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6권 한 해, 사계절에 담긴 우리 풍속
  • 2 세시 풍속과 사회·문화
  • 02. 세시 풍속의 계급적 성격
  • 양반의 세시 문화
정승모

고려시대에도 지배층들이 절기와 관련하여 제사를 지낸 기사들이 보인다. 예를 들면 1015년(현종 6)에 정월 초하루와 5월 단오에 돌아가신 조부모와 부모에 대한 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고, 1048년(문종 2)에는 대소 관리들이 사중월(四仲月)에 지내는 시제(時祭)에 이틀 간의 휴가를 주기로 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고려사』에 고려의 속절로 원정(元正)·상원(上元)·한식(寒食)·상사(上巳)·단오(端午)·팔관회(八關會)·추석(秋夕)·중구(重九)·동지(冬至) 등을 들고 있는데,1) 『高麗史』 卷84, 志38, 刑法 禁刑條. 당시는 제례, 특히 묘제가 보편화되지 않은 상황이어서 전통적인 유두절과 정조 및 단오절 외에 제례와 관련된 다른 속절이 더 있었는지는 명확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참고로 고려 관리들의 휴가일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2) 『高麗史』 卷84, 志38, 刑法 官吏給暇條.

○ 매월 초하루, 8일, 15일, 23일.

○ 매월 입절일(入節日) 각 하루.

○ 원일(元正) 전후 7일간, 잠가(蠶暇, 子午日) 하루, 인일(人日) 하루, 상원(上元) 하루, 연등(燃燈) 하루, 춘사(春社) 하루, 춘분(春分) 하루, 제왕사회(諸王社會, 3월 3일) 하루, 한식(寒食) 사흘, 입하(立夏) 사흘, 칠석(七夕) 하루, 입추(立秋) 하루, 중원(中元) 전후 사흘, 추석(秋夕) 하루, 삼복(三伏) 각 하루, 추사(秋社, 社稷祭日) 하루, 추분(秋分) 하루, 수의(授衣, 9월 1일) 하루, 중양(重陽) 하루, 동지(冬至) 하루, 하원(下元) 하루, 팔관(八關, 11월 15일) 전후 사흘, 납향(臘享) 전후 사흘, 일식 하루, 월식 하루, 단오(端午) 하루, 하지(夏至) 전후 사흘.

연등회와 팔관회는 알려진 대로 고려적인 세시 명절이다. 이에 대해 휴옹(休翁) 심광세(沈光世, 1577∼1624)는 『휴옹집(休翁集)』 「해동악부」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고려 태조 훈요십조 제6조에 ‘짐이 지극히 원하는 것은 연등과 팔관이다. 연등은 부처를 섬기는 것이고 팔관은 천령과 오악과 명산대천과 용신을 섬기는 것이다. 후세에 간신들이 가감을 하려 하더라도 절대 막아야 한다. 군과 신이 같이 즐기면서 경거히 행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고려 태조 원년 11월에 유사가 ‘매년 11월이면 팔관회를 크게 열어 복을 빌었는데 이를 따르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여 태조가 이를 따랐다. 드디어 격구하는 마당에 윤등 자리를 설치하고 사방에 향로를 두고 높이 5장이 넘는 채붕을 엮어 백희와 가무를 임금에게 보였다. 그 중 사선 악부나 용봉·상마·차선 등은 모두가 신라 고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백관은 홀기를 들고 예를 행하니 도시가 구경꾼으로 미어질 정도였다. 해마다 이를 행한 것이 고려가 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고려 말기 기사 중에 속절이 되어 산소를 오르는 것은 옛 습속을 따른 것이라고 하여 속절에 묘를 찾는 습속이 이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390년(공양왕 2)에 대부(大夫) 이상 관리들은 3대를 제 지내고 6품관 이상은 2대를, 7품관 이하 평민들은 부모만 제를 지내게 하였는데, 사중월에 지내는 정제를 제외한 정조, 단오, 추석에는 그 때에 나오는 음식을 올리고 술을 드리며 축문은 없다고 하여 기존의 정조와 단오에 추석을 추가하여 이 3절일을 제사와 관련한 당시의 속절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조선에 들어오면 사대부가에서는 기제사의 범위를 확대하는 등 주자의 『가례(家禮)』 내용을 따르게 되지만, 그것도 중기 이후에나 보편화한 현상으로서 시행되기까지 상당한 기간이 걸린 데다 수용 방식도 제각기 달랐다. 특히, 속절 및 그에 따른 가례 행사에 대해서는 주자가 제시한 중국의 것과는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었으리라는 점은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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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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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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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 『가례(家禮)』에 따르면 속절은 청명, 한식, 중오(重午, 단오), 중원(中元), 중양(重陽) 등의 부류이고 묘제는 3월 상순에 택일한다고 하였다. 『국조오례의』에서는 한식·단오·중추를 속절로 정의하였고 왕실의 묘제는 이때와 사시(四時)와 납일(臘日)·정조(正朝)·동지(冬至) 모두 지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문건(李文楗, 1495∼1567)의 『묵재일기』를 보면 그는 상원과 초파일을 속절로 여겨 시식(時食), 즉 시절 음식으로 신주 앞에서 천신(薦新)하였다. “아침에 본가로 가서 약반(藥飯)과 청작(淸酌)으로 신주 앞에서 천(薦)하였다(1536년 1월 15일).”와 “속절이기 때문에 영좌(靈座)에 천신할 용도로 서울 집에서 개오동 나무잎 차(茶)와 떡, 밀가루, 과일 등을 보내왔다(1536년 4월 8일).”가 그것이다.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은 『봉선잡의(奉先雜儀)』에서 정조, 한식, 단오, 중추, 중양 등을 속절로 여겨 아침 일찍 사당에 나아가 천식(薦食)하고 이어 묘 앞에 나아가 전배(奠拜)한다고 하였다. 이이(李珥, 1536∼1584)는 『격몽요결(擊蒙要訣)』 제례장(祭禮章)에서 속절을 정월 15일, 3월 3일, 5월 5일, 6월 15일, 7월 7일, 8월 15일, 9월 9일 및 납일로 보고, 이와는 별도로 4명일(정조, 한식, 단오, 추석)에 묘제를 행한다고 하였다.

위의 4명일에 각각 묘제를 행하는가의 여부는 예서(禮書)마다, 또는 지역마다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이의 설정 자체는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크게 변하지 않아 사시제(四時祭)를 대신한 ‘친미진지위(親未盡之位)’, 즉 고조부 이하에 대한 우리 고유의 절사(節祀) 체계로 굳어져 간 것으로 보인다.

류운룡(柳雲龍, 1539∼1601)의 『겸암집(謙菴集)』,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의 『선원유고속고(仙源遺稿續稿)』, 강석기(姜碩期, 1580∼1643)의 『월당집(月塘集)』, 이식(李植, 1584∼1647)의 『택당집(澤堂集)』, 이재(李縡, 1680∼1746)의 『사례편람(四禮便覽)』 등 이후 출간된 문헌에서도 정조, 한식, 단오, 추석을 4명일, 또는 4절일이라고 하여 사당 묘제(廟祭)를 지내는 시제(時祭)와 구별하여 묘제(墓祭)를 지내는 날로 정하고 있다. 그러나 속절에 대해서는 제각기 다르고 또 강석기 외에는 이를 사명일과 구별하여 설정하고 있다. 특히, 김상용은 사명일의 묘제는 어(魚)와 육(肉)을 쓰지 않을 뿐 기제사와 형식을 같이 한다고 하였다.

고상안(高尙顔, 1553∼1623)은 “속절에는 당연히 시절 음식을 올려야 하나 요즈음 세상에는 때마다 중시하는 것이 달라 정조, 한식, 단오, 추석은 중하게 여기고 상원, 답청, 칠석, 중원, 중양, 납일 등은 가볍게 넘어간다”고 하였으나, 묘제에 대해서는 한식(寒食) 때만 언급하고 있다. 또한, 정조와 한식을 단오와 추석보다 비중을 더 두어 작헌(酌獻)은 정조와 한식 때만 삼헌(三獻)을 하고, 나머지는 1잔만 올 린다고 하였다.3) 『泰村集』 卷3, 遺訓條, “俗節 則當獻以時食 而今世所尙 亦有輕重之異. 如 正朝·寒食·端午·秋夕 俗尙之歸重者也. 如 上元·踏靑·七夕·中元·重陽·臘日·冬至 俗節之輕者也.”

정조: 만두(饅頭)와 탕병(湯餠, 떡국)을 쓰고 제물은 시사(時祀)보다 낮게 써도 좋다.

한식: 묘제를 지낸다. 제물은 시사 때와 동일하게 쓴다.

단오: 각여(角黍)로 떡을 대신하고, 어육(魚肉)은 적(炙) 1미와 탕 2미를 올린다.

추석: 면병(糆餠, 밀가루떡)을 쓰고, 나머지는 단오 때와 같다.

상원: 약반(藥飯)을 올리고, 침채(沈菜, 김치) 및 어육 각 1미를 올린다.

답청: 전화병(煎花餠)을 올리고, 침채 및 어육 각 1미를 올린다.

칠석: 연병(軟餠)을 올리고, 어육 각 1미를 올린다.

중원: 신도미(新稻米)를 올리고(구하지 못하면 상화병(霜花餠)으로 대신), 어육 각 1미를 올린다.

중양: 조고(棗糕, 대추떡)을 올리고(없으면 밤과 감으로 대신), 어육 각 1미를 올린다.

동지: 두죽(豆粥, 팥죽)이나 면병 중 하나를 올리고, 어육 각 1미를 올린다.

납일: 면병을 놓고, 어육 각 1미를 올린다.

이와 관련하여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인 강석기는 묘제에 대해서 “지금 영남인들은 단지 한식 때와 10월에만 (묘제를) 지내는데 우리나라에서 사절(四節)에 행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고 하여, 사명일에 대한 인식의 공유에도 불구하고 특히 묘제와 관련해서는 이미 이 시기에 지역적인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속절에 대한 규정은 각자의 출신 배경이나 학문 배경에 따라 첨삭을 가하면서 형성된 것이나 여기에는 농업 생산 조건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1819년에 작성된 『열양세시기』에 의하면 사명일로 단오대신 동지를 넣고 있는 바, 밭농사를 주로 해오던 조선 중기까지와는 달리 논농사의 비중이 커진 조선 후기의 중부 이남 지역에서는 절일로서의 단오와 유두의 비중은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조선 전기 사대부들의 정조, 즉 설 풍속 중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 많은데 민간에까지 내려간 것들은 별로 없고 또 후기까지 전해지지 않은 채 사라진 것들도 많다.

조선 전기 기록 중에는 납일, 제석(除夕)의 풍속으로 ‘수세(守歲)’를 하면서 1년의 사기(邪氣)와 장수를 기원하는 세주(歲酒)로서 초백주(椒柏酒)를 마시거나 원일 새벽에 도소주(屠蘇酒)를 마신다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재액을 막기 위해서 벽사력(辟邪力), 즉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힘을 가지고 있는 ‘도부(桃符)’를 걸어 놓는다. 정동유의 『주영편』을 보면 섣달그믐에 도소주를 마시는데 도(屠)는 절귀기(絶鬼氣), 즉 귀신의 기운을 막는다는 뜻이 있고 소(蘇)는 성인혼(醒人魂), 즉 사람의 혼을 깨운다는 뜻이 있다고 하였다. 도부는 귀신을 쫓기 위해 문짝에 붙이는 복숭아나무로 만든 부적 조각으로 중국에서 설날 널리 행해지던 풍속이다. 제석에 복조리를 사고파는 것도 이와 유사한 풍속이다.

도부는 입춘을 맞아 붙이기도 한다. 입춘에는 또한 5가지 향이 들어있는 오신채(五辛菜)를 먹거나, 초백주를 마신다. 김안로(金安老, 1481∼1537)는 입춘과 원일의 화승(花勝)과 은번(銀幡) 등의 유래를 논하고, 제석일 수세의 연원을 경신수세(庚申守歲)에서 찾아서 전거를 밝힐 정도로 도가의 사상에 밝았다. 그는 수세를 하는 근거로 도가에서 말하는 미충(微蟲), 구체적으로는 매시충(罵尸蟲)을 거론하였다. 그리고 수세를 할 때 윷놀이를 하는 풍속을 살핌에 있어서 중국의 풍수가로 유명한 도간(陶侃)의 행적을 전거로 삼았다.4) 『希樂堂稿』 참조.

신흠(申欽, 1566∼1628)은 입춘날 백엽주를 마시고 도부를 붙이는 사대부들의 세시 행사에 대해 “백엽도부(栢葉桃符)의 세사는 새로운 데 저무는 해의 가절은 거듭 뒷걸음질 치네. 오늘 아침 억지로 ‘의춘(宜春)’ 두 자를 써서 첩을 만드니 화조는 사람을 저버리지 않는구나.”라고 하였다.5) 『象村稿』, “立春 栢葉桃符歲事新 暮年佳節重逡巡 今朝强帖宜春字 花鳥元來不負人.” 이경석(李景奭, 1595∼1671) 역시 궁궐의 춘체(春帖)를 “잣술로 새해를 맞이하고 도부로 한 겨울을 보낸다.”라고 쓴 바 있다.6) 『白軒集』, “栢酒迎新歲 桃符送一冬.”

그러나 이들의 도가적 성향은 조선 후기에 들어와 유행하였던 중국의 민간 도교 신앙과는 맥락을 달리한다. 중국에서는 송나라 이래 삼제군을 신봉하여 재상(災祥)과 화복(禍福)을 이 신들에게 기원하였는데, 그중 관우를 가장 높이 신봉하는 선음즐교(善陰騭敎)가 생겨났다. ‘음즐’이란 하늘이 은밀히 인간의 행위를 보고 화복을 내린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와 관련된 신앙으로 60일에 한번씩 오는 ‘수경신(守庚申)’ 또는 ‘경신수야(庚申守夜)’가 있는데, 이것은 인체 안에 있는 삼시충(三尸蟲)이 몸을 빠져나가 천제에게 악행을 고한다는 경신일에 밤을 지새는 풍습이다. 이능화(李能和, 1869∼1943)에 따르면 궁중에서도 또한 이 행사가 수백 년 내려오다가 영조 때에 와서 폐지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습속은 삼시충과 조왕신에 관한 신앙으로 민간에 널리 퍼졌다.

유희(柳僖, 1773∼1837)는 『물명고(物名考)』에서 “사람의 뇌속에 들어있는 삼시충은 언제나 매달 보름과 그믐에 상제에게 사람의 과실을 아뢴다. 삼시는 욕심 많은 사람의 뇌수를 다 먹어버리지만 청정하게 도를 닦으면 시충(尸蟲)이 소멸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60일에 한번 씩 하는 ‘경신수야’와 혼동되어 있지만 도교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되며, 매달 그믐밤에 하늘에 올라가 사람들의 죄상을 아뢴다는 조왕신, 즉 부뚜막신에 대한 신앙과도 연결되어 있다. 조왕신에 대한 제사는 집집마다 교년(交年), 즉 음력 12월 24일에 지냈던 것 같다.

삼짇날의 답청이나 계음(禊飮) 역시 사대부에 국한된 세시 풍속이다.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은 향촌 계원들과 답청을 하고 계음하 기로 약속하였는데 비로 연기되어 다음날로 모임을 정하였는데 그날이 마침 상사일(上巳日)이었다. 상사일은 삼짇날과 혹 겹치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삼짇날만 지키게 되었는데 조선에서도 후기로 내려오면 상사일이 삼짇날에 밀려 세시 행사로 잊기도 하고 삼짇날과 동일시하든지 아니면 정월의 뱀날과 혼동하게 되었다. 그는 이를 예견이나 한 듯이 “상사(上巳)가 명진(名辰)임은 옛날부터 전해오나니 삼짇날에 다투어 답청연을 벌이는구나.”라고 하였다.7) 『慕齋集』, “上巳名辰自古傳 三三爭辦踏靑筳.” 불계(祓禊)나 계음 행사도 조선 후기에는 주로 유두와 연관시켜 설명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은 이것도 삼짇날 답청과 관련해서 행해졌던 풍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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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형(李石亨, 1415∼1477)은 단오의 풍속으로 귀신을 쫓기 위해 쑥으로 만든 ‘애인(艾人)’, ‘애호(艾虎)’, ‘애옹(艾翁)’ 등을 걸어놓았다고 하였고,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창주(菖酒, 菖蒲酒)를 마시거나 대문에 ‘애인’을 걸어 놓는다고 하였으며. 정수강(丁壽崗, 1454∼1527), 역시 대문 앞에 애호(艾虎)를 만들어 붙이는 풍속을 기술하고 있다.8) 『樗軒集』, 『四佳集』, 『月軒集』 참조. 애인은 ‘예호(艾戶)’라고도 하고[김부윤(金富倫), 『설월당집(雪月堂集)』, “端午中殿帖子 妖邪避艾戶 瑞慶入瑤窓”] ‘예호(艾虎)’라고도 하는데[정수강(丁壽崗), 『월헌집(月軒集)』, 「天中節」], 이것을 만드는 것은 아이들이어서 조선 전 기까지는 계층을 넘어 유행하였던 풍속의 하나로 여겨진다.9) 金富倫, 『雪月堂集』 ; 丁壽崗, 『月軒集』, 「天中節」.

앞서 인용된 바 있지만 김종직의 『점필재집』에는 제석(除夜, 臘日, 歲除), 인일(人日), 입춘, 상원, 삼월 삼일, 한식, 사월 초팔일, 단오, 복일(伏日), 칠석, 중추(嘉俳), 중양(重九), 입추, 동지 등의 다양한 세시 관련 사항들이 언급되어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석의 풍속에는 ‘구나(驅儺)’, ‘납제(臘祭)’ 등이 있다. 인일에는 초백주를 마시거나 도부를 새롭게 만든다. 입춘 풍속으로 관료들은 왕실에 첩자(帖子)를 올리고 농촌에서는 오신채(五辛菜)를 먹는다. 그는 또한 정초의 달도일(怛忉日) 유래를 밝히고 있다. 상원의 풍속은 농가에서 이날 보름달을 가지고 한 해를 점치거나(‘望月占年’) ‘치롱주(治聾酒)’를 마신다. 삼짇날은 욕기(浴沂)를 하는 때로서 푸른 쑥에 쌀가루를 섞은 떡을 만들어 먹거나 답청놀이를 한다. 이날 사대부들은 향음향사례(鄕飮鄕射禮)를 하였다. 한식의 풍속에는 묘사(墓祀) 이외에도 ‘춘유(春遊)’도 하였다. 또한, 한식에는 찬 음식을 먹고 불을 금해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다. 사월 팔일에는 욕불(浴佛)행사뿐만 아니라 관등(觀燈)을 하였다. 관등 행사가 벌어지는 시간적 배경, 관등 행사의 형상 등을 기술하고 있다. 특히, 김종직은 사대부인 자신이 참여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아쉬워하면서도 반대로 부녀자의 동참에 대해서는 ‘추문(醜聞)이 있었다.’고 하여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입춘을 맞아 대문 등에 붙이는 첩(帖)을 입춘첩이라고 한다. 첩은 우리말로 ‘체’라고 하므로 ‘입춘체’라고 불렀다. 김안국(1478∼1543)의 문집 『모재집(慕齋集)』에는 16년 동안에 작성한 입춘체가 순서대로 남아 있다. 입춘체를 붙이는 장소는 시기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청사(廳事, 廳堂), 은일정(恩逸亭), 범사정(泛槎亭), 동고정(東皐亭), 장호정(藏壺亭), 대문, 중문(中門), 장문(場門), 외대문(外大門, 外門), 오실(奧室), 연거(燕居), 정침(正寢), 제생서원(諸生書院), 아배서원(兒輩書院) 등으로 다양하다. 입춘체를 작성하는 도중에 임금의 명을 받아서 급하게 입궐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때 김안국은 자식들에게 이미 작성된 입춘체를 붙이도록 하고, 귀가한 다음 나머지를 작성하여 붙이기도 하였다. 또한, 입춘체의 내용 중에는 정월 보름에 달그림자의 길이를 통해서 풍년을 점치는 내용도 확인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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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희문(吳希文, 1539∼1613)의 『쇄미록(瑣尾錄)』은 그의 피난 생활 10년을 기록한 일기이다. 서울을 출발한 날부터 1592년 6월까지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 「임진남행록(壬辰南行錄)」이고, 1592년 7월부터 1601년 2월 27일까지의 피난 생활을 기록한 것이 「일록(日錄)」이다. 일기에 나타난 그의 세시 관련 행적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 1월 15일: 이날은 속절이다. 약밥을 조금 지어 편육과 탕과 적 등으로 차례를 지냈다. 죽은 딸에게도 지냈다. 오곡 찰밥을 만들어 노비들에게 먹였다.

○ 3월 3일: 이날은 속절이다. 떡을 해서 신주 앞에 올렸다. 이날은 또 답청하는 가절이다. 이날은 삼삼 사절이다.

○ 5월 5일: 이날은 단양 가절이다.

○ 7월 7일: 이날은 칠석 가절이고 또 말복이다. 속절이어서 술과 편육과 삶은 닭으로 차례를 올렸다. 종 덕노는 비로 오지 못하였다. 곡식이 떨어져 밥을 먹지 못하고 근근히 저녁밥을 기다려야 하였다. 아래 무리들에게 죽만 주니 한스럽다.

○ 7월 15일: 이날은 속절이다. 일가 노비들을 오늘은 쉬게 하였다. 저녁에 김담에게 집앞 텃밭을 갈게 하였다.

○ 8월 15일: 어제 밤에 어살로 냇물 고기를 낚은 것은 차례에 쓰기 위해서였는데 모두 훔쳐가고 남은 것이 없다. 비통함을 이길 수 없다. 술, 떡, 실과, 포, 적 등으로 차례를 지낸 후에 가족이 함께 먹었다. 오늘은 속절이다. 이웃 사람들 모두 남은 좁쌀로 떡을 하여 차례를 지냈다. 오늘은 중추가절이다.

○ 9월 9일: 이날은 가절이다. 술과 떡을 준비하고 닭 두 마리를 잡아 제물을 마련하여 신주 앞에서 제를 지냈다. 죽은 딸에게도 올렸다. 오늘은 중양 가절이다. 구구가절이라고도 한다. 술과 떡과 삼색 실과를 준비하고 꿩 두 마리를 잡아 탕과 적을 만들어 제사를 지냈다.

다음은 권필, 김상헌, 이안눌, 이식, 정홍명 등 풍속의 교체 시기이기도 한 17세기 전후를 살았던 사대부들의 세시에 대한 인식과 글 속에 나타난 세시 현장을 살펴본다.

석주(石洲) 권필(權韠, 1569∼1612)의 본관은 안동이고 권벽(權擘)의 아들로 정철의 문인이다. 그는 과거를 보지 않고 시(詩)와 술로 낙을 삼고 가난하게 살았다. 한 때 추천으로 동몽 교관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강화부에 갔을 때 유생이 몰려와 이들을 가르쳤다. 동악 이안눌의 기록을 보면 석주 권필의 구서(舊墅)가 오리천(烏里川) 부근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광해 때 척족의 방종을 비방하는 글이 발견되 어 친국을 받고 유배되어 동대문 밖에 이르러 폭음으로 죽었다.

권필이 쓴 세시 기록 중 특기할 만한 내용은 서울 세시에 관한 것이다. 「관등행 시우인(觀燈行 示友人)」이란 시에서 그는 사월 초파일에 서울에서 관등 행렬을 보니 부호들이 많아서인지 경쟁적으로 등을 늘어뜨리고 잡희 무대를 설치하는 등 옛 풍습을 이어오고 있다고 하였다. 이날 특별히 통금을 없애니 거리에 사람들과 음악소리로 가득 찼음을 기록하고 있다.

종가 관등의 모습은 이민성(李民宬, 1570∼1629)의 『경정집(敬亭集)』에서도 나온다.

희미한 불빛이 네모진 등 아래를 비추고 연로의 먼지를 거두자 달이 뜨려 한다. 은은한 종소리 넓어진 길로부터 들려오고 황황히 빛나는 나무가 화려한 등을 거둔다. 풍성함과 형통함이 점점 더하니 천심을 알 것 같고 조야로 근심 없으니 거듭 즐거운 일이로다. 들으니 의금부에서 통금을 정지하여 방해받지 않고 취할 수 있다니 기쁨이 한층 더하리라.10) 『敬亭集』, 「鍾街觀燈」.

김상헌(1570∼1652)의 세시 기록은 그가 중국 심양으로 잡혀갔을 때와 의주로 돌아왔을 때 고향을 그리는 시와 은퇴하여 남양주 석실에서 지은 시에 집중되어 있다. 김상헌은 한식(寒食)을 맞이하여 이백윤, 최흥숙과 원수대에 놀러가서 읊은 시에서 “원수대 높은 곳은 넓은 바다가 보이는 곳, 한가한 한식날을 택해 그곳을 오른다. 지세는 서북으로 기울어 모든 산이 그곳으로 달리는 듯 하늘은 동남으로 닿아 태극이 뜨는 듯하다. 한식과 청명은 명절이라 따뜻한 바람과 경치가 어울려 신선이 노는 듯 쾌적하다. 지난 일년 돌이켜보니 일만의 연속이라 술잔을 앞에 두고 한 번 웃으며 만가지 걱정을 잊으리.”라고 하였다. 그는 1640년에 심양으로 끌려갔다가 1642년에 의주로 돌아왔는데, 이 시에 나오는 원수대가 함경도 종성 부근이 므로 아마 당시에 지은 작품인 듯하다.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 1571∼1637)은 60세가 넘어 말년까지도 줄곧 외직으로 전국을 다니다시피 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세시에 관한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절기마다 표현하고 있다. 그의 문집 『동악집』은 『동국세시기』 등 조선 후기에 작성된 세시기에 비견할 만한 내용이 들어있다. 게다가 세시를 담은 시를 그가 재직하였던 지방 별로 분류하고 있고 일반인들이 잘 모를 세시 용어에 대해서는 친절한 세주(細註)를 달고 있어서 『동악집』의 자료적 가치는 더욱 높다.11) 세시를 담은 그의 기록물들은 다음과 같다.
「湖西錄」; 「端州錄」(端川) ; 「洪陽錄」(洪州, 1607) ;「萊山錄」(東萊, 1607∼1609) ;「潭州錄」(潭陽) ; 「錦溪錄」(錦山郡, 1611년 10월 20일∼1613년 10월 17일) ; 「月城錄」(慶州, 1613∼1614) ; 「江都錄」(江華, 1617년 6월 강화부사 제수) ; 「關西後錄」 ; 「北竄錄」 ; 「東遷錄」(1625년 3월 15일에 강원도 홍천으로 옮김) ; 「江都後錄」(1628년 강화부 유수에 복직, 1630년까지 재직) ; 「咸營錄」(1631년 5월 함경도 감사로 제수) ; 「朝天後錄」(1632년 6월 주청 부사로 제수) ; 「湖營錄」(1634년 정월 공청도 감사로 제수).

그가 남긴 많은 기록물 중에서 한 가지만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 사월 초파일

이 날은 우리나라에서는 등석이라고도 한다. 두봉 이지완이 부산에 머물고 있어 새 술 한 통을 보내면서 겸하여 시 한 수를 보낸다. 석가의 생일에 따뜻한 맥풍이 분다. 나라 풍속이 된 관등은 정월보름 행사와 유사하다(四月八日 乃我東燈夕也 斗峯學士留駐釜山 奉送新酒一榼 兼呈長律一首).

두봉(斗峯) 이지완(李志完)은 여주 이씨 이상의(李尙毅)의 아들로 1575년에 태어나 1617년에 죽었다.

○ 경주의 단오

이른 새벽에 쑥을 엮어 대문에 걸어두고 창포실 띄운 술잔으로 모두 함께 즐긴다. 서울을 멀리 떠나 세 번 맞는 단오절에 집을 생각하며 북쪽을 향해 남산의 남쪽을 바라본다. 조상묘에 향화 거른 것은 참을 수 있지만 높은 당에 올라 맛있는 음식이나 나누어 보았으면. 어린 아전이 뜰에서 절하며 단오 선물을 바치는데 흰 신과 둥근 부채가 바구니에 가득하다.

그는 세주에서 본부, 즉 경주부에서는 단오절이 되면 공방 아전들이 흰 털신과 짚신, 둥근 부채 등을 바치는 풍속이 있다고 지방 풍속을 전하고 있다.

○ 1625년 3월 15일 강원도 홍천으로 옮긴 후 지은 시들

「남궁적송사마주일분(南宮績送四馬酒一盆)」: 남궁적이 사마주 한 동이를 보내오다. 그는 전해 단양일 이후 당년 6월초까지 매월 사마주 세 병씩을 타향 벽진 곳 오막에 보내왔다.

「망혼일(亡魂日)」: 칠월 15일 밤에 앉아서 달을 대하다. 어느새 세월이 흘러 가을달을 보니 중원이라. 쫓겨 다닌 지 3년에 고향 정원은 아득하다. 백로에 공기 씻겨나니 북쪽으로 구르는 별이 보이고 청산이 마을을 돌아가니 물이 서쪽으로 힘차게 내달린다. 귀뚜라미 닮아가듯 목소리 숨차고 눈은 두꺼비처럼 침침해진다. 시전에 채소와 과일이 많은 것을 보니 오늘 도성 사람들 도처에서 망혼에게 제사지내겠구나(세주, 우리나라 풍속에 중원을 망혼일)이라 부른다. 여염 백성들은 이날 달밤에 채소·과일·술·밥 등을 차려놓고 돌아가신 어버이 혼을 불러 제사를 모신다.

택당 이식(李植, 1584∼1647)은 관등에 관한 시 두 수를 남겼다. 서울 종로 관등의 모습은 그의 시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종가관등(鍾街觀燈)」은 한도팔경(漢都八景), 즉 서울 풍경을 읊은 시 8개 시 중의 하나다.

하늘은 물과 같고 떠있는 달은 얼음 같다. 남녀가 몰려와 걸린 등을 본다. 수많은 횃불과 밝은 등불은 밝기가 대낮 같다. 온갖 가지와 잎은 채붕을 이루고 바퀴와 말발굽은 향기로운 먼지를 일으킨다. 노래와 악기 소리는 마치 상서로운 아지랑이 같다. 이러한 자유로운 가운데 인물이 크고 봉선함을 본받게 된다.

그는 4월 초파일 송도에서 관등하고 양자점을 회고하는 절구를 운으로 시를 지었다. 송도의 관등 모습은 다음과 같다.

폐원의 높은 나무에는 토사풀이 걸려있고 탁타교 아래 물소리는 슬픔을 자아낸다. 오늘밤에 대한 고사는 기억할 만하니 많은 나무에 걸려있는 밝은 등불과 반달의 어울림을 …

기암(畸庵) 정홍명(鄭弘溟, 1592∼1650)은 「전가사시사(田家四時詞)」를 남겼다. 그의 시에 나오는 환벽당은 광주호 상류 창계천의 충효동 언덕 위에 높다랗게 자리 잡은 정자로, 조선 시대 때 나주 목사 김윤제가 고향으로 돌아와 건물을 세우고, 교육에 힘쓰던 곳이다. 전에는 벽간당이라고도 불렀다. 송강 정철이 과거에 급제하기 전까지 머물면서 공부한 곳이라고 한다.

그가 농가의 사계절을 읊은 「전가사시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봄) 이른 아침에 맑은 물을 논 두둑에 채울 때 곳곳의 성긴 숲 속에서 뻐꾸기 운다. 들에는 노인이 소를 몰고 삼태기와 가래를 들고 부지런히 땅 깊숙이 씨를 뿌린다.

(여름) 가벼운 구름이 해를 가려 늦은 바람 시원할 때 맑은 술 주발에 채우고 향기나는 나물을 안주로 갖춘다. 서녘 두둑 김매기 끝나고 남쪽 이랑으로 향할 때 수시로 들리는 농요는 악장을 이룬 것은 아니다.

(가을) 매달린 표주박 꼭지 떨어지고 대추알 발갛게 익을 때 거리 곳곳마다 풍년을 기뻐하는 말뿐이다. 작은 며느리가 군불로 향기나는 밥을 짓고 보관해 둔 찬거리 꺼내다가 쇠약한 노인을 공양한다.

(겨울) 땅에 화롯불 피워 토란 구워먹고 한 겹 베옷으로 우의(牛衣) 만들어 병들지 않도록 소에게 입힌다. 불 땐 아랫목에서 나올 생각 않고 게으름 피우니 밤새 온 눈이 울타리 덮은 줄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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