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6권 한 해, 사계절에 담긴 우리 풍속
  • 3 세시 풍속과 생업: 생산
  • 04 생업과 세시의 장기 지속과 단기 지속
  • 2월
  • 문헌 속의 2월 세시와 생업
주강현

【2월 1일 노비일과 화간(禾竿)】

본디 음력 2월 1일은 머슴날·노비일, 혹은 하아드렛날이라고 불렀다. 지역에 따라서 명칭의 차이가 있지만, 이날은 농민의 날로서 농사가 시작되는 기점이 되었으며, 볏가리를 쓰러뜨리는 풍습이 곳곳에서 행해졌다.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이날은 농민들이 모여서 일년 농사의 대소사를 논의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대보름축제가 끝나면서 이날을 마지막으로 농사철에 들어간다.

볏가리는 유지방·유지봉·유지·오지붕·유지방이·유구지·횃대·보름대 등으로 지역에 따라 이름도 다양하다.80) 秋葉 隆, 「巨濟島 立竿民俗」, 『朝鮮民俗』 1, 1933. 영등할머니를 모시는 풍신(風神)과 연결짓기도 한다. 실제로 볏가리 쓰러뜨리는 날은 영등할머니가 오는 날이기도 하였다.81) 宋錫夏, 「風神考」, 『震檀學報』 1, 1934. 禾竿의 立竿民俗으로서의 祈豊을 영등 할머니 풍습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宋錫夏는 평안북도 강계에서 쥐저리(낫가리 꼭대기에 세우는 것)를 장대에 꽂아서 마당 여러 장소에 세워두고 행하는 祈豊이 남한의 볏가리와 같다고 하였으며, 『京都雜志』 禾積이 같은 종류라고 보고하고 있다(宋錫夏,「朝鮮民俗槪觀」, 『新東亞』1935년 12월∼1936년 8월). 영등할머니는 농사에 극히 해로운 2월 바람과 관계있다. 당대 농민들은 푄(Föhn) 현상을 구체적으로는 몰랐을지라도, 이미 그러한 현상이 계절적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체득하고 있었다. 농민들은 농사에 피해를 주거나 고기잡이 배를 뒤집어 버리는 바람같이 인간 생존을 위협하는 자연에 대해서 준비를 게을리하면 안 되었다. 그 대응책이 영등신(靈登神)이다.

『동국세시기』에, “영남 지방 풍속에 집집마다 신을 제사 지내는데 영등신이라 한다. 무당이 영등신이 내리었다고 마을을 돌면 사람들은 다투어 맞이하여 즐긴다. 이달 초하루부터 사람을 꺼리어 교접하지 않는데, 15일, 혹은 20일까지 간다.”고 하였다. 제주도 풍속에 는 2월 초하룻날 귀덕(歸德)·금녕(金寧) 등지에서 장대 12개를 세워 놓고 신을 맞이하다가 제사를 지냈으니, 이를 영등이라고 하였다.

조선 후기의 이옥(李鈺)은 영등신(影等神)이라 표기하고 나서, “매년 2월 길일에 집집마다 영등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3일 전에 문에 붉은 흙을 깔아 사람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그날 닭 울기 전에 집 식구들이 새 옷을 갈아입고서 마당에 밥·국·인절미·떡·술·어육·나물을 정갈하게 차려 놓고 대나무로 제사 지낸 곳에 한 나무를 세우고, 그 위에 찬물을 올리고 매일 아침 새물로 바꾸기를 15일까지 한다. 집안에 질병이 없고 풍년이 들며 재물이 느는 것은 모두 신이 내려준 것이라 한다. 영남 읍민 모두가 제사를 지낸다. 그 지방 사람들의 말에 옛날에 영등신을 섬기기를 심히 엄히 하여 고을 원님이 고을을 위해 복을 청하는데 원의 부인이 방 가운데 앉아서 기다리고 있으면 밤중에 분명히 느끼는 것이 있어, 신이 가고 나면 땀이 옷에 젖었다. 대개 옛 두두리류(豆豆里類)로 음사(淫祠)의 귀신이다.”고 자세하게 적어 놓았다.82) 李鈺, 『鳳城文餘』 : 金均泰, 「李鈺의 傳統文化에 대한 再認識」, 『李鈺의 文學理論과 作品世界』, 創學社, 1991, pp.241∼268. 이들 영등은 그 지역 명칭에 따라 영동할만네·영동할맘·영동할마니·영동할마시·할마시·영동바람·풍신할만네·영동마고할마니 등 여러 명칭이 존재하였다.83) 宋錫夏, 앞의 논문, p.97.

왜 민간에서 그토록 2월 1일을 중시하였던가는 영등신과 바람으로 말미암아 보다 분명해진다. 그렇다면 볏가리 풍습과 2월 1일 풍습은 조선 후기에 이룩된 것일까. 무엇보다 조선 전기의 내농작(內農作)이 바로 민간의 볏가리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연려실기술』에서 내농작에 관해, “우리나라 풍속에 정월 보름날 볏짚을 묶어서 곡식 이삭과 같이 만들어가지고 비를 매달아 열매가 많이 맺은 형상을 만들어 나무를 세우고 새끼로 얽어매서 그 해의 풍년을 비는 것이다. 대궐 안에서는 나라의 풍속으로 인하여 약간 그 제도를 번잡하게 하여 『시경(詩經)』 7월편에 실려 있는 인물의 형상을 모방하여 밭 갈고 씨 뿌리는 형상을 만들어 놓았다고 하였 다. 처음에는 기교를 자랑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역시 근본에 힘쓰고 농사를 중히 여기는 뜻이었다.”고 하였다.84) 『燃藜室記述』 別集 12卷, 俗節雜戲. 이미 조선 전기의 여러 기록에 국가적인 내농작 풍습이 궁궐에서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현존 문헌 가운데 볏가리에 관한 한 연대가 높이 올라가는 확인 가능한 자료는 이자(李耔)의 『음애일기(陰崖日記)』다. 이삭 달린 비를 결박하여 나무에 걸어 기풍하던 주술적 행사라고 하였으니 후대의 화간과 비슷하다고 하였다.85) 陰崖 李耔 撰, 『陰崖日記』. 일기는 중종 4년(1509) 시작하여 중종 11년(1516)까지 마쳤는데, 농사에 관한 舊俗이 실려 있다. 일기 내용은 연산군 시대의 것으로, 200여 년을 지나서 이광사(李匡師)의 문집에서 다시 등장한다.

영조 38년(1762) 전라남도 신지도로 귀양가서 죽은 이광사가 읊은 섬의 여러 풍속 중에 볏가리대에 관한 시가 전해진다. 농한기면 사람들이 모여서 볏가리를 세우고 이웃을 청하여 웃어른으로 삼는데 구경꾼이 모여들어 동네 잔치가 열린다. 과거 급제하려는 사람이 없고 순박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볏가리 풍습이 오래도록 이어져왔다(流風久相襲)고 하였다.86) 李匡師(1705∼1777)는 시에서 “村村植候桓 農閒盛萃習”이라 하여 볏가리를 候桓으로 부르고 있다.

이광사의 기록에서 몇 십 년이 경과한 시기인 『경도잡지(京都雜志)』(1779)에도 노비일이 등장한다. 보름날 세웠던 화간(禾竿)을 내려 솔잎을 겹겹으로 깔고 떡을 만들어 노비에게 먹인다고 하였다. 나이 수대로 먹이므로 속칭 이날을 노비일이라 하였다. 농사일이 이때부터 시작되므로 이 족속에게 먹이는 것이라고 하였다.

유만공의 『세시풍요』에도 긴 장대를 세워 쌀주머니를 걸고 볏집을 묶어 씌우고 높은 창고를 만들어서 비는 것은 화간이라고 하였다. 2월 1일 벼장대에서 쌀을 내리고 곡식을 더해서 떡을 만들어 빌고, 여종들로 하여금 나이에 따라서 먹게 하고 이르기를 종날이라 하고, 이날에는 집안 먼지를 털어낸다고 하였다.87) 柳晩恭은 긴 장대를 세워 쌀주머니를 걸고 볏집을 묶어 세우고 높은 창고를 만들어 비는 것을 禾竿이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다(林基中 譯註, 『歲時風謠』, 集文堂, 1994). 또 “하얗게 깎아 세운 화간이88) 『세시풍요』에서는 친절하게 화간에 관한 설명을 하고 있다. “긴 장대를 세워 쌀주머니를 걸고 볕집을 묶어 씌우고 높은 창고를 만들어서 비는 것을 화간이라고 한다.” 하늘을 찌를 듯하니, 시골 농가에서 멀리 풍년을 기원한 것이다. 집집마다 곡식 쌓기를 능히 원하는 바와 같이 한다면 만 길이 되어서 장차 석름봉(石廩峰)과 같을 것이다.”고 노래하였다. 『세시풍요』 2월 1일 조에서는, “농사를 짓는 길한 날에 처음 볕이 따뜻하니 장대 머리에서 흰밥주머니를 내린다. 늙은 여종들은 부지런히 물 뿌리고 쓰는 것을 사양하지 마라, 가장 많이 덕을 나누어주어 주린 창자를 배불리 해주마.”라고 하였다.

『동국세시기』(1849)에도 ‘속칭시일위노비일(俗稱是日爲奴婢日)’이라고 하여 송편 먹기, 볏가리 쓰러뜨리기 행사가 보인다. 정월 보름날에 세워 두었던 화간에서 벼를 내려 흰떡을 만들어 먹는데 큰 것은 손바닥만 하게, 작은 것은 달걀만 하게 해서 모두 둥근 옥의 반쪽 옥 모양 같게 만들었다. 찐콩으로 소를 하고, 시루 안에 솔잎을 겹겹이 깔고 쪄서 꺼내어 물로 씻고 참기름을 발랐는데, 이를 송편(松餠)이라고 하였다. 종들에게 나이 수대로 송편을 먹인다고 하였다. 농삿일이 이때부터 시작되므로 일꾼에게 먹이는 것이라고 하였다.89) 『東國歲時記』, 朔日條.

조수삼의 『세시기』 2월 1일조에 따르면, 정월 15일에 긴 장대를 뜰 가운데에 세우고나서 그 꼭대기에 고개(藁稭)를 다는데, 이를 화균이라 한다. 이날이 되면 송병편으로 제사를 지내고 장대를 치우는데, 이것으로 한 해의 풍년을 축원할 수 있다고 한다.90) 조수삼, 『歲時記』, 2월 초1일.

『세시잡영』에는, “10자의 긴 장대 사람처럼 서있고 꼭대기에 묶은 풀 바람에 날린다. 부잣집 사람들이 땅 대부분 기름지니 해마다 곡식이 잘 익기를 기원한다. 달구지에 실어온 볏단 집안에 가득하여 닭이나 개조차 먹을 만큼 넉넉하다. 가난한 집 송곳 꽂을 땅도 없으니 지붕 위에 어떻게 장대를 세우리요. 부잣집 닭과 개에게도 미치지 못하니 종일토록 일을 해도 먹지를 못한다. 가난한 사람들아 부잣집 장대를 부러워말라. 눈 깜짝할 사이에 입장이 바뀐다. 지난해 동쪽 집에 세운 장대가 올해 다시금 서쪽 집 지붕에 있네. 해마다 장대는 세우고 내리지만 평생 바라는 일 뜻대로 되지 않구나. 어느 때에나 다시 균전법(均田法)이 행해져 마을마다 집집마다 장대 높이 세울까나.”고 하였다.

이로써 최소한 16세기로부터 19세기 문헌에 걸쳐서 2월 1일 풍습이 나타나고 있다. 조선 후기 자료에는 한결같이 노비일이라고 표현되고 있는데, 순전한 의미에서의 노비만을 지칭하는 뜻은 아니었을 것이다. 후대의 자료를 살펴보면 머슴일로 등장하며, 전라도에서는 하아드렛날 같은 고유의 명칭과 행사를 마을 전체에서 열었다. 물론 일제강점기의 민속지나 해방 이후의 민속지에서도 2월 1일 풍습은 여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무라야마 지준이 일제강점기 말기에 조사한 자료는 충청남도 지방뿐 아니라 강원도 지방에서도 2월 초하루 풍습이 나타난다.91) 村山智順, 『朝鮮の鄕土娛樂』, 朝鮮總督府, 1942. 연기 지방은 정월 보름, 벼 12되를 포대에 넣어 긴 장대에 매달고 새끼줄을 세 가닥으로 당겨 매서 쓰러지지 않도록 한다. 2월 초하룻날 벼를 내린다. 이때 농악을 연주하고 술과 음식으로 함께하며 서로의 풍년을 기원한다. 홍성 지방은 농악을 치면서 마을의 유복한 집을 찾아간다. 긴 장대 끝에 짚단을 단 禾積을 찾아간 집의 처마 끝에 세워놓고 농악을 치면서 풍작을 축원하며 마당돌기를 한다. 화적이 세워진 집에서는 마을 사람들에게 술과 음식을 접대하며, 이날 하루를 농악 치면서 즐겁게 보낸다. 서산 지방은 정월 보름, 마을의 큰 마당이나 넓은 밭에 높이 9m 정도의 장대를 세워서 그 끝에 짚단을 매달고 아래에 벼 이삭을 늘어진 것처럼 보이도록 새끼줄을 여러 개 달아매서 사방으로 뻗치게 한다. 횡성 지방은 新年禾積으로 각종 곡식의 모양을 만들어 마당 한 구석에 세워둔다. 이미 아키바(秋葉隆)가 거제도에서 입간(立竿)을 보고하고 있으므로 경기·강원을 한계선을 하는 중남부 수도작 지대의 보편적인 관습이었음이 확인된다.

【2월 6일】

확대보기
좀생이 별
좀생이 별
팝업창 닫기

좀생이 별 점은 2월 6일을 정하여 전국적으로 이루어지던 대표적인 별 점이다. 『동국세시기』에, “6일에는 소성(小星)을 보고 그 해의 풍흉을 점친다. 소성은 모두성(旄頭星)인데 세속의 이름이다. 소성이 달과 가까우면 그해 풍년이 들고 멀먼 그 해에 흉년이 든다고 한다.”고 하였다.92) 조수삼, 『歲時記』, 2월 초6일. 『한양세시기』에도, “6일 밤에는 묘성(昴星, 좀생이 별)이 달의 앞에 있는가 뒤에 있는가를 살펴서 그 해의 풍흉을 점친다. 달을 밥이라 하고 묘성을 아이라고 하는데, 아이가 굶주리면 밥을 먹고 싶어하여 빨리가고, 배 부르면 천천히 가며, 배고프지도 않고 배부르지도 않으면 빨리 가지도 않고 천천히 가지도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달보다 앞에 가면 흉년이 들고 뒤에 가면 풍년이 들며 나란히 가면 평년이다라고 한다. 이 달이 흰나비보다 더 희면 근심스러운 일이 있을까 걱정한다.”고 하였다. 『열양세시기』에는, “농가에서 초저녁에 묘성과 달의 거리의 원근으로써 세사를 점친다. 이 별이 달과 병행하거나 촌척 이내의 거리를 가지고 앞서가면 길조이고, 만일 선후 거리가 너무 떨어져 있으면 그해에 흉년이 들어 어린애 양육조차도 어렵다. 시험해보니 제법 맞는다.”고 하였다.

다양한 세시기에 두루 좀생이 별점이 등장함은 당대에도 보편적 세시였음을 웅변한다. 『농가월령가』는 단정적으로 “초 6일 좀생이는 풍흉을 안다.”고 하였다. 『세시풍요』도 노농의 말을 빌려서, “눈썹같은 달이 예쁘고 예쁘게 비로소 광채를 토하니 묘성이 달을 따라다니는 것이 귀고리와 같구나. 늙은 농부가 머리를 들고 흔쾌히 서로 말하면서, 경술년 풍년이 또한 팔방에도 든다.”고 하였다. 『농가십이월속시』에 이르길, “초엿새 뜨는 달은 좀생이와 견주어서 앞서가고 뒤에 감에 풍년 흉년 생겨나네. 진실로 신묘한 징험이 있으나 스무날 개임과 흐린 비교함이 제일이네.”라고 하였다. 좀생이란 28숙 중 묘성의 속명으로 서양에서는 폴레아데스라고 하는 작고도 오밀조밀한 많은 별무리 이름이다. 그 별이 조선시대 농민들에게 가장 소중한 별이었다.

그런데 문헌에 따라서는 간혹 2월 7일을 중시하는 경우도 있다. 『해동죽지』에, “옛풍속에 2월 7일 밤 낭위성(郎位星)을 보아 달 뒤로 한길쯤 떨어져서 뒤따르면 풍년이 들고, 달 앞에 한 길쯤 앞서서 가 면 흉년이 든다고 하니, 이를 ‘좀생이 본다.’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동국세시기』 2월의 월내에 거론된 삼성점(參星占)도 초저녁에 삼성이 달 앞에 있고 고삐를 끄는 것 같이 멀리 떨어져 있으면 풍년이 들 징조라고 하였다.

【2월 20일】

『세시풍요』에는 2월 20일을 백화생일(白花生日)이라 불렀다. “잉태하는 소식을 뭇 꽃봉오리에 물어보니, 난옥(蘭玉)이 정원에서 길상을 빚어낸다. 모란꽃 예쁜 모습이 일제히 웃을 줄을 아니, 천추의 좋은 계절에 화왕(花王)을 경축한다.”고 하였다. 한편으로 2월 20일을 할미조금이라 칭하였다. 한마조감(旱魔潮減)이라고 칭하는데 이것이 와전이 되어 노구조감(老嫗潮減)이라고도 하였다. “자주 자주 오는 봄비가 농가를 즐겁게 하나, 손이 크니 장차 며느리와 아들이 어떠할꼬, 한마조금한 날이 무섭지 않으니, 까막 구름이 하늘가에서 솔개처럼 지나간다.”고 노래하였다. 『동국세시기』 월내에도 “20일에 비가 오면 풍년이 들고 조금 흐려도 길하다.”고 하였다.

【영등바람】

『금양잡록』에 우리나라 동쪽은 언제나 남쪽 바람이 불면 큰비가 오고 북쪽 바람이 불면 오래도록 맑은 날씨가 계속된다고 하였다. 동쪽 바람은 농사에 해롭다. 바람이 산을 넘어오면 한냉한 까닭에 곡식이 잘 자라지 않나니 그 이치를 영동쪽의 어리석은 백성들은 잘 알리오. 동풍이 크게 불면 도랑물이 넘쳐서 모두 감수되고 백가지 곡식이 모두 마르며 적게 불면 곡식의 이삭을 쌓은 잎이 말려서 급히 이삭을 패게 할 뿐 아니라 구부러지고 겹쳐서 신장하지 못하도록 한다. 영등바람은 농사에 대단히 중요하였다.

확대보기
제주 영등굿
제주 영등굿
팝업창 닫기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