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6권 한 해, 사계절에 담긴 우리 풍속
  • 2 세시 풍속과 사회·문화
  • 04. 세시 풍속의 변화와 지속
  • 정월의 상원 답교 및 석전 풍속의 변화
정승모

정월 보름밤의 답교는 오랜 전통을 가진 대표적인 서울 풍속인데 조선 명종 15년, 즉 1560년 5월 6일에 서울 안 남녀가 혼잡하게 모여 혹은 싸우기도 하는 등 경박하다고 하여 금지시켰다(『명종실록』 권26, 명종 15년 5월 6일 신미).

서유구는 『임원경제지』에서 이에 대해 문헌들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상원 답교(上元踏橋)는 고려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평소에도 남녀가 넘치고 인파가 밤이 다 되도록 그치지 않았을 정도였다. 이를 금하게 한 이후로 부녀 중에 다시 답교하는 자가 없었다(『지봉유설』). 달이 뜬 후 도시민들 은 종가(鍾街)로 나와 종소리를 듣고 흩어져 모든 다리를 밟는데 이렇게 하면 다리병이 낫는다고 한다. 대소 광통교(廣通橋)와 수표교(水標橋)가 가장 붐빈다. 이날 저녁에는 야금(夜禁)을 없애주므로 거리가 인산인해를 이루고 피리와 북소리로 매우 소란하다. 중국에서도 부녀자들이 어울려 놀다가 다리를 지나며 ‘도액(度厄)’한다는 풍속이 있는데 우리의 답교 풍속이 이에 기원한다(『한양세시기』). 정월 보름에 연등하는 풍속은 한나라 때 시작되어 당·송 때 매우 성하였다. 우리나라는 등석 행사가 4월 초파일로 옮겨져 대보름에는 조용해졌으며 오직 홍반(紅飯)을 먹고 다리밟기 두 일만 있다. 들과 밭 사이에는 통하는 길이 없어 광교 답교 놀이도 황혼에 끝난다[『임원경제지』 「이운지(怡雲志)」 권8, 節辰賞樂條].

그러나 이 기사만으로는 답교 풍속이 언제 다시 행해지게 되었는지, 또는 그 성격이 어떻게 변하였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명확히 해 줄 새로운 자료들이 요구되는데, 다음의 문헌자료들을 검토해 보면 결국 답교 풍속의 부활은 임진왜란 이후의 현상이며 이전과는 달리 여자들이 놀이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음이 확인된다. 즉, 고경명(1533∼1592)의 「기상원답교(記上元踏橋)」(『제봉집』 권3)의 주(註)에 답교는 “고려 때 시작되어 최근까지 번성하다가 법으로 관에서 금지하여 지금은 볼 수 없게 된 것이 근 30년이 된다.”라고 하여 16세기 후반경의 답교 풍속은 당시인들에게는 소년 시절의 추억으로 남은 것이었지만 임란 이후에는 이 풍속이 다시 행해져 다음과 같은 시로 담겨지게 된 것이다.

곧, 김창업과 홍세태(洪世泰)는 『노가재집(老稼齋集)』과 『유하집(柳下集)』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 踏橋曲三首(『노가재집』, 김창업, 1658∼1721)

其一 長安何喧喧 今夜踏橋遊 月出大道上 歌吹自相求

其二 明月映何限 靑樓夾廣川 上有歌舞人 下有踏橋人

其三 長安水東西 明月光徘徊 笙歌不相識 齊向橋上來

○ 元夕踏橋歌(1724년, 『유하집』, 홍세태, 1653∼1725)

漢陽年少夜相招 半脫貂裘倚醉驕

月滿九衢平似水 屧聲多在廣通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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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야회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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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야회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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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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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연려실기술』에 “남자는 귀천을 물론하고 무리를 이루어 다리를 밟는 것이 지금까지 풍속을 이루고 있다.”(『임원경제지』 이운지 권8)고 한 것이나 19세기 초에 오계주(吳啓周)가, 그리고 홍백원(洪伯遠)이 ‘상원야회서(上元夜會序)’라는 화제(畵題)를 단 답교 풍속도에 여자가 그려져 있지 않은 데서도 여자들이 답교 놀이에서 배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석전은 변전(邊戰)이라고도 하며 오월 단오에 행하는 김해 지방말고는 대개 정월 보름밤(서울)이나 16일(안동)에 많이 한다. 그러나 『고려사』나 이색(李穡)의 『목은교(牧隱稿)』 등을 보면 이전부터 대부분 지역에서 단오 때 한 것으로 나와 이 역시 단오의 쇠퇴와 관련된 현상으로 보인다.

『고려사』에는 공민왕 23년(1374)에 격구(擊毬)와 석전놀이를 금지시켰다고 하였고(세가44), 1380년(우왕 6)에는 임금이 석전놀이를 관람하기를 원하였다고 하였는데(열전47), 이때는 모두 5월 단오에 행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조선에 들어와서도 중기에 이르도록 석전은 단오 행사로 나온다. 『태종실록』에 의하면 “국속(國俗)에 5월 5일에 넓은 가로에 크게 모여서 돌을 던져 서로 싸워서 승부를 겨루는 습속이 있는데, 이것을 ‘석전’이라고 한다.”(태종 1년 5월 5일)고 하였다. 『세종실록』에는 “상왕(태종)이 병조참판 이명덕(李明德)을 보내어 석전할 사람 수백 명을 모집하여 좌우대(左右隊)로 나누게 하였다.”(세종 3년 5월 3일)는 기록이 있다. 세종 때는 의금부에서 단오 석전놀이를 금하였는데 양녕대군 등 종친들이 이 놀이를 관전하였을 뿐 아니라 독전(督戰)하였다고 하여 탄핵의 대상이 되었다.

성종 때도 역시 석전놀이를 금지시켰다는 기사가 나오는데(『성종실록』 권30, 성종 4년 5월 6일), 이는 곧 이 놀이가 금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행해져 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555년(명종 10)에 왜변(倭變)이 일어났는데, 임금이 왜구를 진압할 방책을 의논하던 중 석전꾼(石戰軍)으로 김해 사람 1백 명을 뽑아 보낸 것처럼 안동 사람들을 뽑아 방어하게 하자는 대책이 나왔다(『명종실록』 권18, 명종 10년 5월 27일).

조선 후기 이후 석전놀이는 단오 행사에서 정월 대보름 행사로 옮겨갔다. 1771년(영조 47)에 임금이 평양에서 상원일, 즉 정월 대보름에 벌이는 석전을 엄중히 금지하게 하고, 서울에서 단오에 벌이는 씨름과 원일(元日)에 벌이는 석전도 포도청에 분부해서 못하게 할 것을 하교하였다(『영조실록』 권117, 영조 47년 11월 18일).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의 제재 속에 석전놀이가 중지된 곳이 많았고 그 규모도 광역의 단위에서 일부 마을 단위 행사로 축소되었다가 해방 이후 점차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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