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6권 한 해, 사계절에 담긴 우리 풍속
  • 3 세시 풍속과 생업: 생산
  • 04 생업과 세시의 장기 지속과 단기 지속
  • 7월
  • 문헌 속의 7월 세시와 생업
주강현

【7월7일 칠석놀이】

『해동죽지』에 칠석놀이를 이르길, “옛 풍속에 7월 7일은 시인 문사들이 산이나 물가 정자에서 더위를 피하며 마음껏 마시고 거나하게 취하니 이를 ‘칠석노리’라고 한다.”고 하였다. 과연 시인 문사들만 그러하였을까. 대개의 문헌에서 적기하지 않고 있으나 칠석놀이의 주역은 역시나 세벌 김매기를 끝낸 농민들이다.

【7월 15일 백중】

칠석과 백중은 두레의 가장 큰 행사가 펼쳐졌던 절기다. 그러나 정작 문헌상으로 양 절기와 두레 관련 기록은 제대로 나타나지 않는다. 문헌상으로 칠석보다는 백중이 더 중요한 행사로 취급되었으며, 이는 불가의 우란분재(于蘭盆齋)에 기인하는 바 크다.98) 현재 제주도에 남아 전승되고 있는 농경기원신화 세경본풀이의 내용이 백중과 일치하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 백중이 원래는 농신, 또는 농경과 관련된 祭日이었던 것이 후대에 불교의 우란분회의 영향으로 원래의 민속적 의의를 잃게 되었다고 보는 견해이다(이수자, 「백중의 기원과 성격」, 『韓國民俗學』 25, 民俗學會, 1993). 이 견해를 따른다면, 조선 후기에 백중 명절이 농경 세시로서 다시금 강력하게 대두된 것은 애초의 농경적 기원을 바탕으로 새롭게 농민 축제화한 것으로 여겨진다. 칠월 칠일과 칠월 보름이 절기로 자리 잡은 역사는 매우 오래다.

17세기 김육(金堉)의 『송도지(松都誌)』에는 7월 15일을 ‘백종(百種)’이라 부르고 있다. 남녀가 주식(酒食)을 차려 놓고 삼혼(三魂)을 부르며, 우란분재에서 기원한 고풍이라고 하였다.99) 金堉, 『松都誌』(1618), “七月十五日謂之百種男女傾家上山設酒食招三魂此則盂蘭薺之古風.” 『송남잡지(松南雜識)』에서는 ‘백종(百種)·백중(白中)’을 병기하고 있다.100) 趙在三, 『松南雜識』, 歲時類. 『규합총서(閨閤叢書)』·『이운지(怡雲志)』·『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101) 『慵齋叢話』 卷2. ‘백종(百種)’으로만 명기된다. 『연려실기술』에는 7월 15일은 속칭 ‘백종(百種)’이라 부르며 백종에는 승려들이 백 가지의 화과(花菓)를 갖추어서 우란분(于蘭盆)을 설치하고 불공한다고 하였다. 조수삼이 찬한 「세시기」에도 ‘백종(百種)’이라 불렀으며, 백곡이 모두 익어간다는 말로써 이날의 풍속은 유두와 같다고 하였다.102) 조수삼, 『歲時記』 7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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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 백중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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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양세시기』는 백종절이라고 하여, 중원일(中元日)에는 백종의 꽃과 과일을 부처님께 공양하며 복을 빌었으므로 그날의 이름을 백종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하였다. 『동국세시기』는 『형초세시기』를 그대로 인용하여 백종일이라 부르고 있다. 사찰에서 행하는 우란분회와 달리 민간에서는 망혼일(亡魂日)이라 하여 중원(中元)에 여염집에서 저녁 달밤에 채소·과일·술·밥을 갖추어 죽은 어버이 혼을 부른다고 하였다.

한편, 충청도 풍속에 15일에는 노소가 저자로 나와 마시고 먹으며 즐길 뿐더러 씨름놀이도 하고, 경사대부 집에서 초하룻날이나 보름날에 조생벼를 사당에 천신한다고도 하였다.103) 『東國歲時記』 七月條, “湖西俗 以十五日老少出市 飮食爲樂 又爲角力之戲 卿士家薦早稻 多因朔望行之.” 『경도잡지』에서도 백종절이라고 하였으며, 서울 사람들은 성찬을 차려서 산에 올라가 가무를 즐겼다고 하였다. 백종은 백 가지 맛을 이르는 것이다. 혹은 백가지 곡식의 씨를 중원에 진열하였으므로 백종이라고 한다고 하면서 이는 황당무계한 설이라고도 하였다.104) 『京都雜志』 中元條, “俗稱百種節 都人盛設饌 登山歌舞爲樂 …… 或云是日舊俗陳列百穀之種 故曰百種無稽之說也.”

20세기 초 장지연의 『조선세시기』에서 속칭 ‘백종절’이라 하고 ‘백중’이라 하였다. 도인(都人), 사녀(士女)가 주찬(酒饌)을 성대하게 차리고 산에 올라가 가무로 놀이를 하니 그 풍속이 신라·고려부터의 풍속이라고 하였다. 숭불로 인해 우란분공을 위하여 백종의 채소와 과일을 구비하였던 탓으로 백종이란 말이 생겼다고도 하고, 혹은 백곡지종(百穀之種)에서 나왔다고는 하나 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대부분 ‘백종’이라 기술하고 있으며, 『열양세시기』의 기사처럼 한여름의 풍성한 백가지 수확물을 연상하고 있다. 그러나 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논하는 것으로 보아 확실한 근거는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아울러 ‘百中·白中’이란 말도 같이 쓰이고 있다. 『동국세시기』로 미루어 백중놀이가 상당히 퍼졌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칠석과 백중이 두레의 가장 큰 명절이었음에도 지배층의 기록에는 자세하게 나타나지 않고 있다.

【7월 월내의 후농제사】

신라 풍습에 입추 후 해일(亥日)에 산원(蒜園)에서 제사를 지내는 바, 여러 예전을 검토해 보니 단지 선농에만 제사지내고 중농과 후농은 없다고 하였다.105) 『三國史記』 卷32, 雜志1, 祭祀.

【7월 월내의 산천제】

파사니사금 가을 7월에 누리가 곡식을 해치므로 왕이 두루 산천에 제사지내어 그것을 물리치도록 하니 누리가 없어서 풍년이 들었다고 하였다.106) 『三國史記』 卷1, 新羅本紀1, 婆娑尼師今 30년.

【7월 월내의 사당천신】

『동국세시기』에 “경사대부의 집에서는 조생의 벼를 사당에 천신한다. 초하룻날이나 보름날에 이를 많이 행한다.”고 하였다.

【7월 월내의 새쫓기】

『세시풍요』에, “벼와 수수가 처음 익어서 곡식이 구름같으니, 새를 모는 채찍소리가 사방에서 들린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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