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6권 한 해, 사계절에 담긴 우리 풍속
  • 4 세시 풍속과 종교
  • 02. 불교와 세시 풍속
  • 불교의 주요 월별 풍속
  • 2. 사월 초파일
진철승

사월 초파일의 연등 행사에 관해서는 고려 의종(1147∼1170) 때 내시였던 백선연(白善淵)이 관세음보살의 화상을 만들어 모시고 수많은 등을 달아 불덕을 찬양하였다는 기록이 최초이다. 이후 고종 32년(1245)에 당시의 집권자였던 최우가 불탄일을 경축하며 연등을 하고 각종 놀이를 하였다고 하며, 공민왕은 사월 초파일 연등 때 어린이들을 궁중으로 불러 민간에서 성행하던 호기(呼旗)놀이를 하게 하였 다고 한다. 호기놀이란 초파일이 가까워지면 어린이들이 사월 초파일 연등에 쓸 비용이나 재료를 얻기 위해 종이를 오려 만든 기를 장대에 메고 떼를 지어 두루 거리를 누비고 다니는 풍습으로 초파일 행사의 대중성을 증명해준다.121) 전장석, 「등놀이와 불꽃놀이」, 『조선의 민속놀이(1964)』, 푸른숲, 1988, pp.92∼93.

그러나 사월 초파일이 보다 본격적인 민간의 명절로 된 것은 오히려 억불의 조선시대였다. 조선시대에는 큰 도시나 장시의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대규모 연등 행사를 벌이곤 하였는데, 이를 보고 즐기는 것을 관등(觀燈)놀이라 하였다. 왕실이 중심이 된 고려 시대의 연등이 정월이나 이월에 행해진 것과 달리 민간에서 부처님 탄신일과 결합되어 사월 초파일에 행해진 것은 이 시기가 힘든 농사일에서 한숨 돌리고나서 도시나 장시에 나와 여름 차비를 하거나 구경을 하기에 적당한 시기였던 때문으로 짐작된다. 초파일의 민속 행사를 단순히 부인네들 중심의 연등 행사로서 농경 세시와 별 관계가 없고, 농부들에게는 단지 ‘노는 날’로 통할 뿐이라는 주장도 있다.122) 주 7)과 같음.

조선시대에는 초파일 등놀이가 서울, 개성, 평양 등 유명한 옛 도읍과 황해도 평산과 신천, 경기도 수원, 충청도 논산 등에서 대단한 성황을 이루었다. 이러한 대도시에서의 연등 행사를 보는 것은 대개의 지방민들에게는 평생의 소원이어서 관등에 얽힌 효도 설화는 현재까지도 많이 전해지고 있다. 등은 각종 동식물의 형상을 본떠 만든 등 외에도 일월등, 종등, 북등, 칠성등, 오행등 등 다양한 종류가 있었으며, 수복, 태평, 만세와 같은 글씨를 써 넣기도 하였다. 또 등 안에 빙빙 돌아가는 장치를 만든 다음 개나 매 등이 사슴이나 노루 꿩 등을 쫓는 모습을 종이로 오려서 그에 붙이면 바람결에 그 모습이 그림자로 비춰 나오는 영등(影燈)놀이도 성행하였다. 평양에서는 종로거리가 불꽃바다를 이루었고, 모란봉이 등산(燈山)으로 변하였으며 대동강은 방석불로 장식한 배가 강물과 어울려 그림과 같이 아름다왔다고 한다.123) 주 11)과 같음.

이같은 민속 명절로서의 사월 초파일 행사는 일제강점기에 금압되고, 일본식 양력 초파일 행사인 하나마츠리가 강제되면서 그 명맥이 거의 끊어졌다. 그러나 억압에도 불구하고 음력 사월 초파일에 목련존자 등 현대적 창작 연극이나 전승되던 그림자극인 망석중놀이를 공연하는 등 초파일의 축제 분위기가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았다. 해방 후에는 단순한 법요식과 제등 행렬 등에 머물다가 1990년대 이후 ‘연등 축제’라는 명칭으로 사월 초파일을 현대의 대중적 축제로 거듭나게 하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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