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6권 한 해, 사계절에 담긴 우리 풍속
  • 4 세시 풍속과 종교
  • 02. 불교와 세시 풍속
  • 연등회와 팔관회
  • 1. 연등회(고려)
진철승

본디 연등, 혹은 등놀이는 원시 사회 이래 불을 다루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전승되던 고유의 생산 의례이자 놀이였다. 특히, 이 놀이는 전등의 발명 이전에는 초롱에 촛불을 켜서 다양하게 장식하는 방법이 좋았다.115) 전장석, 「등놀이와 불꽃놀이」, 『조선의 민속놀이』, 푸른숲, 1988, pp.90∼96. 등놀이는 삼국시대 불교의 유입과 더불어 불교적 등공양과 결합하여 연등회라는 국가적 행사로 정착되었으며 신라 때에는 주로 정월 보름에 국가적 호국 신앙의 일환으로 황룡사 등에서 거행되었다.

고려 때에는 태조의 훈요십조에 의해 팔관회와 더불어 국가적 행사로 거행되었다. 처음 연등회는 정월 보름에 개최되었으며 이를 상원(上元)연등이라 하였다. 987년(성종 6)부터는 번거롭고 요란스러 울 뿐 아니라 막대한 경비가 소용된다는 이유로 22년 간 중지되었으나 1010년(현종 1)에 다시 부활되었다. 이때는 2월 보름에 행사를 치렀는데, 이후 130년간 변함없이 개최되었으며 이월 연등으로 불리었다. 이후에는 선왕(先王)의 기일(忌日) 등의 이유로 정월에 열리기도 하였으며, 고려 말까지 지속되었다. 정월 연등이나 이월 연등 외에도 사찰의 낙성식이나 왕가의 행사시에는 거대한 특별 연등회가 개설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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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암사 연등
봉암사 연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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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은 연등회는 소회일(小會日)과 대회일(大會日)로 나뉘어 열렸는데, 소회일에는 임금이 태조의 사당이 있는 봉은사에 가서 참배하였다. 소회일 다음날 밤에는 대궐 안에 수많은 등을 달고 술과 다과를 베풀면서 음악과 춤과 연극을 진행하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왕과 신하가 다 함께 즐기는 한편 부처와 천지신명을 아울러 즐겁게 하고 국가의 태평과 왕실의 안녕을 빌었다.116) 안계현, 『한국불교사연구』, 동화출판공사, 1982, pp.225∼228.

한편, 정월의 연등에 대해 불교적 기원을 부인하는 주장들이 있는데, 하나는 정월 연등은 중국의 상원 장등(上元張燈)에서 유래하였으며, 연등회가 지닌 새신적(賽神的) 유풍은 후세의 토속으로서의 풍신제(風神祭, 제주의 영등굿 등)로 나타난다고 하는 설이며,117) 김택규, 『한국농경세시의 연구』, 영남대학교 출판부, 1985, p.250. 다른 하나는 정월 연등은 상고부터 전해오던 곡령하강일(穀靈下降日)인 상원에 중국의 상원장등이 겹쳐졌다고 보아 정월 연등 자체가 고유의 농경 세시 풍속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118) 김태곤, 『한국민간신앙연구』, 집문당, 1987, pp.341∼343. 그러나 이처럼 불교 관련에 대해 부인하고 고유한 농경이나 중국 풍속의 모방이라는 주장은 각각 일면의 타당성은 있으나 역사적 경과를 무시하고 그 기원에만 집착하는 단점이 있다. 아마도 정월이나 이월 연등은 고대로부터의 한국의 농경 리듬과 연관된 신년 의례, 그리고 국가적으로 지원받던 불교적 신앙 절기 등의 요인이 중첩되어 형성되었을 것이다.119) 안계현, 앞의 글, 1982, pp.214∼215.

연등은 정월이나 2월 보름에만 행해졌던 것이 아니고, 각종 불사나 법회 시 수시로 행해지던 행사였다. 또한, 고려 중후기에는 4월 8일 부처의 생일을 경축하며 연등을 하기도 하였으며, 이는 고려 후기와 조선시기 사월 초파일의 민속화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려 전 기간에 걸쳐 가장 화려하고 성대한 연등 행사는 연례행사였던 정이월의 연등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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