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6권 한 해, 사계절에 담긴 우리 풍속
  • 2 세시 풍속과 사회·문화
  • 03. 세시 의례와 지역 문화사
  • 지역별 세시 의례
정승모

군·현 단위에 설치된 신사에서의 행사 시기는 지역 고유의 전통을 반영하고 있다. 조선 전기에 성행하던 지역의 제의들은 적어도 중종 때까지는 존속되었으나 이후의 존폐 여부는 일률적이지 않고 지역 특성, 즉 기존 토호와 새로 들어온 사족들과의 관계에서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조선 후기에 나온 각종 읍지들을 통해 존속의 가능성을 찾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그러나 읍지도 이전의 내용을 그대로 전재하는 등 불투명한 것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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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진
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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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관내에서는 개성의 송악산(松嶽山)과 임진강의 덕진(德津)은 중사(中祀)의 대상이고 적성(積城)의 감악산(紺嶽山)과 양주의 양진(楊津, 조선시대에는 廣州의 廣津)은 소사(小祀)의 대상이다. 서독(西瀆)에 해당하는 덕진의 덕진사(德津祠)에 봄과 가을로 향축이 내려졌고 북독(北瀆)인 한강 광진의 양진사(楊津祠)에도 봄과 가을로 향축(香祝)을 내렸다. 감악산 역시 신라 때부터 소사로서 봄과 가을에 나라에서 향축을 내려 제사를 지내온 곳으로 산 위에 감악 신사(紺岳神祠)라는 사당이 있는데, 신라 사람들이 당나라 장수 설인귀(薛仁貴)를 제사지내고 산신을 삼았다고 전해온다.

영조 18년(1742)에 신유한(申維翰, 1681∼1752)은 춘향의례(春享儀禮) 제관으로 감악산을 등반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는데(『청천집(靑泉集)』 권4, 「감악산기(紺岳山記)」) 이에 따르면 그는 제사일 하루 전에 읍에 도착하여 그 지역 사람 중에 선정된 대축(大祝)과 함께 산 정상에 올라 사경(四更), 즉 새벽 2시 경에 향례(享禮)를 행하고 산을 내려왔다.

국가에서 기우제를 지내는 곳은 주로 서울과 경기 일원으로 양진, 덕진, 감악, 송악 등이다. 조선 초에 양주읍을 북쪽 주내면으로 옮기면서 양진은 광진으로 바뀌었다. 광진, 즉 광나루는 한강을 대표하는 제사 장소다. 한강은 신라 때는 4대강의 하나인 북독(北瀆)으로서 중사의 대상이었고 이후는 소사로서 나루 위 양진사(후에는 양진당)에서 국가 주관으로 제사를 행해왔다. 특히, 양진당은 화룡제(畵龍祭), 즉 용의 그림을 용단(龍壇)에 걸고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비를 내리게 하기 위해 물의 신인 용신(龍神)이 산다는 한강에 범 대가리를 넣고 도사(道士)들에게 용왕경(龍王經)을 읽게 하는 침호두(沈虎頭) 의례는 조선 중기까지 이어져 왔다. 양진당은 국가 의례 장소로서는 쇠퇴하였으나 조선 후기에 이르면 그 동안 융성해진 상업 활동을 반영하듯 광나루를 이용하는 뱃꾼들과 상인들에게는 더욱 가까워져 매년 2월과 8월에 용신제가 행해질 정도로 민간 신앙의 중심지가 되었다.

덕진사는 경기도 서쪽 임진강 변의 덕진에 있는데 사전(祀典)에 서독(西瀆)이라 하였고 중사로 기재되었다. 봄과 가을에 향축을 내려 제사하였다.

경기 일대에서는 토호적인 성황제는 사족들에 의해 ‘음사’로 몰려 대부분 사라지고 대신 각 고을마다 수령의 주관 아래 봄·가을로 사전적인 향례가 행해졌다. 그러나 현재 시흥 관내인 안산 군자봉에서는 도중에 재지사족의 반대로 중단된 적은 있지만 토착적인 성황제가 조선 후기는 물론 일제강점기 때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경기도 지평현은 현재 지제면 지평리로 조선시대에 읍치로서 관아가 있었던 곳이며 북쪽의 봉미산은 아전 등 관리들과 읍치 주민들이 참여하는 군·현 단위 성황제가 행해지던 곳이다. 성황제일은 음력 3월 초순경으로 제의는 성황대주(城隍大主)에 대한 제례와 오방신장에 대한 제례로 구성되었다. 성황제는 당일 자정에 봉행한 후 이어 무당이 밤새 굿을 하였고 주민들은 산에 올라와 기원하고 놀았으며, 이튿날은 사당패들도 와서 줄타기 등을 공연하였다.

충청도 공주 곰나루(熊津)의 남안(南岸)에 위치한 웅진사(熊津祠)는 신라 때 서독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조선에서는 남독으로 중사로 삼아 춘추로 향축을 내려 치제하였다. 가야갑사(伽倻岬祠)는 충청도 덕산읍 서쪽 3리 지점에 있어 신라 때에 이를 서진(西鎭)으로 삼아 중사로 기록하였는데, 조선에서는 그 고을로 하여금 춘추로 제사하게 하였다. 충주의 양진명소사(楊津溟所祠)는 견문산(犬門山, 현재 탄금대) 아래 금휴(琴休) 포구에 있는데 사전(祀典)에는 소사에 실려 있다. 역시 춘추로 향축을 내려 치제한다. 계룡산사(鷄龍山祠)는 계룡산 남쪽에 있는데 신라 때에는 오악(五岳)으로 중사에 기록되어 있고, 조선에서는 명산으로 소사가 되었다. 춘추로 향축을 내려 치제하였다.

홍석모의 『동국세시기』를 보면 충청도 진천군에서는 매년 3월 3일부터 4월 8일까지 아녀자들이 무당을 데리고 우담당(牛潭堂), 동서용왕당 및 삼신당에 가서 아들 낳기를 비는 풍속이 왔는데, 모인 사람들로 시(市)를 이룬다고 하였다.

충청도 보은 속리산 마루에 있는 대자재천왕사(大自在天王祠)는 그 신이 매년 10월 인일에 법주사에 내려온다고 하여 산중 사람들이 풍류를 베풀고 신을 맞아다가 제사지낸다.

충청도 청안(淸安) 지방 풍속에는 3월 초가 되면 그 고을의 우두머리 아전이 읍내 사람들을 이끌고 동면에 있는 장압산(長鴨山) 위의 큰 나무로부터 국사신(國師神) 부부를 맞이하여 읍내로 들어와서 무당들을 시켜 술과 밥을 갖추어 놓고 징과 북을 요란하게 치면서 동헌과 각 청사에서 제사를 행한다. 그런 후 20여 일 후에 그 신을 본래의 나무로 도로 돌려보내는데 이런 행사를 2년 만에 한 번씩 행한다고 하였다.

1871년에 간행된 『영광속수여지승람(靈光續修輿地勝覽)』를 보면 전라도 영광에서는 군 북쪽 2리에 있는 여제단에서 매년 3월과 9월 말일에 명을 다하지 못한 귀신들을 제사하였다고 한다.

전라도 나주는 대읍이기도 하지만 금성산의 제사는 그 규모에서나 참가자의 지역 범위로 볼 때 일대에서는 가장 큰 행사였다. 금성산에는 사당이 다섯이 있는데, 상실사(上室祠)는 산꼭대기에 있고, 중실사(中室祠)는 산허리에 있으며, 하실사(下室祠)는 산기슭에 있고, 국제사(國祭祠)는 하실사(下室祠)의 남쪽에 있으며, 이조당(禰祖堂)은 주성(州城) 안에 있다. 속설에 “사당의 신은 영험하여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재앙을 내리므로, 매년 춘추에 이 고을 사람뿐 아니라 온 전라도 사람이 와서 제사를 지내는데 남녀가 혼잡하게 온 산에 가득하여 노숙을 하기 때문에 남녀가 간통하여 부녀를 잃는 자가 많았다.”고 할 정도였다.

금성산의 규모만큼은 아니지만 광주의 무등산신사(無等山神祠) 역시 영험하다고 소문이 나서 춘추로 열리는 제사 때면 일대의 사람들이 몰렸다. 무안(務安)에는 용진명소(龍津溟所)가 석산(石山) 아래 있는데 본읍에서 춘추로 제사를 지냈다.

제주도는 음사를 숭상한다고 할 정도로 고유하게 내려오는 세시행사들이 많았던 곳이다. 매년 원일부터 보름까지 무격이 신독(神纛)을 같이 받들고 나희를 하는데, 북을 두드리면서 앞서서 여염을 출입하면 다투어 재물과 곡식을 바치니 이것으로 제사를 지낸다. 또 2월 초하룻날 귀덕(歸德), 김녕(金寧) 등지에서는 목간(木竿) 12개를 세워 신을 맞아 제사한다. 애월(涯月)에 사는 사람들은 말머리 모양의 뗏목을 얻어서 채색 비단으로 꾸며 약마희(躍馬戲)를 하여 신을 즐겁게 하다가 보름에 파하는데 그것을 ‘연등절(燃燈節)’이라고 한다. 이달에는 배타는 것을 금한다. 또 춘추로 남녀가 광양당(廣壤堂)이나 차귀당(遮歸堂)에 무리로 모이며 술과 고기를 갖추어 신에게 제사한다고 하였다. 8월 15일 추석에는 남녀가 함께 모여 노래하고 춤추며 나누어 좌대(左隊) 우대(右隊)를 만들어 큰 동아줄의 두 끝을 잡아당기어 승부를 결단하는 조리희(照里戲)라는 놀이를 하고 또 그네를 뛰고 닭 잡는 놀이를 한다고 하였다.

제주도는 대부분의 마을에 1∼2개의 신당이 있으며 신의 성격은 천신, 산신, 농경신, 산육신, 해신 등 다양하다. 또한, 마을마다 이사제(里社祭)나 포제(酺祭)를 행하였다고 한다. 일년에 한번 정월 또는 7월의 초정일(初丁日)에 제를 집행하는데, 정월 행사의 경우 대상신은 ‘이사지신(里社之神)’이고 7월 행사의 경우는 주로 ‘포신’이다. 제사의 진행은 남성을 위주로 이루어지며, 마을의 유지나 각 성씨의 대표가 제관을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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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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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군위의 김유신사(金庾信祠)는 속현인 효령현(孝靈縣) 서악(西岳)에 있는데, 삼장군당(三將軍堂)이라 속칭된다. 매년 단오날에 현의 수리(首吏)가 고을 사람을 이끌고 역기(驛騎)에 기를 세우고 북을 달아 신을 맞이하면서 거리를 누빈다. 허추(許樞)의 시에, “사람들 말에 고장(古將)은 서성(西城)의 주인이라 하더니 그 풍속이 지금까지 내려오므로 그 사연이 분명하다. 해마다 단오날을 어기지 아니하고 깃발을 세우고 북을 치면서 신의 뜻을 위로하는구나.” 하였다.

앞서 경상도 고성의 성황제에 대해 언급하였지만 그 외에도 이곳의 관음점사(觀音岾祠)는 현 서쪽 10리 떨어진 곳에 있는데, 봄과 가을에 현령(縣令)이 여기에서 상박도(上撲島)·하박도(下撲島)·욕지도(欲知島)의 신에게 망제(望祭)를 지낸다.

경상도 웅천(현재 창원)의 웅산 신당(熊山神堂)은 산머리에 있다. 토인(土人)들이 매년 4월과 10월에 신을 맞이하여 산에서 내려와, 쇠북을 치며 잡희(雜戲)를 벌이는데, 원근 사람들이 다투어 와서 제사한다. 우불산신사(于弗山神祠)는 경상도 울산에 있다. 사전에는 소사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매년 봄과 가을로 향축을 내려 하늘에 제사지 내고 가뭄에 비를 빌면 효험이 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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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천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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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부지(東萊府誌)』는 1740년에 간행되었는데 현재는 부산의 한 구인 동래의 여러가지 세시 행사를 담고 있다. 이곳은 특히 각 면마다 동안(洞案)을 두어 매년 3월 3일 삼짇날과 9월 9일 중양절에 한 곳에 모여 강회(講會)를 한다고 하였다. 또 4월 8일 초파일 밤에는 집집마다 등을 달고 천중절, 즉 단오절에는 읍내의 남녀가 모여 편을 갈라 그네타기를 하고 또 동서로 나누어 줄다리기를 한다고 하였다.

경상도 성주의 읍지인 『성산지(星山誌)』를 보면 사직단, 성황사, 여제단 등은 당시 모두 훼철(毁廢)되었지만 동문 밖의 관제묘(關帝廟)는 남아 있어 봄에는 경칩, 가을에는 상강 때 각각 향사한다고 하였다. 관제묘는 1597년 정유재란 때 명나라 장수 모국기(茅國器)에 의해 건립된 후 1727년(영조 3)에 남정(南亭) 아래로 옮기고 명나라 장수 3인을 종향(從享)하였다.

강원도 고성군(高城郡)에서는 고성신사(高城神祠)라는 사당에서 매월 삭망일에 관 주관으로 제를 지내는데, 홍석모의 『동국세시기』를 참조하면 이 당에 신의 가면을 만들어 두었다가 납월에 그 신이 읍에 내렸다고 하여 가면을 쓰고 관아와 읍내를 돌아다니며 춤을 추면 각 가정에서는 이를 맞아 즐겁게 하였다고 한다. 이 행사는 정월 보름 전에 끝나고 가면은 다시 당에 모셔둔다고 하였다.

강원도 삼척의 태백산사(太白山祠)는 태백산 꼭대기에 있는데, 세간에서 천왕당(天王堂)이라 한다. 강원도는 물론 경상도 인접 지역 사람들도 춘추로 제사하는데, 신좌(神座) 앞에 소를 매어 두고는 갑자 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난다. 만약에 돌아볼 것 같으면 불공(不恭)하다고 하여 신이 벌을 준다고 한다. 사흘이 지난 다음 부(府)에서 그 소를 거두어 이용하는데, 이를 퇴우(退牛)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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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 천왕당(천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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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목(許穆)의 『기언(記言)』에는 삼척에서 입춘날에 선색(先繬)에게 올리는 제문(祭文)이 실려있다. 곧, “사진(司辰)을 끌어 일으키시어 풍성한 덕이 산에 내리도록 해주시고, 기장을 정갈하게 정성껏 써서 백곡이 잘되기를 기원합니다(攝提司辰 盛德在木 虔用粢盛 祈爾百穀).”라는 것이다. 입춘단은 삼척관아 동쪽 5리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농사와 산일을 시작하려면 먼저 제사를 끝낸 후에 오곡을 파종하고 북을 치며 도로를 순회하여 봄기운을 일으켰다고 한다.

허균이 남긴 세시 관련 기록으로 많이 인용되는 것이 강원도 대관령 산신에 대한 찬시 서문 『대령산신찬병서(大嶺山神贊竝書)』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계묘년(1603) 여름에 명주(溟州, 현재 강릉)에 있을 때였다. 고을 사람들이 5월 초하룻날에 대령신을 맞이한다고 하기에 그 연유를 수리(首吏)에게 물으니, 수리가 대답하기를, “대령신이란 바로 신라 대장군 김유신(金庾信)입니다. 공이 젊어서 명주에서 공부할 때 산신이 검술을 가르쳐 주었고, 명주 남쪽 선지사(禪智寺)에서 칼을 주조하였는데 90일 만에 불속에서 꺼내니 그 빛이 햇빛을 무색하게 할 만큼 번쩍거렸답니다. 공이 이것을 차고 성을 내면 칼이 저절로 칼집에서 튀어나오곤 하였는데 끝내 이 칼로 고구려를 쳐부수고 백제를 평정하였답니다. 그러다가 죽어서는 대령의 산신이 되어 지금도 신령스런 이적이 있기에 고을 사람들이 해마다 5월 초하루에 번개(旛蓋, 기와 일산) 및 향화(香花)를 갖추어 대령에서 맞이하여 명주 부사(溟州府司)에 모신답니다. 그리하여 닷새 날 갖은 놀이(雜戲)로 신을 기쁘게 해 드린답니다. 신이 기뻐하면 하루 종일 일산이 쓰러지지 않아 그 해는 풍년이 들고 신이 화를 내면 일산이 쓰러져 그 해는 반드시 풍재(風災)나 한재(旱災)가 있답니다.”고 하였다. 나는 이를 이상히 여겨 가서 보니 과연 기울어지지 않는지라 고을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고 환호성을 지르며 경사롭게 여겨 서로 손뼉 치며 춤을 추는 것이었다. 생각건대 공은 살아서는 왕실에 공을 세워 삼국 통일의 성업을 이루었고 죽어서는 수천 년이 되도록 오히려 이 백성에게 화복을 내려서 그 신령스러움을 나타내니 이는 진정 기록할 만한 것이라 다음과 같이 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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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령 산신당
대관령 산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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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에 김유신을 모시던 사당이 성황사로 합사(合祠)되면서 위의 기록처럼 이후 그가 성황제의 주신 자리를 지켜왔다. 그러다가 1884년에 후손들이 원래의 사당 자리인 화부산(花浮山)에 사당을 짓고 성황사에서 위패를 옮김으로써 단오제를 포함한 성황제의와 인연이 끊어지게 된다. 이들 후손들이 김유신을 사당에 모실 때 건물은 일반 사우(祠宇) 형식을 취하였다. 이후 1936년의 동해철도 부설로 사우 일대가 강릉역 부지에 포함되어 사우를 지금의 자리인 교동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황해도 문화현의 구월산은 무속과 관련하여 중요시되지만 환인과 환웅과 단군의 사묘(祠廟)인 삼성사(三聖祠)가 있어 춘추로 향축을 내려 치제한 곳이기도 하다. 또 이곳의 전산사(錢山祠)는 매년 춘추로, 그리고 10월에 향축을 내려 치제하였다.

황해도 황주의 극성은 고려 때 백골이 들판에 드러날 정도로 여러 번 병란을 겪은 곳이다. 따라서 하늘이 음침하고 비가 오면 귀신이 원통함을 부르짖고 그것이 모여 여기(厲氣)가 되어 황해도 전역으로 번져가 지역 백성이 많이 죽었다고 한다. 이를 달래기 위해 세운 것이 극성제단(棘城祭壇)이다. 나라에서 춘추로 향축을 내려 보내 제사를 드리게 하였다.

평안도의 동명왕사(東明王祠)는 기자사(箕子祠) 옆에 있으며 같은 집에 단군이 서편 채에, 동명이 동편 채에 있으며 모두 남향이다. 해마다 춘추로 향축을 내려 중사로 제사한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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