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7권 한국 서예문화의 역사
  • 한국 서예문화의 역사를 내면서
손환일

한국의 문자생활은 대전(大篆)으로 기록된 유물의 출토로 보아 기원전으로 생각된다. 고조선 시대인 기원전 4∼3세기경에 중국 전국시대 문화의 유입으로 한자가 수용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동북 요동지역에서 청동기 출토 유물들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조치원 출토 비파형청동검>의 명문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그리고 <평양 정백동 출토 원형벼루>(기원전 1세기)·<평양 정백동 출토 목간>(기원전 1세기)·<명문와당>·<봉니>·<인장>·<명문벽돌>·<전한시대 동종(前漢時代銅鐘)>(기원전 1세기) 등도 당시 한반도에서의 문자생활을 말해 주는 유물이다.

4세기 고구려 소수림왕 때 불교의 공인과 태학의 설립은 문자생활을 대중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불교의 유행은 사경의 대중화를 촉진하였고, 태학의 설립은 유학의 수용을 통한 인성과 덕목의 중요성이 일반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평양 정백동 출토 목간>(기원전 1세기)을 통하여 이미 기원전 1세기에 『논어』를 읽었으며, <인천 계양산성 출토 논어 목간>(400)과 <김해 봉황동 출토 논어 목간>(5세기)을 통하여 5세기에 들어서는 이미 한반도 전역에 『논어』가 수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문자생활이 대중화되면서 서체가 발달하고 인접국과의 교류에 의하여 여러 형태의 자체가 수용되었다. 이러한 서체의 발달은 이른 바 서예라는 예술적 장르로 발전하였는데,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바로 서예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그러므로 한반도에선 서예(書藝), 대륙에서는 서법(書法), 일본 열도에서는 서도(書道)로 호칭되었다. 그런데 서법과 서도는 모두 ‘글씨 쓰는 법’이라는 뜻으로 서로 같지만, 서예는 ‘글씨의 예술’이라는 뜻으로 개념이 서로 다르다.

이때부터 글씨는 단순히 의미를 전달하는 도구뿐 아니라 심미(審美)의 대상이 되었다. 다만, 그 대상은 한자가 대부분이었고, 한글은 15세기 창제된 이후에 여러 종류의 글자체가 생성·발전하였다. 글씨의 예술인 서예는 표현하는 도구가 동양과 서양이 서로 다르다. 동양의 경우 글씨와 그림을 같은 붓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서화는 원류가 같아서 ‘서화동원(書畵同原)’이라고 하여 필자의 정신과 인격을 대변하였다. 그러나 서양의 경우는 그림을 그리는 붓과 글씨를 쓰는 펜이 서로 다른 데서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한국의 서예는 대륙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아 시대에 따라 대륙 명가의 서법을 많이 수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진의 왕희지(王羲之), 당의 구양순(歐陽詢), 우세남(虞世南), 안진경(顔眞卿), 저수량(褚遂良)은 물론, 송·원(宋元) 이후 소식(蘇軾), 조맹부(趙孟頫), 동기창(董其昌) 등이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사람들이다. 이러한 명필들의 문자예술은 신라, 고려, 조선으로 이어져 이들이 또 다른 세계의 일가를 이루었다.

삼국시대에는 대륙에서도 서체의 변화가 많고 안정되지 못한 시기였다. 예서와 팔분, 초서, 그리고 행서와 해서가 병용되던 시기에 해당한다. 이러한 기록에는 기념기록과 생활기록, 사경기록으로 구분된다. 기념기록은 금석문에 주로 사용되었고, 자체는 전서, 예서, 팔분, 해서 등과 같이 필획이 분명한 자체를 사용하였다. 생활기록에는 행서나 초서 등과 같이 일상 생활에 사용이 간편한 자체를 사용하였고 목간이 많이 남아 전한다. 사경은 종교적인 입장에서 서사된 종교 개념으로 서사에 사용된 서체로 여러 종류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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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흥리 고분 묘지명
덕흥리 고분 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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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광개토왕릉비>·<경주 호우총 호우명 청동그릇>·<평양성 각석>의 경우처럼 기념기록에는 예서나 해서를 사용하였고, 생활기록에는 <덕흥리고분>·<안악3호분> 등의 경우는 해서나 행서를 사용하였다. 고구려 <모두루 묘지(牟頭婁墓誌)>는 사경체를 사용하여 서체의 다양성을 보였으며, <광개토왕릉비>(414)는 예서로 쓰여졌지만 전서법, 초서법, 해서법 등이 함께 사용된 점이 특징이다.

백제는 <무령왕릉 묘지>·<부여 왕흥사지 출토 청동사리함>·<익산 미륵사지석탑 진신사리 봉영기>·<익산 왕궁리 석탑 발견 금제금강경>·<사택지적비>·<백제 목간> 등의 유물이 전한다. 대체로 남조와 북조의 필법으로 나뉘고, 기념기록과 생활기록, 사경기록 등으로 구분된다. 백제의 서법은 고구려 서법의 영향이 지배적이다. 그리고 <익산 왕궁리 석탑 발견 금제금강경>은 서체와 제작법이 매우 특별한 것이다. 특히, 목간 중에서 <지약아식미기>는 식미를 지급한 기록이고, <좌관대식기(佐官貸食記)>는 국가에서 구휼정책을 시행한 문서 목간으로 중앙 행정문서이다. 또한, <부여 왕흥사지 출토 청동사리함>·<익산 미륵사지 석탑 진신사리봉영기> 등을 통하여 당시의 도자(刀子)를 사용한 각법(刻法)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의 각법은 마치 붓으로 쓰듯이 새긴 것이다.

신라는 고구려·백제와 매우 관계가 깊었고, 고대 신라의 서사문화는 고구려와 관계가 깊다. 곧, 석비의 양식이나 기법, 서법이 같은데, 이러한 서사문화는 불교문화를 통하여 서로 전래 수용된 것이다. 신라의 <울진 봉평신라비>를 쓴 모진사리공은 고신라의 서법을 사용하였고, <경주 태종무열왕릉비>(660)를 쓴 김인문(金仁問, 629∼694)은 당에서 배운 구양순의 필법으로 글씨를 썼다. 그러나 제액은 당에서도 보기 드문 대전인 유엽전(柳葉篆)을 사용한 점이 특징이다. 신라의 서법은 삼국 통일을 기점으로 혁신적인 양식으로 발전하였다. 곧, 통일 전에는 고구려의 서법이 지배적이지만, 통일 후에는 당에서 유행한 서법이 수용되었다.

남북국 시대는 남국의 통일신라와 북국의 발해로 나눈다. 이 시대에는 해서 문화를 꽃피운 당의 문화를 수용하여 많은 변화가 있었다. 불교문화의 대중화는 사경문화와 함께 서사문화의 발달을 가져왔으며 발달된 서사문화는 금석문의 발달과 함께 문자생활의 질을 높여주었다. 서사문화와 관련해서는 사경문화가 눈에 띈다. 사경은 삼보의 하나로 숭배의 대상이었으므로 모두 단정한 해서로 썼다. 사경문화의 대표적인 작품은 <신라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754, 국보 제196호)이 있다. 이는 금석문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화엄사 화엄석경>이 대표적이다.

판본으로는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로 알려져 있다. 통일신라의 명필은 한눌유(韓訥儒), 김생(金生, 711∼?), 김육진(金陸珍), 영업(靈業), 김원(金薳), 김언경(金彦卿), 혜강(慧江), 요극일(姚克一), 김임보(金林甫), 김일(金一), 최치원(崔致遠) 등이 있다. 이들은 당에서 유행하던 왕희지나 구양순의 필법을 수용하여 유행시켰다.

발해는 알려진 바가 적지만 <광개토왕릉비>의 예서로 쓰여진 압 인와(押印瓦)가 많이 남아있고, <정혜공주묘비>와 <정효공주묘비>는 구양순체로 서사하였으며, <함화4년명 불상(咸和4年銘佛像)>은 고구려에서 유행한 북조의 필법이다. 대간지(大簡之)는 송석(松石)을 잘 그렸다 하는데, 이러한 절지법은 글씨에도 응용되었을 것이다. 이는 신라가 통합 이후 당의 문화를 여과없이 수용한 반면, 발해는 문화수용의 속도도 느릴 뿐만 아니라 무조건 수용하지 않았다는 데에서 차이가 있다.

남·북조시대부터 당(唐) 회인(懷仁)이 왕희지(307∼365)의 글자를 집자하여 672년에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672)를 만든 것이 집자의 처음이다. 이를 모방하여 통일신라시대부터 집자비를 만들었다. 특히, 역사적으로 유명한 명필의 글씨를 자본으로 집자하였는데 시대별·개인별로 그 취향이 다르다. 남국 신라시대부터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한 것으로는 <무장사 아미타불조상사적비(鍪藏寺阿彌陀佛造像事蹟碑)>(801)·<사림사 홍각선사비(沙林寺弘覺禪師碑)>(886) 등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남북국시대에 수용된 선진 불교문화를 바탕으로 사경의 발달과 함께 다양한 서체가 유행하였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명필로는 이환추(李桓樞), 구족달(具足達), 장단열(張端說) 등을 위시하여, 채충순(蔡忠順), 손몽주(孫夢周), 안민후(安民厚), 탄연(坦然), 이암(李嵒, 1297∼1364), 권중화(權仲和, 1322∼1408), 한수(韓脩, 1333∼1384) 등을 들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이환추, 구족달, 장단열, 손몽주, 안민후 등은 해서에 능하였고, 탄연과 이암은 행서의 명필이며, 권중화와 한수는 팔분의 명가였다.

고려시대에는 사경이 발달하여 명품의 사경이 많이 전한다. 고려시대 집자비로는 <흥법사 진공대사탑비(興法寺眞空大師塔碑)>(940)·<태자사 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954)·<직지사 대장당기비(直指寺大藏堂記碑)>[1185 망실(亡失)]·<인각사 보각국사정조비(麟角寺 普覺國師靜照碑)>(1295) 등의 집자비가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성행하여 불교문화와 관련된 문자자료가 대부분이다. 그 중에서도 묵본으로 전하는 사경과 금석문으로 전하는 석비와 묘지가 대표적이다. 묵본으로 전하는 사경은 백지묵사경, 감지금사경, 감지은사경, 그리고 각종 판본이 있다. 사경에는 조성기가 있어서 사경의 제작과정과 서사자, 시주자, 제작연유 등을 상세하게 살필 수 있다. 다만, 미술사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서체의 다양성이 결여된 것이 단점이다.

각종 판본은 활자본과 목판본으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는데, 활자와 목판은 제작과정이 다르기 때문에 서체에 있어서도 많은 차이가 있다. 그러나 활자와 목판은 사경을 기본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방정한 해서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예는 금석문의 석비에 있어서 서법이 엄격한 해서가 많이 사용되었다. 그래서 고려 초기와 중기에는 구양순의 해서가 유행하였고, 중기부터는 왕족들의 사치에 따라 왕희지의 아름답고 유려한 글씨를 선호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왕희지나 당 태종의 글씨나, 김생의 글씨를 집자하는 집자비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도 일상 생활의 단면을 그대로 볼 수 있는 서체의 보고는 묘지(墓誌)이다. 묘지는 대부분 돌에 새겨 땅 속에 시신과 함께 매장하였다. 그래서 거의 온전하게 남아있는 경우가 많으며 320여 개의 고려 묘지가 전한다. 비록 도자로 돌에 새긴 글씨이지만 묘지에는 많은 부분 당시의 서사문화를 살펴볼 수 있으며 각종의 각법도 함께 살필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구양순과 왕희지가 유행하였고, 가끔은 유공권과 저수량의 글씨를 수용하였다. 그 중에서도 고려 말 원나라 조맹부체와 이부광의 설암체는 조선시대 서사문화의 새로운 영역의 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왕희지를 배운 조맹부체는 고려 말 이암을 필두 로 조선의 귀족들 사이에 유행하여 조선 초 명필인 안평대군 이용을 낳았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왕족들을 중심으로 유행한 조맹부체는 사대부들 사이에서도 유행하여 각종 판본, 공문서는 물론 사회 전반에 걸쳐 유행하였다.

특히, 고려 말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이암(李嵒, 1297∼1364) 등은 조맹부체를 바탕으로 일가를 이루었다. 한편, 공민왕은 설암체를 본받아 많은 편액을 썼고 이에 이른바 액체(額體)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그래서 편액이나 주련에는 모두 액체를 사용하였으며 이는 그 후 600년 동안 지속되었다.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 인물로 태조의 건원릉비(健元陵碑)를 쓴 성석린(成石璘)은 소식의 서체를 써 대가를 이루었고, 여러 가지 불경의 판본을 쓴 성달생(成達生)은 소해(小楷)의 명가였다.

조선 왕조는 건국 당시 불교를 배척하고 주자학파의 유학을 통치의 기본원칙으로 삼았다. 성리학의 유행과 함께 많은 예술 활동이 위축되었고 이는 서화에 있어서도 같은 영향을 끼쳤다.

조선 초기 서예는 고려 말의 경향이 그대로 계승되어 조맹부체가 유행하였다. 송설체로 된 증도가(證道歌)·천자문(千字文)·적벽부(赤壁賦) 등이 왕의 명령으로 간행되어 일반에게 전습되었다. 1435년(세종 17)에는 승문원·사자관(寫字官)의 글씨 쓰는 법이 정확하고 바르지 못하다 하여, 왕희지체로 궤범(軌範)을 삼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양 체가 같이 유행하였으나 주류는 역시 조맹부체였다. 선조 이전에 서예가로 이름이 높은 사람으로는 강희안(姜希顔)·김종직(金宗直)·정난종(鄭蘭宗)·소세양(蘇世讓)·김구(金絿)·성수침(成守琛)·이황(李滉)·양사언(楊士彦)·성혼(成渾) 등이 있다. 대체로 조선 초기에는 조맹부·왕희지 등의 서법이 혼용되어 유행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문종(1414∼1452)·박팽년(朴彭年, 1417∼1456)·안평대군 이용(李瑢, 1418∼1453)·성삼문(成三問, 1418∼1456)·서거정(徐居 正, 1420∼1488)·성임(成任, 1421∼1484)·안침(安琛, 1445∼1515)·정난종(1433∼1489)·임사홍(任士洪, 1445∼1506)·박용(朴墉, 1468∼1534)·신공제(申公濟, 1469∼1536)·임희재(任熙載, 1472∼1504)·소세양(1486∼1562) 등이 조맹부체(송설체)를 따랐다. 이 가운데 안평대군은 조맹부체(송설체)를 배워 입신의 경지에 이른 조선 초기의 대가였다.

16세기에 들어서 위·진(魏晉)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복고주의 경향과 함께 왕희지체가 새로이 대두되었으나, 성세창(成世昌, 1481∼1548)·소세양(1486∼1562)·정유길(鄭惟吉, 1515∼1590)·송인(宋寅, 1517∼1584)·이산해(李山海, 1539∼1609)·김현성(金玄成, 1542∼1621) 등에 의하여 조맹부체의 명맥이 여전히 이어졌다. 왕희지체와 한호의 석봉체가 유행하는 중에도 조맹부체는 조희일(趙希逸, 1575∼1638)·신익성(申翊聖, 1588∼1668)·조문수(曺文秀, 1590∼1645)·윤순지(尹順之, 1591∼1666)·김좌명(金佐明, 1616∼1671)·류혁연(柳赫然, 1616∼1680)·심익현(沈益顯, 1641∼1683)·숙종(1660∼1723)·이건명(李健命, 1663∼1722)·오태주(吳泰周, 1668∼1716) 등에 의해 면면히 이어져 왔다.

17세기 중엽부터 존명사상에 의하여 글씨에서도 당시 소론(小論)들이 명(明) 문화의 실질적인 계승자임을 자처하면서 왕희지나 미불(米芾, 1051∼1107)을 바탕으로 문징명(文徵明, 1470∼1559)을 수용해 갔다. 이서(李漵, 1662∼1723)와 그의 제자인 윤두서(尹斗緖, 1668∼1715), 윤순(尹淳, 1680∼1741), 그의 제자 이광사(李匡師, 1701∼1777)가 당시를 대표하는 행서의 명필들이다.

조맹부체의 유행은 인쇄활자의 서체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고, 조맹부체를 대중화하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왕명으로 조맹부의 진필을 여러 차례 수집하여 간행하였는데, 태종은 대소 신료들에게 왕명으로 각도에 소재한 사사(寺社)의 비명을 탁본하여 서법으로 삼고자 모인하여 바치게 하였다. 세종은 조맹부의 글씨로 새겨 인쇄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종친과 여러 신하에게 하사하였고, 문종 4년에는 안평대군이 <역대제왕 명현집(歷代帝王名賢集)>이라는 고첩과 <왕희지행초(王羲之行草)>·<조자앙 진초천자문(趙子昻眞草千字文)> 등의 서법판본을 바치니, 교서관에 명하여 사람들이 모인(模印)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세조는 주자소·교서관·승정원·예조 등에 명하여 성균관의 학생들과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조맹부의 글씨를 자본으로 삼아 학습하게 하였다.

조선시대 역대 왕들은 조맹부 글씨를 선호하였고 수집·인출하여 서체의 보급에도 앞장섰다. 세조는 어느 왕보다도 조맹부체의 대중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처럼 궁중의 내외가 모두 이러한 시류에 합류하여 사회 전반에 걸친 서사문화에 조맹부체의 유행을 가져왔다. 인쇄의 활자서체에 있어서도 1434년 갑인자(甲寅字)를 시작으로 1684년 운각자(芸閣字)가 출현하기 전까지 조맹부 서법이 지배적이었다.

갑인자는 ‘위부인자(衛夫人字)’라고도 하는데 경자자(庚子字)가 너무 작고 조밀하므로 보기 어렵다 하여 대군들의 요청으로 활자를 새로 주조하였다. 명나라 초기의 판본인 『효순사실(孝順事實)』·『위선음즐(爲善陰騭)』·『논어』 등의 서적을 자범(字範)으로 하고 부족한 글자는 수양대군으로 하여금 쓰게 하여 김돈(金墩)·이천(李蕆)·김빈(金鑌)·장영실(蔣英實)·이세형(李世衡)·정척(鄭陟)·이순지(李純之) 등에게 명하여 두 달 동안 활자 20여 만 자를 주조하였다. 이 활자가 조선 활자사상 중추라 할 수 있는 갑인자이다. 특히, 갑인자는 왕희지와 조맹부의 서체로 아름답고 인쇄가 깨끗하여 8번이나 개주하여 사용된 글자인데, 을해자와 함께 조맹부체의 유행에 큰 역할을 하였다.

문서는 역사서적·문집·의궤 등의 서적류와 추안(推案)·국안(鞫案) 등의 재판 관계 서류, 기부(記簿)·장부 등의 상업 관계 문서 등을 비롯하여 관청 및 국가 간에 오가던 관문서·공문서·사대문서·교린문서, 개인 간의 토지·노비·가옥매매·재산상속과 전곡차용(錢穀借用) 때 사용 된 문권(文券)·문기(文記) 등의 모든 문서이다. 문서는 원본·초본·사본 등의 3가지가 있다. 원본은 하나만 작성되는 단문서(單文書)일 경우가 많다. 그러나 왕의 교서·윤음과 그리고 관청의 방(榜)이나 재산분배를 위한 화회문기(和會文記) 등은 2통 이상 작성된다.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서로는 이성계 호적(李成桂戶籍) 원본을 비롯하여 교지(敎旨)·교서(敎書)·녹권(錄券) 등이 전하는데, <예천 용문사교지(醴泉龍門寺敎旨)>(1457)·<오대산 상원사 중창권선문(五臺山上院寺重創勸善文)>(1464), 1464년 세조가 연원군 이숭원(李崇元)에게 내려준 교지와, 1472년 세조가 연원군 이숭원을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봉하면서 작성한 교서 등이 있다. <예천 용문사교지>는 세조가 친히 어압(御押)하여 내린 교지이다. 이 무렵부터 공문서에도 조맹부체의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조맹부체의 유행은 문예부흥기인 1410년대부터 1580년대에 걸쳐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가 조맹부체(송설체)의 융성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융성기는 세조·성종 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안평대군 사후에는 크게 위축되었다. 조선 중기 왕족들 사이에서 조맹부체가 유행할 때 사림들 사이에서는 서체도 위·진 고법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취지 아래 왕희지체가 유행하였다. 사장학파(詞章學派)는 고립되었고, 이황(李滉)은 조맹부체의 연미하고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던 필법에 반기를 들었다. 이황의 출현으로 성리학적 견지에서 조맹부체는 이미 깊이를 잃고 가볍게 보이며 저속하고 혐오감이 만연하여 회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천고의 성서인 왕희지의 필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부르짖게 되었다. 그 영향으로 왕희지체가 유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호에 의해 탄생한 석봉체(石峯體)가 풍미하게 되었다. 왕희지의 소자해서로 『필진도(筆陣圖)』·『동방삭화찬(東方朔畵贊)』·『효녀조아비(孝女曹娥碑)』·『황정경(黃庭經)』·『유교경(遺敎經)』·『악의론(樂毅論)』 등이 있는데, 이것은 모두 위작이거나 몇 번의 복각을 거쳐서 진적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이어 왕희지체를 바탕으로 한 한호, 이서, 윤순, 이광사 등의 명필이 대두하였다. 특히, 윤순·이광사·강세황 등은 3대가로 불린다. 이광사는 강세황과 함께 왕희지체를 이은 명필가이다. 조윤형(曺允亨)과 정약용(丁若鏞)도 윤순의 서법을 이은 명필가였다. 선조 때에 한호가 나온 후로는 조선시대의 서법이 크게 변모하였다. 즉, 한호는 왕희지체를 공부하여 해·행·초서에 능하였으나 속기(俗氣)가 많았다.

조선 중기의 초서는 당 회소(懷素, 725∼?)나 장욱(張旭), 명의 장필(張弼, 1425∼1487)의 영향을 받았다. 초서의 대가로 최흥효(崔興孝), 김구(金絿, 1488∼1534), 김인후(金麟厚, 1510∼1560), 양사언(1517∼1584), 황기로(黃耆老, 1521∼?), 이우(李瑀, 1542∼1609), 이지정(李志定, 1588∼?) 등이 유명하다. 허목(許穆)은 “문장과 서체는 선진고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여 대전을 중심으로 전서에 일가를 이루었는데, 이를 ‘미수전(眉叟篆)’이라고 한다. 그는 행서와 초서에도 전서의 결구를 사용하여 특유의 ‘미수체(眉叟體)’를 형성하였다.

조선 후기의 서예는 김정희와 함께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18세기 후반부터 신진학자들은 청국으로 가는 사절을 따라가서 서법에 관한 새로운 사조를 수용하여 폭 넓은 서예문화를 형성하였다. 특히, 청대의 고증학과 금석학의 수용으로 금석문이 서체예술의 폭을 넓혔다. 이때 서법에서 첩학을 내쫓고 비학을 제창하였던 대표 인물은 완원(1764∼1849)이다. 그는 『남북서파론』과 『북비남첩론』을 저술하여 글씨도 북비의 금석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창하였다.

우리나라의 선진학자들은 청대의 대학자인 옹방강(翁方綱)·기균(紀畇)·완원(阮元)·손성연(孫星衍) 등으로부터 경학과 금석학에 대한 지식을 수용하였고, 시문서화의 대가인 장문도(張問陶)·나빙(羅聘)·이병수(伊秉綬)·이병원·철보·오숭양·주달·섭지선 등도 조선의 학자들과 깊은 학문 의 인연을 맺었다. 그들의 영향을 직접 받은 사람으로는 박제가(朴齊家)·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신위(申緯)·김정희·권돈인(權敦仁)·이상적(李尙迪) 등이 있다. 이들 가운데 글씨에서 가장 큰 혁신을 일으킨 사람은 바로 김정희였다.

김정희는 처음 안진경과 동기창의 서체를 모방하였거나, 한동안 구양순체를 썼으나 차차 독창적인 서법을 개발하였다. 그는 서법의 근원을 전한의 예(隷)에 두고 이 법을 해서와 행서에 응용하여, 전통적인 서법을 깨뜨리고 새로운 형태의 서법을 시도하여 서예사에 큰 획을 그었다. 그의 글씨는 근대적 미의식의 표현을 충분히 발휘하여 당시 사람들의 놀라움을 받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에 대한 예술적 평가는 더욱 높아졌다. 그의 영향을 받은 권돈인의 행서, 조광진(曺匡振)의 예서가 모두 경지에 이르렀다. 그의 제자로는 허유(許維)·조희룡(趙熙龍) 등이 있으나, 그의 정신을 체득하는 데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 후 김정희의 추사체는 신위(1769∼1845), 조광진(1772∼1840), 권돈인(1783∼1859), 김명희(1788∼1857), 이하응(1820∼1898), 조희룡(1797∼1859), 이상적(1804∼1865), 오경석(1831∼1879) 등을 중심으로 새로운 서파를 형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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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해서 오언고시>
김정희 <해서 오언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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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장(印章)의 전각(篆刻)은 조선 초기 강희안을 비롯하여, 홍석구(1621∼1679), 이인상(1710∼1760) 등과 허목(1595∼1682)과 그를 이은 이가환(1742∼1801), 이철환 등을 중심으로 한 남인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그 후 추사체가 확립되어 감에 따라 독특한 추사각풍(秋史刻風)을 이룩하였다. 그는 문자 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를 높게 평가하고, 조희룡(1789∼1866), 허유(1809∼1892), 오규일(吳圭一), 김석경, 이하응, 전기(1825∼1854) 등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들을 추사파라 한다.

조선시대의 집자비는 18∼19세기에 유행하였으며 서체가 다양해 졌다. 김생·최치원·한호 등과 왕희지·안진경·회소·소식 등의 글씨를 집자하였다. 이를 18세기와 19세기로 나누어 살펴보면, 18세기 집자비로는 한호 대자해서 39건, 안진경 소자해서 22건, 소식 대자해서 15건, 유공권 소자해서 14건, 이양빙 전서 7건, 김수증 팔분 4건, 안진경 대자해서 4건, 한호 소자해서 3건, 김생 소자해서 3건, 조맹부 소자해서 2건, 저수량 소자해서 2건, 당팔분(唐八分) 1건, 박태유(朴泰維) 소자해서 1건, 유공권 대자해서 1건, 김수항 전서 1건, 송준길 소자해서 1건, 오태주 소자해서 1건, 허목 미수전 1건, 정기윤(鄭岐胤) 해서 1건, 왕희지 행서 1건 모두 115건으로 가장 성황을 이루었다. 이는 청과의 교류를 통하여 선본의 법서를 소장하게 되는 이유에서 연유한다.

19세기 집자비로는 한호 대자해서 9건, 한호 소자해서 2건, 소식 대자해서 2건, 안진경 소자해서 2건, 이양빙 전서(玉箸篆) 2건, 허목 미수전 1건, 유공권 소자해서 1건, 안진경 대자해서 1건, 저수량 소자해서 1건, 김생 소자해서 1건, 엄한붕 해서 1건, 정조 해서 1건, 최치원 소자해서 1건, 김정희 해서 1건 모두 26건으로 파악된다. 18세기에 비하면 집자비의 수가 현저하게 줄었다. 이를 종합하면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는 왕희지 행서가 선호되었고, 조선시대의 집자비는 18∼19세기에 집중되어 유행하였다. 시대별로 구분해 보면 통일신라시대 2건, 고려시대 4건, 조선시대 151건으로 모두 157건이다.

자체별로 구분하여 보면 역시 해서가 가장 많은 109건이고, 행서는 7건, 전서는 12건, 팔분은 5건 등으로 분류된다. 초서가 사용되 지 않은 것은 글씨를 새기는 어려움 때문으로 생각된다. 서체별로 구분하면 한호의 대자해서가 48건으로 가장 많고, 안진경의 소자해서가 24건을 차지한다. 다음으로는 소식 대자해서 17건, 유공권 소자해서 15건, 이양빙 전서 9건, 안진경 대자해서 5건, 한호 소자해서 5건, 김생 소자해서 4건, 김수증 팔분 4건, 저수량 소자해서 3건, 허목 미수전 2건, 조맹부소자해서 2건, 당팔분(唐八分) 1건, 박태유(朴泰維) 소자해서 1건, 유공권 대자해서 1건, 김수항 전서 1건, 송준길 소자해서 1건, 오태주 소자해서 1건, 정기윤 해서 1건, 왕희지 행서 1건, 유공권 소자해서 1건, 엄한붕 소자해서 1건, 정조 소자해서 1건, 최치원 소자해서 1건, 김정희 해서 1건 등으로 모두 25종류, 151건의 서체로 파악된다.

서론으로는 한호와 이서의 『필결(筆訣)』, 윤순의 『서결(書訣)』, 이광사의 『원교서결(圓嶠書訣)』이 있다. 한국에서 간행된 서첩은 많지 않지만 『비해당집고첩(匪懈堂集古帖)』, 『해동명적(海東名蹟)』, 『관란정첩(觀瀾亭帖)』, 『대동서법(大東書法)』, 『고금역대법첩(古今歷代法帖)』, 『해동명가필보(海東名家筆譜)』, 『열성어필첩(列聖御筆帖)』 등의 서첩이 탁본을 엮어 만들어졌다.

세종은 재위 25년(1443)에 우리말의 표기에 적합한 문자 체계인 한글, 즉 『훈민정음』을 창제하였고, 이를 세종 28년에 반포하였다. 한글의 서체는 한글 창제 직후에 나온 여러 본의 판본이 있다. 이들 판본에 사용된 판본의 서체는 두 종류로 구분하는데, 하나는 예서법으로 서사된 한글 예서는 훈민정음체라 하고, 해서법과 행서법의 한글은 궁체라고 한다. 해서법 한글은 궁체정자이고, 행서법 한글은 궁체흘림이다.

훈민정음체의 예는 『훈민정음』(1446)·『용비어천가』(1447)·『월인천강지곡』(1447)·『석보상절』(1447)·『동국정운』(1448) 등의 예서법 한글이 있다. 그리고 『홍무정운역훈』(1455)·『월인석보』(1459)·『세종 어제 훈민정음』(1459)·『상원사 중창권선문』(1464)·『몽산화상 법어약록』(1472)·『구급간이방』(1489)·『진언권공(연산군)』 등은 해서법과 행서법을 본받아 서사한 한글 궁체이다. 이들은 처음부터 궁중을 중심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궁체라고 하는데, 해서법 한글을 궁체정자라 하고, 행서법 한글을 궁체흘림이라고 한다. 궁체정자와 궁체흘림은 궁중에서 왕과 왕후 등 왕족들과 궁인들, 한양을 중심으로 살았던 사대부들이 한글을 필사하는 과정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진 서체이다. 궁체정자의 효시는 『홍무정운역훈』이고, 궁체흘림은 궁중에서 소설을 필사하면서부터 많은 발전적인 변모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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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천강지곡』
『월인천강지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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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서체는 훈민정음 반포 후 지역과 계층적이라는 두 부류로 발전하였다. 궁중과 사대부들을 중심으로 한 서울 지역에서는 필획과 결구가 정리된 궁체가 유행하였다.

반면, 각 지방에서는 향민들을 중심으로 한 양반들 사이에 필획이 거칠고 결구가 자유로운 향체(鄕體)가 사용되었다. 왕과 사대부들을 중심으로 궁중과 서울에서 필획과 결구가 정리된 궁체가 유행하였다면, 지방에서는 민간인들 사이에 소설을 베끼고, 각종 일상생 활문서에 향체를 사용하게 되었다. 한글 서체의 발달은 정음 시기(1443∼1499), 언문 전기(1500∼1600), 언문 후기(1700∼1800), 한글 시기(1900∼1945)로 구분할 수 있다.

정음 시기는 조선 초기에 해당하는 시기로 훈민정음 시기이다. 이 시기는 1443년 훈민정음이 창제되어 『훈민정음해례본』·『동국정운』·『월인천강지곡』이 출간된 1400년대 전기와 언해본인 『세종어제 훈민정음』(1459, 월인석보 부분)·『두시언해』(1481) 등이 나온 1400년대 말까지로 한글 판본체류의 문헌이 등장하였다.

언문 전기는 한글판본체로 『훈몽자회』(1527)·『훈민정음언해본』(1556) 등이 나온 1500년대와 『가례언해』(1632)·『천자문』(1691) 등이 나온 1600년대를 말한다. 한편, 한글필사체로 <선조어필 언간>(1597)이 나온 1500년대와 <효종비인선왕후 언간>(1641)·<숙종언간>(1685) 등이 나온 1600년대가 언문 전기이다.

언문 후기는 한글 판본체로 『경세훈민정음』(1701)·『오륜행실도』(1797)가 나온 1700년대와 『언문지』(1824)·『구운몽』(1862) 등이 나온 1800년대이다. 한글필사체로 『정미 가례일기』(1727)가 나온 1700년대와, <추사 김정희 서간문>(1828)이 나온 1800년대가 언문후기이며, 이는 주시경의 『국어문법』(1898)이 나오기 전까지에 해당된다.

한편, 한글 시기는 『국어문법』이 나온 시기부터 1945년까지를 말한다. 이 시기는 한글판본체로 『유충렬전』(1902)이 나온 1900년대 초와, 『춘향전』(1916)·『한글맞춤법통일안』(1933)·『한글첫걸음』(1945) 등이 나온 1900년대 중기까지이다. 한글필사체로 『묘법연화경』(1903)과 <윤백영궁체>(1921) 등이 나온 1945년 이전 시기가 한글시기이다.

19세기 말엽에 이르게 되면 전국적으로 서양식 제도의 학교 교육이 시작되었다. 붓글씨 전용이 점차 사라지고, 일상적 필기생활 에 있어서 연필과 펜이 보편적으로 사용되면서 서예는 전문적·직업적인 성격으로 바뀌어 서예가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대표적 서예가들의 글씨가 어떤 뚜렷한 근대적 서풍을 보인 것은 아니었다. 자주적인 표현은 김정희로부터 시작되었다. ‘추사체’는 근대 서예의 뚜렷한 기점으로 볼 수 있으며, 임창순(任昌淳)은 김정희의 내면을 ‘근대적 서풍의 발생’이라고 분석하고 있고, 김기승(金基昇)은 김정희를 ‘근대 서예의 종장(宗匠)’으로 칭하였다.

김정희 이후로는 이종우(李鍾愚)·전기(田琦)·권동수(權東壽) 등이 있고, 정대유·현채·서병오·오세창·김규진·김돈희 등은 한국 근대서예사의 실질적 개창자로서 1910년대 이후 다채로운 활약을 보였다. 이들은 김정희가 이룩한 바와 같은 근대적 표현방법이나 서법의 독자성을 뚜렷이 드러내지는 못하였으나, 나름의 전통서체로 한 시대를 대표하며 근대 서예계를 대표하였다.

근·현대의 서예는 쇠퇴기였다.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가 설치되어 일본인과 친일파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서법에 있어서도 일본의 영향이 있었으나 독특한 양식이 출현하지는 못하였다. 일제강점기 서화계는 전문적 서예가로서 사회적 존중을 받는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1910년대 이후 1930년대까지의 대표적인 명필들은 크게 다섯 부류로 나눌 수 있다.

① 고관 역임자]외부대신 김윤식(金允植), 탁지부대신 김성근(金聲根), 농상공부대신 김가진(金嘉鎭), 궁내부대신 윤용구(尹用求), 궁내부대신서리 박기양(朴箕陽), 여러 부의 대신 민병석(閔丙奭), 궁내부대신 박영효(朴泳孝), 총리대신 및 정부 전권위원 이완용(李完用) 등]

② 순수한 문인·학자[『동국사략(東國史略)』 등의 저서를 남기며 안진경체에 능하였던 현채, 한학자로 초서의 대가 유창환(兪昌煥), 황정견체 (黃庭堅體)에 뛰어났던 최영년(崔永年)·정만조(鄭萬朝)·오세창·김돈희 등]

③ 직업적 전문서예가[김석준(金奭準)·정학교(丁學敎)·강진희(姜進熙)·지운영(池雲永)·정대유·민영익(閔泳翊)·나수연(羅壽淵)·오세창·김규진·노원상(盧元相)·김돈희·안종원(安鍾元)·김태석(金台錫)·민형식(閔衡植)·김용진(金容鎭) 등]

④ 서화가[안중식(安中植)·김응원(金應元)·이도영(李道榮)·이한복(李漢福) 등]

⑤ 독립운동가[안중근(安重根)·김구(金九)·이시영(李始榮)·신익희(申翼熙) 등]

김규진은 서화연구회나 서화미술회 등 연구소나 학원을 설립하여 신진 서예가를 양성하려 하였다. 1918년 6월 근대적 미술가 단체로 서화협회가 결성되었다. 서예가는 정대유·강진희·현채·오세창·김규진, 화가는 조석진(趙錫晉)·안중식·김응원·강필주(姜弼周)·정학수(鄭學秀)·이도영·고희동이었고, 나수연·지운영·안종원·서병오·심인섭(沈寅燮) 등이 협회 정회원으로 참여하였다. 그 후 서화협회는 발족과 함께 사회적 활동으로서 휘호회(揮毫會)·전람회·의촉제작(依囑製作)·도서인행(圖書印行) 및 강습소 운영 등을 기획하여 1921년부터 1936년의 제15회전으로 중단된 서화협회전람회(약칭 協展)가 있었다. 이 전람회는 서부·동양화부·서양화부로 운영되었고, 1회전이 열린 1921년 10월 25일자로 발행된 『서화협회회보』 제1호는 최초의 미술잡지이다. 이 회보에 김돈희의 『서법강론』은 잡지를 통한 서예 진흥 노력의 일면이었다.

1920년대 이후의 전문적·직업적 서예계 형성의 직접적 배경은 서화협회전과 조선미술전의 서부(書部)였다. 여기로부터 신진이 배출되었다. 1923년에 서화협회가 중요 사업의 하나로 미술학교 체제의 3년제 서화학원을 설립, 동양화부·서양화부·서부(주임교사 서화협회 회원 김돈희)로 나누어 모집하였다. 평양과 대구의 서화연구회도 같은 성격의 신진 양성과 교양 목적의 연구소였다.

조선미술전 서부는 1931년의 제10회전까지만 존속되었다. 1932년부터 조선미술전의 서부를 제외시킨 것은 조선인이 심사를 하던 부분을 폐지함으로써 모든 부문에서 일본인들이 심사권을 행사하기 위해서였다. 일제는 조선미술전에서 서부를 없애고 조선서도전람회(朝鮮書道展覽會)를 개최하였던 것이다. 조선서도전에는 1932년 11월의 제1회전 이후 조선미술전 서부에서 신진으로 부각되었던 인물로는 손재형(孫在馨)·송치헌(宋致憲)·강신문(姜信文)·김윤중(金允重) 등이 있다. 궁체로 처음부터 주목을 받은 이철경(李喆卿)이 서예계에 진출한 것도 이 조선서도전 입선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한글 글씨가 서예로서의 시도는 제2회 조선미술전에 출품된 <조선문(朝鮮文)>(김돈희)과 제10회 조선미술전에 입선한 <조선언문(朝鮮諺文)>[윤백영(尹伯榮)] 등에서 비롯되었다.

일제강점기 한국서예는 오세창·김규진·안종원·김태석·김돈희·민형식 등에 의하여 근대적 양상을 띠게 되었고, 1920∼1930년대에는 여러 전람회를 통하여 부상한 신세대인 손재형·송치헌·김윤중·이철경 등이 전문적 직업서예가로 등장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 새로운 현대 서예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시기별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① 1945∼1950년: 혼란과 정체 시기

② 1950∼1960년: 성장과 다양화 시기

③ 1970∼1980년: 발전과 대중화 시기

1945년에서 1950년은 정치적인 혼란과 6·25전쟁으로 정체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러한 와중에도 새로운 탈출구를 찾으려고 노력하여 ‘서도(書道)’라는 말 대신 글씨의 예술이라는 뜻의 ‘서예(書藝)’라는 용어가 손재형을 중심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1946년과 1947 년 두 차례의 ‘해방전람회’에서는 ‘글씨가 그림이요 그림이 글씨(書則畵 畵則書)’라는 전통적인 동양의 예술관에 따라 서화가 모두 동참하였다. 이 전람회에는 원로서예가인 오세창·안종원·김용진·손재형이, 화가로는 이상범(李象範)·노수현(盧壽鉉)·이용우(李用雨)·변관식(卞寬植)·최석우(崔錫禹)·박승무(朴勝武)·배렴(裵濂) 등이, 신진으로는 송치헌·김기승·이기우(李基雨)·원충희(元忠喜) 등 중진·신진서예가들이 출품하였고, 김태석은 대동한묵회(大東翰墨會)를 조직하여 전시회를 가졌다.

1949년 11월에 열린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國展)’]의 개최로 서예활동이 활성화되기 시작하여 1950년대 말까지의 서예계는 이를 중심으로 활성화되었다. 자체에 있어서도 전서와 예서, 팔분과 해서, 행서와 초서 등 다양해졌다. 1950년대 중반부터 국전 중심의 서예활동과 더불어 개인전 활동이 시작되어 1954년의 김충현(金忠顯), 1955년의 이기우, 1959년의 유희강 등의 개인전이 열렸다. 1950년대 후반이 되면 개인전 활동과 동시에, 서예교육 보급에 뜻을 둔 개인 및 민간활동도 대두되었다.

초·중·고등학교나 대학의 특별활동과는 달리, 서예가 개인 또는 모임을 중심으로 한 서예교육활동이 대두되었는데, 1956년에 발족한 동방연서회(東方硏書會)와 원곡서숙(原谷書塾)·대성서예원(大成書藝院) 등이 있다. 1958년 한글 궁체를 지도하는 이철경의 갈물서회, 1960년 유희강의 검여서원(劍如書院), 공정서예원(空亭書藝院, 김윤중 지도), 철농서회(鐵農書會, 이기우 지도) 등의 서예원과 최중길·정환섭·박세림이 지도하는 서숙형태의 서원·서회가 만들어져 운영되었다. 이어 1960년 난정회(蘭亭會), 1964년 동연회(同硏會), 1965년 한국서예가협회, 대한서예교육회, 국제서예인연합회 등이 결성되었고 1960년대부터 개인전이 더욱 많아졌다.

197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는 발전과 대중화의 시기이다. 1979년도 『한국 미술연감』은 1970년대의 서예활동의 유형을 다음 과 같이 7가지로 정리하였다.

① 그 동안의 활동실적 등으로 일가를 이룬 서예가의 개인전 또는 단체전

② 오래 전에 한때 서예활동을 하다가 중단한 이후 갑자기 개최된 개인전

③ 독학으로 수십 년간 글씨를 써 오다가 처음으로 개인전을 갖는 이른바 숨은 서예가의 등장

④ 승려·정치인·취미인 등의 개인서예전

⑤ 각종 서회·서숙·묵연(墨緣) 등의 동호회전

⑥ 직장·주부·단체 등의 서예전

⑦ 국제교류전

전문적인 서예가가 아니면서도 한학과 교양으로 글씨를 쓰며, 단체전·개인전 등을 통하여 격조 높은 작품을 발표한 인사들로는 임창순·이가원·윤석오 등이 있다. 1970년대에도 국민서예협회(1971)·열상서단(洌上書壇, 1974)·한국전각협회(韓國篆刻協會, 1974)·한국기영서도회(韓國耆英書道會, 1975)·소완재묵연(蘇院齋墨緣, 1976)·묵림회(墨林會, 1977)·한국전각학회(韓國篆刻學會, 1981)·국제서도연맹(國際書道聯盟) 등의 새로운 단체가 결성되었다.

한글 글씨는 일제강점에 조선미술전람회에 김돈희·윤백영 등 몇 사람의 작품이 <조선문>(김돈희)·<조선 언문>(윤백영)이라는 표제로 출품되었다. 한글서예는 궁체가 현대적으로 정리되고, 학교 교육을 통하여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널리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1910년대에는 남궁억(南宮檍)의 『신편언문체법(新編諺文體法)』이 있었고, 1946년에 간행된 이철경의 『초등글씨본』·『중등글씨본』과 김충현의 『중등글씨본』이 있었다.

이 가운데 이철경의 궁체는 남궁억의 한글 서법과 운현궁·안동(安洞)별궁에 있던 나인들의 글씨 등을 바탕으로 체계를 세운 것이다. 특히, 손재형의 한글전서와 한글예서, 김충현의 ‘훈민정음체’를 응용한 고체(古體)도 있었다. 손재형의 한글예서는 <이충무공 동상 명문>(1951), 한글전서는 1953년 제2회 국전에서 발표되었다. <이충무공 벽파진 전첩비(李忠武公碧波津戰捷碑)>(1956)에는 예서와 전서의 필획이 절충된 한글 글씨가 사용되었다. 한글전서는 한글인장에 많은 영향을 주어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손재형의 한글예서를 새롭게 해석하여 금석기있는 서체로 잉태시킨 작가는 서희환이다.

서예는 지필묵연의 도구를 가지고 만들어진 점과 선의 율동미, 점철과 곡직, 흑과 백의 조형미, 실로 우리의 희로애락을 표현하는데 충분하고, 생산의욕을 고취시키고, 사기를 고무하여 진작시키는 어떤 창작도 가능하다. 게다가 서예는 옛 문화의 향수가 있다. 이러한 목적과 연유로 서예는 자연스럽게 현대로 이어졌다.

문자생활에는 여러 종류의 문방구가 있다. 문방구는 문자생활에 필요한 도구이며, 서사(書寫)문화와 관계된 용구들이다. 이러한 문구들도 문자생활과 관련하여 시대와 지역, 목적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행정 기록을 담당한 기관과 유교나 불교의 종교적인 사경, 개인적인 문한의 기록 등으로 대별된다. 그리고 이들은 좁게는 사랑방 문화와 규방 문화로 나뉜다.

사랑방의 문방구로는 서안(書案)·경상(經床)·고비·책장·사방탁자·문갑(文匣) 등과 함께, 붓[筆]·벼루·먹[墨]·종이[紙]·문진(文鎭)·연적(硯滴)·연갑(硯匣)·연상(硯床)·필가(筆架)·필세(筆洗)·붓걸이·필격(筆格)·필상(筆床)·묵상(墨床)·필통·서견대(書見臺)·시전지판(詩箋紙板)·지통·향꽂이·다구(茶具)·인장(印章) 등을 들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붓(筆)·벼루(硯)·먹(墨)·종이(紙) 등을 흔히 문방사우(文房四友) 혹은, 문방사보(文房四寶)라고 한다.

그 중에서도 벼루가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벼루는 연갑에 넣거나 종이·붓·먹·연적 등과 함께 서랍을 가진 연상(硯箱)에 넣어 보관하였다. 이들을 통틀어 연구(硯具)라고 하였다. 벼루는 문방사보 중에서도 가장 중요시되어 온 문방구의 하나였기에 선물로 많이 주고 받았으며, 사제 간에도 벼루를 전수할 정도로 서사문화와 절대적인 인연을 갖고 있다. “우리 문단에는 내 벼루를 전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한 기사도 여기서 연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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