 드리는 도교적 제례다. 노인성이란 남극성, 수성(壽星), 수노인(壽老人), 남극노 인 등으로 불리는 별로 도교에서 남두(南斗)라고 부르는 별이다. 고려 때는 도교식 초제(醮祭)로 제사를 지내다가 조선에 들어와서는 성신(星辰)에 대한 제사의 하나로 지내 그 성격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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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원)구단과 황궁우
환(원)구단과 황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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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공식적인 국가 행사로서의 도교 의식은 조선 중기 이후에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다가 대한제국기인 1897년에 환(원)구단(圜丘壇)이 건립되고 5성(五星)과 28수(二十八宿)를 종향(從享)하였으며 그 대신 성단(星壇)은 폐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도교의 한 변형이라고 할 수 있는 삼제군(三帝君)에 대한 신앙이 유행하였다. 삼제란 관성(關聖, 蜀漢의 關羽)제군, 문창(文昌)제군, 부우(孚佑)제군의 삼성(三聖)을 말한다. 이 3사람은 신선이 되어 천궁(天宮)으로 올라가 제군의 자리에 앉아서 하계 인간의 선악을 감시하여 화복을 내리는 존재로 받아들여졌으며, 그중 관우를 지상지존으로 섬겨 ‘삼계복마대성관성제군(三界伏魔大聖關聖帝君)’으로 불렀다. 이러한 삼제 신앙은 곧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1711년(숙종 37)에 각 도에 어명을 내려 관왕묘의 제식(祭式)을 선무사(宣武祠)의 예에 따라 정하게 하고 매년 경칩과 상강(霜降)에 향축을 보내어 본도에서 제를 지내게 하였다. 선무사는 도성문 태평관 서쪽에 있던 것으로 명나라 병부상서 양호(楊鎬)를 3월과 9월 중정일(中丁日)에 제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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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묘(동관왕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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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왕묘에서는 관우의 생일인 5월 13일에 대제(大祭)를 연다. 국제(國制)에는 매년 봄 경칩일과 가을 상강일에 제를 행한다고 하였는데 무관 장신(將臣)으로 제관을 삼았다. 도시의 남녀들도 이곳에 와서 기도하여 향화(香火)가 일년 내내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또 시전의 상인들은 관성제(關聖帝)를 신봉하여 재물을 관장하는 신으로 삼고 그 소상(塑像)을 종로 보신각 옆에 모셨다. 시월상달에는 상가에서 남묘(南廟)에 고사하여 재운을 빌었다.

1883년(고종 20)에는 어명을 내려 관왕묘를 송동(宋洞)에 세우고 제반 절차는 동과 남에 있는 관왕묘의 예에 따르게 하였는데 이것이 곧 북묘(北廟)이다. 이후 전주에도 관왕묘가 세워졌다는 사실은 『조선왕조실록』 고종 36년 기사로도 알 수 있다.

섣달 그믐 하루 이틀 전부터는 우금(牛禁, 고기를 먹을 목적으로 소를 잡는 것을 금하던 제도)을 완화한다. 형조와 한성부 등 이를 담당하는 관서에서는 단속 관리가 차고 다니는 우금패(牛禁牌)를 회수하여 두었다가 설날이 되면 내준다. 이는 서울 사람들에게 이 때 한 번 설 고기(歲肉)를 실컷 먹는 기회를 준다는 뜻으로 시행하는 것이지만 간혹 그렇게 하지 않을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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