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6권 한 해, 사계절에 담긴 우리 풍속
  • 4 세시 풍속과 종교
  • 02. 불교와 세시 풍속
  • 불교의 주요 월별 풍속
  • 3. 백중(우란분절)
진철승

해마다 7월 15일이면 어느 절에서나 우란분재(盂蘭盆齋)를 지낸다. 우란분재는 『우란분경』에 “목련존자가 그 어머니를 아귀도에서 구하기 위해 부처의 가르침을 받아 7월 15일 안거자자일(安居自恣日)에 여러 가지 음식, 과일, 등과 초 등 공양구를 갖추어 여러 승려들을 위해 공양을 베푼” 유래에 따라 매년 음력 7월 15일에 지옥과 아귀보를 받는 중생은 물론 현세의 부모와 7세의 부모를 위해 올리는 불사를 뜻한다.

우란분절은 부처의 일생과 관련된 4대 명절과 더불어 당당히 불교계 5대 명절의 반열에 들어 있다. 이는 불교 세시에서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우란분절의 의미와 위상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즉, 유교가 중심적 이념으로 자리잡고 있는 동북아 문화권에서 부모님에 대한 효도와 조상 천도가 지니는 의미가 남다른 것이다.

우란분절의 소의경전이라 할 만한 『우란분경』은 범문 원전은 없고 서진 축법호 역의 『불설우란분경(佛說盂蘭盆經)』과 기타 역자를 알 수 없는 『불설보은봉분경(佛說報恩奉盆經)』 등이 전한다. 700여 자의 짧은 경전이다. 우란분의 원어는 ullambana로 avalambana(거꾸로 매달림)의 속어형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도현(倒懸)이나 구도현(救倒 懸)이라 의역되며, 오람바나(烏藍婆拏) 등으로 음사되기도 한다. 『현응음의(玄應音義)』에는 “외서(外書)에는 선망죄(先亡罪)라는 것이 있는데, 가문이나 후사를 잇지 못할 때 인간이 신에게 제사하여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면, 곧 귀신이 사는 곳에 떨어져 거꾸로 매달리는 고통을 받는다고 말하는데, 부처님도 이러한 세속에 따라 제의(祭儀)를 세워…”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외서란 마하바라타나 마누법전의 해당 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로 미루어 우란분경의 핵심 내용은 인도에서 작성되고, 후에 중국인이 이에 가필하여 오늘의 모습으로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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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란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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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 이 우란분재가 설행되었던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인도에서는 지옥에 떨어진 부모를 공양하면 자신의 사후에 그 일체의 공덕을 받는다는 속신은 있었다. 이러한 사고 방식이 중국의 효친 관념과 결합하여 돌아가신 부모의 천도 법회로서 특히 발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찍이 남북조 시대에도 우란분회가 설행된 것은 “중원일(中元日)에는 승니(僧尼)·도사(道士)·속인(俗人)들이 모두 분(盆)을 만들어 이것을 절에 바친다.”는 『형초세시기』 등의 기록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 우란분회가 가장 성행하였던 것은 당대이다. 당 고종 때 펴낸 『법원주림(法苑珠林)』이란 책의 헌불부(獻佛部)에 보면 우란분회에서 불승에게 바칠 시물(施物)에 대한 문답이 나오고, 이어 매년 국가에서 우란분회를 위해 공양물과 악인(樂人)을 보냈다고 한다. 이때 공양물은 각종 진귀한 음식과 기기묘묘한 세공물들로서 그 성대함이 대단한 구경거리였다고 한다.

이러한 우란분재는 중국의 민속 명절인 중원(7월 15일)의 각종 놀 이와 결합된 민속 행사이기도 하였다. 중국 도교나 민간세시에서는 3원일(元日, 1·7·10월의 15일)에 천상선관(天上仙官)이 인간 세상에 숨어들어 개개인의 선악을 기록해 간다고 하여 밤을 세워 노는 풍속이 있는데, 우란분재가 이와 결합된 것이다. 절에서는 민속 명절과 결합하여 각종 진기하고 특이한 물건이나 장식물을 진열해놓고 백가지 놀이를 놀았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우란분경』이 언제 전해졌고, 우란분회가 언제부터 설행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분명한 것으로는 주로 왕실의 불교 행사를 많이 기록한 『고려사』를 통해 예종(2회), 의종(1회), 충렬왕(3회), 충선왕(1회), 공민왕(1회) 등 10회 이내의 우란분재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중국과 같이 재를 지낸 절차나 과정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그 내용을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다. 더구나 민간에서도 우란분재가 설행되었는지는 전혀 알 길이 없다.

우리나라에서 우란분재가 성행한 것은 오히려 억불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로 보아 틀림없을 것이다. 이는 조선시대에 성리학과 주자가례의 도입으로 이전에 비해 조상 숭배가 크게 발전하였고, 더구나 유학자들에 의해 불교가 조상을 모르는 종교로 매도되고 있던 상황으로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즉, 조선의 승려들은 유학자들의 비난에 맞서서 불교 경전 중 조상 숭배를 강조하는 데 가장 알맞은 『부모은중경』이나 『우란분경』을 많이 펴내는 한편 유교의 『오륜행실도』 등과 유사한 『부모은중경』 변상도(變相圖)나 『목련경』 류의 경전을 대거 보급하였던 것이다.

또 한 가지 조선시대에 우란분재가 크게 성행하였던 까닭으로는 중국에서 중원과 우란분회가 결합한 예에서 파악할 수 있다. 즉, 7월 15일 백중이라는 민속 명절과의 시기적 일치라 하겠다. 백중은 민간에서 고된 농사를 끝내고 벌이는 7월의 세시 명절로 세벌김매기 인 만두레를 끝낸 다음 벌이는 농민 및 머슴들의 대동굿으로서 농촌에서 일하던 사람들의 최대의 축제일이었다. 백중은 한자로는 세서연(洗鋤宴) 등으로 적었는데, 이는 호미씻이를 한자로 표기한 것에 불과하다. 또 이 백중은 농민들이 힘든 농사를 마무리짓고 발 뒤꿈치를 깨끗이 씻는다 하여 백종(白踵)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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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총화』에는 이처럼 불교와 민속이 결합된 백중 풍습에 대해 “7월 15일을 일반에서는 백종(百種)이라 하는 바, 승가(僧家)에서는 백종(百種)의 화과(花果)를 준비하여 우란분회를 설행(設行)한다. 서울의 비구니 사찰에는 부녀들이 운집하여 망친(亡親)의 영(靈)에 제사를 지내며, 이날은 통금이 누그러진다.…(속가의 제사와 같이 전날 밤이 아닌) 7월 15일 (달밤에) 서울의 부녀자들은 불사(佛寺)에 머물러 영패(靈牌)를 설치하고 향을 올려 공양한 뒤 제사가 마치면 패를 태우는 바, 농부와 목자(牧者) 등도 휴식한 채 이날을 즐긴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이 절기의 다양한 명칭은 불교와 민속의 결합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어 흥미롭다. 불교에서는 이 날을 공식적으로는 우란분절이라 하면서도 일반적으로는 백중이라 하는데, 이는 7월 15일이 하안거 해제일이고 이 날 여러 승려들(百衆)이 모여 대중 앞에서 깨달음을 토로한다(白衆) 하여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한편, 우란분절의 조상 천도와 연관시키면서 수많은(백 가지) 음식이나 과일(百種)을 마련하여 고통 속에 빠져 있는 넋을 구제한다고 하여 백종(魄縱)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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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광사 예수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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