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6권 한 해, 사계절에 담긴 우리 풍속
  • 2 세시 풍속과 사회·문화
  • 04. 세시 풍속의 변화와 지속
  • 중원 백중과 두레 형성 시기
정승모

도교적인 의미를 갖는 중원일 백중에는 우란분재라는 불가의 행사가 있는데, 고려 이후 조선 초기까지 지배층이 이를 주도하거나 이에 참여하였다. 예를 들면 김시습의 『매월당집(梅月堂集)』 권3에 “新秋天氣稍凄凉 節屆中元設道場 奉佛梵聲遵竺禮 招魂密語効些章….” 등의 중원과 관련한 시가 있다. 그러나 류성룡이 백종, 즉 백중은 촌민들이 부모를 위한 초혼제(招魂祭)를 지내는 날이라고 하였듯이 조선 중기 이후 사대부들은 이를 촌민들의 풍속으로 여겼다.

백중날에는 논농사를 하는 농촌 지역에서는 호미씻이 행사가 벌어지는데, 문헌에는 16세기 중반부터 그와 관련된 기사들이 보이며 이를 ‘세서(洗鋤)’, ‘세서회(洗鋤會)’, ‘세서연(洗鋤宴)’ 등 한자화한 단어로 표현하였다. 그 기사들 중에 단지 임억령(林億齡, 1496∼1568)의 『석천시집(石川詩集)』에는 “七月七夕時 始得畢鋤耨 田野役事休 以洗鋤柄土 家家野釀香 擊鼓而歌舞….”라고 하여 그 시기가 백중 일주일 전인 7월 7일 칠석인데, 이것은 이앙이 아닌 직파(直播)에 따른 농사력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호미씻이 및 그 행사를 주도한 두레 조직의 형성이 마을마다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이앙법의 보급과 인구 결집이 그 주요 원인으로 작용한 것이지만 노동력의 집중적인 투입이 필요한 김매기 작업을 고려해 볼 때 이앙법 보급 이전에도 인구 밀집 지역에서는 이러한 행사와 조직이 나타났을 가능성은 충분한 것으로 판단된다.

18세기 이후의 백중날 상황은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권8, 「촌거악사(村居樂事)」가 참고되는데, 7월 칠석에는 걸립을 하고 백중날에 호미씻이 행사를 가진다고 하였다(七月七夕 作乞巧遊 是月十五日 俗稱百種日 農人放鋤 作洗鋤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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