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6권 한 해, 사계절에 담긴 우리 풍속
  • 2 세시 풍속과 사회·문화
  • 04. 세시 풍속의 변화와 지속
  • 사시제(四時祭)의 대안 중양절
정승모

중양절이란 날짜가 달의 숫자와 같은 중일(重日)에 챙기는 명절의 하나로 음력 9월 9일이다. 중일 명절은 3월 3일, 5월 5일, 7월 7일, 9월 9일 등 홀수, 즉 양수(陽數)가 겹치는 날에만 해당하므로 모두 중양이지만 이중 9월 9일만 중양이라고 하며 중구(重九)라고도 한다. 지방에 따라서는 이를 ‘귈’이라고 부르는 곳도 있다. 음력 초사흘 삼짇날 강남에서 온 제비가 이때 다시 돌아간다고 한다. 가을 하늘 높이 떠나가는 철새를 보며 한 해의 수확을 마무리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중양절은 중국에서는 한나라 이래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당·송 대에는 추석보다 더 큰 명절로 지켜졌다. 우리나라에서도 신 라 이래로 군신들의 연례 모임이 이날 행해졌으며, 특히 고려 때는 국가적인 향연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조선 세종 때에는 중삼, 즉 3월 3일과 중구를 명절로 공인하고 노인 대신들을 위한 잔치인 기로연(耆老宴)을 추석에서 중구로 옮기는 등 이 날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중양절에는 여러 가지 행사가 벌어지는데, 국가에서는 고려 이래로 정조·단오·추석 등과 함께 임금이 참석하는 제사를 올렸고, 사가(私家)에서도 제사를 지내거나 성묘를 하였다. 또한, 양(陽)이 가득한 날이라고 하여 수유(茱萸) 주머니를 차고 국화주를 마시며 높은 산에 올라가 모자를 떨어뜨리는 등고(登高)의 풍속이 있었고 국화를 감상하는 상국(賞菊), 장수에 좋다는 국화주를 마시거나 혹은 술잔에 국화를 띄우는 범국(泛菊), 또는 황화범주(黃花泛酒), 시를 짓고 술을 나누는 시주(詩酒)의 행사를 친지나 모임을 통해 가졌다. 서울 사람들은 이날 남산과 북악에 올라가 음식을 먹으면서 재미있게 놀았다고 하는데 이것도 등고(登高)하는 풍습을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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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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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양절에는 이와 같이 제사, 성묘, 등고, 또는 각종 모임이 있었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관리들에게 하루 휴가를 허락하였다. 그래서 관리들이 자리에 없기도 하였지만 또한 명절이었으므로 이날은 형 집행을 금하는 금형(禁刑)의 날이기도 하였다.

간혹 추석 때 햇곡식으로 제사를 올리지 못한 집안에서는 뒤늦게 조상에 대한 천신을 한다. 떡을 하고 집안의 으뜸신인 성주신에게 밥을 올려 차례를 지내는 곳도 있다. 전라도 한 지역에서는 이때 시제(時祭)를 지내는데, 이를 ‘귈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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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주 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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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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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조(金奉祖, 1572∼1630)는 속절 차례(俗節茶禮)로 3월 3일, 9월 9일 및 유두일 등을 들며 포, 식해, 채소, 과일 및 시물(時物)을 올린다고 하였다(『학호집(鶴湖集)』). 그러나 양수가 겹친 길일이기도 하여 지배 계층에서는 차례보다는 등고에 더 열중하였던 것 같다. 또한, 보양을 위해 국화잎을 따서 찹쌀가루와 반죽하여 국화전을 만들어 먹었고 잘게 썬 배와 유자와 석류, 잣 등을 꿀물에 탄 화채(花菜)와 술에 국화를 넣은 국화주도 담아 먹었다.

중구절의 국화술은 중국의 시인인 도연명(陶淵明)과 관련이 있다. 그가 이날 국화꽃밭에 무료하게 앉아 있는데 흰옷을 정갈하게 입은 손님이 찾아왔다. 그는 도연명의 친구가 보낸 술을 가지고 온 것이고 도연명은 국화꽃과 함께 온종일 취할 수 있었다고 한다. 고려 말의 학자 목은 이색도 중양절에 술을 마시며 도연명의 운치를 깨달았는지 “우연히 울밑의 국화를 대하니 낯이 붉어지네. 진짜 국화가 가짜 연명을 쏘아보는구나.”라는 글귀를 남겼다. 두목(杜牧)이 남긴 취미(翠微)의 시구에도 이날 좋은 안주와 술을 마련해놓고 친구들을 불러서 실솔시(蟋蟀詩)를 노래하고, 무황계(無荒戒)를 익혔다고 한다.

『고려사』에는 이날 중구연(重九宴, 重陽宴)을 열었다는 기사가 있다. 이날은 국가가 규례를 정하여 내외 신하들과 송나라·탐라(耽羅)·흑수(黑水)의 외객들까지 축하연에 초대하였다. 조선에 들어와서도 임금이 사신들에게 특별히 주연을 베풀었다. 또 탁주와 풍악을 기로(耆老)와 재추(宰樞)에게 내리고 보제원(普濟院)에 모여서 연회하게 하였다(『세종실록』 권45, 세종 11년 9월 9일).

선조 때는 예조에서 제향 절차에 대해 아뢰면서 중양이 『국조오례의』에는 속절로 열거되어 있지 않지만 이날 시식으로써 천신하는 것이 고례(古禮)이므로 속절에 해당하는 제사가 행해져야 한다고 하였다(『선조실록』 권131, 선조 33년 11월 25일).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은 『봉선잡의』에서 정조·한식·단오·중추 및 중양을 속절로 여겨 아침 일찍 사당에 들러 천식하고 이어 묘 앞에서 전배(奠拜)한다고 하였다. 이이(1536∼1584)는 속절을 정월 15일, 3월 3일, 5월 5일, 6월 15일, 7월 7일, 8월 15일, 9월 9일 및 납일로 보았다(『격몽요결』 제례당 제7).

이문건의 『묵재일기』를 보면, 조선 중기까지 사가(私家)에서는 삼짇날의 답청(踏靑)처럼 중양절은 등고(登高) 외에 간혹 간단한 천주과지례(薦酒果之禮), 즉 천신례가 있을 뿐 묘제를 행하는 한식에 비하면 속절로서 크게 중요시되지 않았다. 그는 이날 감사(監司), 성주(城主) 등과 동정(東亭)이 있는 북봉(北峯)으로 등고하여 술을 마시고 밤이 되어 파하고 내려왔다. 다음날에는 마을에서 촌회(村會)가 열렸다. 촌 노인과 그 자제 등 20여 명이 임정(林亭)이라는 정자에 모였는데, 각자 과반(果盤)을 준비하였으며 음식이 매우 맛있고 술도 떨어지지 않았으며 기녀와 악공들을 불러 노래를 연주하면서 종일 작주(酬酌)하였다. 그도 해가 떨어져서도 술을 계속 마셨고 춤도 추다가 늦게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후기에 들어와 삼짇날과 중양일이 함께, 또는 둘 중의 하나가 원래 중월(仲月)에 복일(卜日)하여 행하던 시제의 한 축으로 설정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중양절의 시제는 조선 후기 이후 특히 영남 지방에서 부조묘(不祧廟)를 모신 집안들을 중심으로 행해져 왔다. 유교 제례에서는 사대봉사(四代奉祀)라고 하여 4대가 지나면 사당에 모 시던 신주를 묘에 묻게 되어 있으며 나라에서 부조(不祧), 즉 묘를 옮기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이 있어야 사당에 신주를 두고 계속 기제사로 모실 수 있다. 이 부조가 인정된 조상에 대한 시제는 각별히 중일(重日)을 택하여 삼월 삼짇날이나 구월 중양절에 지내는데, 특히 중양 때가 되어야 햇곡을 마련할 수 있어 첫 수확물을 조상에게 드린다는 의미도 갖는다. 그러나 대부분 지방에서는 중양절 행사로 기로회나 중양등고(重陽登高)라고 하여 산에 올라가 양기를 즐기는 일이 많았고 이에 따라 중양회(重陽會)리는 모임도 생겨났다.

김매순(1776∼1840)은 조선 전기까지는 시제보다 기제를 중요하게 여기다가 중엽에 이르러 사대부들이 시제를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는데 일년 4회의 시제가 부담되었으므로 이를 춘추 2회로 줄여 봄에는 삼짇날에, 가을에는 중양절에 지내는 자가 많아졌다고 하였다(『열양세시기』 3월 3일, 9월 9일). 또한, 추석이 햇곡으로 제사지내기 이른 계절이 되어감에 따라 추수가 마무리되는 중양절에 시제를 지내는 등 논농사의 발전에 따라 등고 놀이보다는 조상을 위하는 날의 의미를 더해갔다.

지금도 영남 지방에는 중양절에 불천위 제사를 지내거나 성묘를 하는 집안들이 있지만 대부분의 지방에서는 찾아보기 힘들고, 과거의 등고나 상국 등의 중양절 고유의 풍속 역시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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