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6권 한 해, 사계절에 담긴 우리 풍속
  • 2 세시 풍속과 사회·문화
  • 04. 세시 풍속의 변화와 지속
  • 등석, 단오 및 유두의 쇠퇴
정승모

단오의 시기적 추이는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고상안은 상원에 장등(張燈)하고 한식 때 반선(伴仙), 즉 그네 뛰는 중국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초파일 때 등석하고 단오 때 반선하는데, 그 차이는 양국의 절후(節侯)가 서로 다른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았다(中國張燈 必於上元 伴仙必於寒食 詠於騷人者久矣 我國則以四月八日爲燈夕 於五月五日戲伴仙 其故何哉. 蓋我邦節候異於中國 上元之夜 寒猶逼骨 寒食之時 不可御風也 酌天氣和暖而爲之推移 雖非古例而意有存矣).[『태촌집(泰村集)』 권4, 「효빈잡기(效嚬雜記)」 上, 총화(叢話) 장등반선(張燈伴仙)]

고려 때의 연등 행사는 앞서 언급한 대로 정월 보름에서 2월 보름으로, 그리고 4월 8일로 옮겨졌다. 정월 보름의 연등 행사는 중국의 제도인데 이를 석가탄신일에 맞추어 행함으로써 우리 고유의 풍습이 된 것도 당시의 상황을 기준으로 하면 절후와 농사 주기를 고려한 변화라고 해석된다. 그러나 박이장(1547∼1622)의 『용담집』을 보면 상원 관등(上元觀燈)에 관한 기사가 있어 16세기까지도 상원, 즉 정월 보름에 등놀이 풍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정동유는 『주영편(晝永編)』에서 유두(流頭)를 우리 고유의 속절로, 그리고 2월 초하루를 민중의 절일로 보았는데(我國節日 惟流頭爲東俗 其餘 皆中國稱節之日也 見今小民 以二月初一日爲節日 備酒食爲戲 又或有祭先者 而不知其節名) 유두절에 대한 『동국세시기』의 내용과 일치한다.

절일로서의 유두의 비중은 시기가 내려올수록 점차 줄어들었다. 그러나 헌종조 정학유(丁學游)의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 「유월령(六月令)」을 보면 유두는 여전히 속절로서 지켜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복(三伏)은 쇽졀이오 뉴두(流頭) 가일(佳日)이라.

원두밧헤 외 고 밀가라 국슈야

가묘(家廟)의 쳔신고 음식 즐겨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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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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