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7권 한국 서예문화의 역사
  • 1 고대의 문자생활과 서체
  • 02. 삼국시대의 문자생활과 서체
  • 고구려
손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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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릉 호태왕명 청동방울(391)
광개토태왕릉 호태왕명 청동방울(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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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전성기인 4∼5세기는 삼국을 통일했던 서진(西晉)이 남흉노의 침입으로 멸망하고, 대륙의 중원이 남조와 북조로 분열되는 혼란기였다. 반면 고구려는 313∼314년 한반도 서북부에 남아 있던 낙랑과 대방군을 몰아내고, 소수림왕(371∼384) 때 율령을 제정하여 국가체제를 정비하였다. 그리고 상류층 자제를 교육하는 관학으로 중앙 교육기관인 태학(太學)을 설립하였으며, 평양 천도 이후 지방에는 평민층의 자제에게 경전과 궁술을 교육시키기 위하여 전국 각처에 경당(扃堂)을 설립하여 문무를 겸비시켰다. 그 후 광개토대왕(391∼413)과 장수왕(413∼491)은 이러한 안정과 국력을 바탕으로 대대적인 정복 활동을 감행하여 고구려의 전성기를 열었다.

고구려에서 유행한 서법은 한(漢)의 교류와 관계가 깊다. 이러한 교류는 전한(기원전 206∼서기 24)으로부터 살펴 볼 수 있는데, 한 무제(기원전 142∼서기 87)가 위만조선을 정복하고, 그 자리에 낙랑·진번·임둔·현도 4군을 설치하였던 시기이다. 그러나 한이 군현을 설치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지역이 이민족의 공간일 경우에는 원주민에게 토착적 국읍의 존속을 허용하였다.

고구려는 무제 때 동명성왕의 뒤를 이은 유리왕에 의해 본격적인 발전이 이루어진다. 당시 한인들은 물자의 교역을 위하여 고구려와 교류하였다. 전국시대 연(燕)과 한(漢)에서 사용하던 화폐인 명도전(明刀錢), 오수전(五銖錢), 화천(貨泉) 등이 고구려의 수도였던 집안지역에서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 고구려와 한과의 교역을 짐작할 수 있다. 심지어 오수전 등이 남해의 늑도에서도 출토되는 점으로 미루어 보 아 한과의 교역은 고구려만은 아니었다. 이렇듯 전한시대에는 한반도와 교역을 통한 물물교환이 대단히 활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물물교환은 각종 문화의 전래와 수용을 수반하게 되며 서사문화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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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령4년명 와당(326)
태령4년명 와당(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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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 멸망 후 위(魏)·오(吳)·촉(蜀) 삼국이 분립되었다가 진(晉)이 통일하였다. 그 후 한족으로 구성된 진은 북방의 이민족의 침입을 받아 강남으로 밀려나는데 이를 동진(東晉)이라 한다. 동진은 송(宋)·제(齊)·양(梁)·진(陳)으로 교체되고, 북방은 북위(北魏)가 통일, 동서 양위의 분열로 북제(北齊)·북주(北周)의 정권이 이양된다. 반면 고구려는 변방 주변국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교역을 중계하는 역할을 하면서 동방교역의 상권을 장악하여 초기에 급격한 성장이 가능하였다. 고구려는 대륙 중원으로부터 비단·모직 등의 섬유류와 각종 공예품과 금·진주·문방구류·서적 등을 수입하여 동방 여러 나라들과 교역하였다.

고구려와 관계가 깊던 북조(北朝)는 선비족(鮮卑族) 탁발부(拓跋剖)가 건립한 북위 정권과 그 분열로 형성된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를 포함할 뿐 아니라 동서 양위의 기초 위에서 건립된 북제와 북주 정권을 말한다. 북조가 있던 같은 시기에 한반도에서 가장 밀접한 왕래가 있었던 것은 고구려였다. 북위 정권에 있어서 고구려인은 그 수가 많았기 때문에 우호적인 교류를 할 수 있는 기초가 되었 다. 다만, 고구려는 화룡에 도읍을 세운 북연 정권의 방해로 인해 북위의 제3대 황제 태무제(太武帝, 423∼452) 시기에 와서야 비로소 정부 차원의 교류를 시작할 수 있었다. 북연이 멸망하기 전인 태연 원년(435) 고구려는 북위에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다. 다시 말하면 고구려와 북위의 정부 차원의 교류는 태연 원년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 양국이 최초로 정부간 교류를 시작한 것은 위·연 전쟁을 둘러싸고 전개된 교섭 때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와 북위 사이에 우호적 외교는 문성제(文成帝, 452∼465)시기 이후에 전개되었다. 이후 양국 사이의 평화적 외교관계는 북조가 끝날 때까지 유지되었다. 5호16국시기 고구려와 후연 및 북연의 관계는 양국 간에 빈번한 접촉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문 화적 영향이다. 북위가 분열된 이후에도 고구려는 동위 및 북제와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였다. 남조와 고구려의 관계는 송이 성립된 420년 무제가 장수왕을 책봉한 데서부터 시작된다.

고구려는 국초부터 문자를 사용하여 『국사(國史)』 100권을 기술하여 『유기(留記)』를 만들었을 정도로 문자생활에 익숙하였다. 소수림왕 2년(372)에 불교 수용과 태학 설립이 있었고, 이듬해에는 율령을 반포하였다. 불교가 국가의 정신적 통일에 이바지한 것이라면, 태학은 새로운 관료체계를 위하여 필요하였고, 율령의 반포는 국가조직의 정비였다. 이는 중앙집권적 귀족국가의 체제가 완성되었음을 말한다.

문화의 전래와 수용은 여러 가지 방법의 교류에 있다. 무역이나 일반적인 왕래도 있지만 전란이나 왕조 멸망 등 큰 혼란이 일어나면 안전하고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많은 지식인과 상류층이 우리나라를 찾아왔다. 특히, 이러한 혼란기에 세력 다툼에서 패배한 한인 출신관료·군인·학자 등이 다수 고구려로 망명해 왔다.

5호16국 시기 고구려와 후연 및 북연의 관계에서 간과해선 안 될 것이 바로 양국 간에 빈번한 접촉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문화적 영향이다. 양 집단의 교류는 문화적으로 고구려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또한, 후연 시대 벽화묘인 조양원태자(朝陽袁台子)벽화묘와 집안 통구지역의 벽화묘, 북한에 있는 동수 묘(안악 3호분), 그리고 유주자사 묘(덕흥리 고분)의 그림 소재가 유사한 것은 장기간의 전란과 분열 상태에서도 문화상으로 밀접한 관계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게다가 불교 수용을 통한 사경의 전래는 서사(書寫)문화의 수용을 의미하며, 태학의 설립과 경당이 보급되면서 경전의 서사와 학습방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고구려 고분 벽화의 표제방식과 묘지의 명문 양식은 한대(漢代)의 하북(河北) <망도 고분벽화(望都古墳壁畵)>에서 그 원류를 확인할 수 있다. <망도 고분벽화>의 서체는 완전한 팔분이다. 변방의 경우 대부분 팔분과 예서와 해서가 혼합된 서체가 일반적이다. 당시 서법은 위·진의 서체를 중심으로 형성된 남조의 서체와 북위를 중심으로 형성된 북조의 서체로 나뉘어 서로 다른 독특한 서법으로 발전하였다. 중원의 서사문화를 대표하는 소위 남조체는 유송(劉宋)·제(齊)·양(梁)·진(陳) 등에서 강남(江南) 서파(書派)의 조종(祖宗)인 종요(鍾繇)와 왕희지(王羲之)·왕헌지(王獻之)·왕승건(王僧虔) 등의 글씨를 중심으로 형성된 묵필 위주의 해서·행서·초서 등의 가는 필획과 유려한 결구와 장법이 유행하였다. 그러나 북조체는 조상기(造像記)와 묘지명 등 금석문을 중심으로 굵은 필획의 강렬하고 웅강한 서법의 해서를 주로 사용하여 그 특징을 달리하였다. 중원의 서사문화는 왕희지와 왕헌지 부자의 필법이 대표하는데 이체자가 적고, 결구도 방정하며, 글자의 생성 과정도 육서법(六書法)을 잘 따르고 있다. 반면, 변방의 서법인 소위 북조체는 조상기·묘지명(墓誌銘) 등 금석문을 대표하는 이체자가 많은 변방 서법의 서사문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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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비(414)
광개토대왕비(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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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삼국시대에는 대륙 중원에서도 서체의 변화가 많고 안정되지 못한 시기이다. 예서와 팔분, 초서, 그리고 행서와 해서가 병용되던 시기에 해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글 자체로 구분하기보다는 기록의 양식에 따라서 기념기록과 생활기록, 그리고 사경기록으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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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우총 출토 청동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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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우총 출토 청동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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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우총 출토 청동솥 바닥 글씨
호우총 출토 청동솥 바닥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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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기록은 영구적인 기록으로 오래 전할 만한 내용을 금석에 기록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념기록에는 예서나 해서가 주로 사용되었다. 예서는 서양에서 사용하던 고딕체와 같은 서체로 알아보기 쉽게 표제에 많이 사용하는 서체이다. 해서는 명석서(銘石書)라고도 하는데 석비와 같은 기념기록에 사용하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기념기록으로 <광개토왕릉비>는 그 석비의 규모가 동양 최대이다. 이렇게 웅장하여 압도적인 석비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규모가 대단하다. 자체가 예서로 12∼13㎝ 정도의 큰 글자이다.

예서는 서양의 고딕과 같은 자체로 표제에 많이 사용되어온 자체인데 <광개토왕릉비>에서는 전서법, 초서법, 해서법 등이 함께 사용된 점이 특징이다. 예서체로 쓰여진 <경주 호우총 호우명 청동솥>은 고구려에서 만들어 신라로 보내진 것으로, 역시 기념기록의 개념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같은 기념기록이라도 <충주 고구려비>(5세기 중반)·<평양성 각석>(589)은 해서로 썼다. 기념기록에 사용한 예서는 낙랑의 <점제현신사비>와 낙랑 <벽돌 명문>에서 원류를 찾을 수 있다. 이 기록들은 낙랑과 고구려에서 어떤 사건을 기념하여 제작된 것으로 예서나 해서로 쓰여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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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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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기록에 해당하는 <안악3호분 묵서>(357)·<덕흥리고분 묵서>(408) 등에는 해서나 행서를 사용하였다. 이들은 생활기록의 예로 볼 수 있으며 일상생활에 사용하는 서체로 행서나 초서가 사용되었다. 행서와 초서는 쓰기에 편리하지만 초서는 읽기에 불편하여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고구려 전성기에 조성된 이들 묵서는 당시의 서사문화를 파악하고 인접국과의 교류를 유추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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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루 묘지
모두루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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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 중원의 위진남북조 시기는 예서·팔분·초서에서 해서·행서로 전이되는 과도기였다. 당시에는 초서와 예서를 일상생활에 상용하면서 해서·행서라는 필법이 정연하게 갖추어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고구려에서 필사된 묵필본인 <안악3호분 묵서>·<덕흥리 고분 묵서>·<모두루 묘지>(5세기 전반) 등 3벽화의 예가 있다.

이 시기는 예서·팔분·초서·행서·해서를 구분없이 혼합하여 상용하던 시기이다. 고구려의 해서는 필획에 있어서 왼쪽삐침이 오른쪽삐침보다 굵게 강조되어 있다. 그래서 결구가 왼쪽으로 기울어 있는 특이한 결구다. 해서와 행서법을 사용한 <안악3호분 묵서>·<덕흥리 고분 묵서> 등은 생활기록에 일반적으로 사용한 서법이다. 특히, 해서의 서법은 북조법이 많이 사용되었다. 북조의 해서법과 유사한 예로는 필획보다는 결구에 있어서 북조의 필법을 많이 발견할 수 있는데 북위가 지배적이다. 팔분법과 혼용한 점은 고구려의 특징적인 결구법으로 북조의 결구법에서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대체로 이러한 특징은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 대륙 중원 동북지방의 금석에서 많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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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 호로고루성 출토 기와명문(400년대)
연천 호로고루성 출토 기와명문(40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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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루 묘지>의 서법은 해서이며 사경체에 해당한다. 4∼5세기 대륙에서는 동진(317∼420)과 남북조(420∼589) 중기에 이르는 시기로 전서와 예서가 쇠퇴하고 초서·행서·해서는 기본적인 완성을 이루는 시기다. 당시 고구려에서도 이와 비슷한 서체의 변천이 진행되고 있었다. 당시 대륙에서는 해서가 상용되고 예서는 일반적으로 쓰이지 않았던 시기이다. 고구려에서도 같은 시기에 쓰여 진 <모두루 묘지>가 해서로 된 점에서 보면 역시 해서를 상용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당시 고구려에서 사용된 해서체는 루난(樓蘭)의 유지에서 발견된 <경원4년명 목간(景元)4(年銘木簡)>(263)·<이백서(李栢書)> 등의 서체와 관계가 깊다. 이들의 서사문화는 사경의 전래와 수용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5세기 초에 해당하는 <광개토왕릉비>의 서체와 묵서명은 거의 같은 시대에 조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다른 서체의 양상을 보여준다. 수필본의 묵서인 고구려 고분벽화 명문은 4세기 중반에서부터 5세기 전반에 이르는 유물이다. 여기에 사용된 서체는 같은 시대 대륙 중원의 변방의 서사문화에 속하는 것이다. 대륙 중원에서도 해서가 상용되고, 예서는 일반적으로 쓰이지 않았던 시기이다. 고구려에서도 같은 시기에 쓰여진 고구려 고분벽화 명문이 해서로 된 점에서 보면 역시 해서를 상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강(岡)’·‘삼(彡)’·‘손(孫)’·‘수(燧)’·‘양(陽)’ 등의 결구는 고구려에서 매우 특징적으로 사용된 서사법이다. 필획은 해서의 필획을 따랐고 결구는 <광개토왕릉비>의 예서결구와 유사한 자형이 많다. 특히, 고구려의 서사문화는 ‘부(阝)’와 ‘절(卩)’, ‘물(勿)’과 ‘시(豕)’를 구분 없이 서사하였고, ‘삼(彡)’·‘시(尸)’과 같은 독특한 글자를 사용하였다. 이러한 점이 다른 지방이나 다른 시대에 보이지 않는 고구려의 독특한 서사문화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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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왕릉 출토 벽돌명문(400년대)
태왕릉 출토 벽돌명문(40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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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경체는 사경에 주로 사용하던 서체로 해서에 해당하는데, 사경승에 의하여 쓰여졌다. 사경체는 <모두루 묘지>와 <정릉사지 출토 금니사경>의 예가 있다. 사경체는 해서인데 부처님의 말씀을 적는 행위로 매우 경건하게 이루어졌다. 그래서 사경체는 변화가 없이 그 격식에 맞추어 쓰여진다. 사경체는 크게 두 가지의 서체 유형이 있다. 대륙에서 3∼4세기에 유행한 사경체는 아직 팔분의 파세가 남아있는 해서로 <모두루 묘지>와 유사한 사경체이다. 다른 한 종류는 해서의 필획을 완전하게 갖춘 해서로 위의 <정릉사지 출토 금니사경>의 예가 있다. 해서 사경에 있어서도 북조의 금석문 서체가 있고, 남조의 서첩 필법인 남조체가 있다.

사경체의 필법은 북조체와 다른 양식이다. 위진남북조의 사경서법으로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글자의 마지막 필획을 굵게 써서 강하게 표현하는 예는 위진남북조시대의 사경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필법이다. <모두루 묘지>의 서법은 예서의 경향이 있는 해서로 나는 듯한 생동감과 박력있는 가로 횡획과 왼쪽삐침에서는 예서의 필의를 그대로 지니고 있으며, 예서에서 해서로 옮겨지던 상황을 잘 나타내고 있다. 중국에서도 이 시기의 사경 중에 자주 볼 수 있는 서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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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고구려비
충주 고구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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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경은 불교의 전래와 수용과 관계가 있다. 372년 소수림왕 때 불교가 공인된 것으로 보는 것이 현재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안악3호분 묵서>와 같은 필적을 통해 보면 고구려에 불교가 372년보다는 훨씬 이른 시기에 수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예들은 서진의 <비유경권(譬喩經卷)>(256)과 돈황 장경동(敦煌藏經洞)에서 발견된 <마아반야밀타경(摩阿般若密陀經)>,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296), 신강 토곡구(新彊吐谷溝)에서 출토된 <제물요집경(諸物要集經)>과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 등의 사경, <전국책사본(戰國策寫本)>·<영가6년명 지편(永嘉)6(年銘紙片)>(312), 북량(北凉)의 <우파색계경잔편(优婆塞戒經殘片)>(325∼334), 서량(西凉)의 <묘법연화경>(411), 동진의 안홍숭(安弘嵩)이 쓴 <사경잔권(寫經殘卷)>, 북위의 사경으로는 <정법화경 광세음보살보문품(正法華經光世音菩薩普門品)>이 있고 <화엄경>(523) 등의 예에서 유사한 필법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경은 불교의 수용과 관계가 있다. 불교의 사경을 통한 서사문화의 수용은 태학과 경당을 통한 경전의 학습방법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러한 서사문화는 고구려인들의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서사하는 방법으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묵서는 한(漢) 목간의 서법과 위진남북조의 사경서법과 관계가 있다. 사경의 서체와 유사한 고구려의 서사법을 통하여 당시 불교가 얼마나 일반화되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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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고구려비 탁본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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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에서 중원의 문화와 변방의 문화는 분명히 구별된다. 서사문화에 있어서도 중원이 서법 위주의 필법이라면 동북 변방의 서사문화는 기록 위주의 필법이 많다. 중원의 입장에서 보면 필획법이 서툴고 필법이 잘 지켜지지 않은 글씨가 동북 변방에서 사용된 서사법이다. 북조의 서법도 변방에서 일어나 중원에서 정리되어 해서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고구려 고분벽화 명문의 경우도 변방의 서사문화로 필획과 결구가 정리되지 않았다. 서체도 예서나 팔분과 초서를 혼용하던 시대에서 해서를 일상 생활에 사용하던 과도기에 서사된 묵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벽화명문을 서사하는 과정에서도 서체의 구사가 일률적이지 못하다. 특징으로 ‘삼(彡)’·‘질(叱)’·‘시(尸)’ 등 의 사용은 한어법이 아닌 고구려에서 독창적으로 사용된 문장서사법으로 보인다. 이는 그 당시 언어 표현 방법을 대변해 준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의 고분 벽화는 통치지배 계급의 일상 생활 모습을 그렸으며 묵서도 당시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생활서체로 필사하였다. 격식이나 위엄보다는 일상 생활에 사용하던 서체 그대로를 사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한 서체는 사경의 서법이 많은 서체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는 예서·팔분·초서·행서·해서 등을 구분없이 혼합하여 상용하던 시기다. 특히, 가로획법·왼쪽삐침법·오른쪽삐침법 등에 있어서 해서법이 많고 왼쪽갈고리법은 팔분법이 주로 사용되었다.

북조의 해서법과 유사한 예로는 필획보다는 결구에 있어서 북조의 필법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그것도 북위의 필법이 지배적인 것은 고구려와 북위의 교섭에 있어서 장수왕과 문자왕에 걸친 약 100년 간 75회라는 역대 왕조 중 가장 오랜 기간 교류에서 찾을 수 있다. 해서·행서의 필법을 갖춘 예로는 대륙 중원에서는 해서가 상용되고 예서는 일반적으로 쓰이지 않았던 시기이다.

고구려에서 사용된 인장인 <동제군사마인>·<동제진고구려솔선천장인>·<동제진고구려솔선백장인> 등에 사용된 서체는 모두 무전(繆篆)과 유사한 예서가 사용되었다. 재질은 청동인과 석인이 주로 사용되었으며 이들은 당시의 관인으로 사용하던 인장들이다. 청동은 주물로 만들었으며 석인은 도자로 새겼다. 인장의 손잡이에는 인끈을 꿰어 허리에 차고 사용하였으며 관리의 상징이 되기도 하였다.

고구려의 문화는 회화·조각·공예·건축 등 문화 전반에 걸쳐 한반도의 전역과 일본에 영향을 주었다. 백제 한성시기의 돌무지무덤, 공주·부여의 무덤 벽화, 신라의 순흥 고분 벽화, 불국사에서 볼 수 있는 장군총과 유사한 그랭이석축법, 천마총의 주작도 등은 고구려와 유사한 기법이다. 가야 고령 고아동 석실고분 연화문, 발해 수막새 기와의 양각 연꽃무늬도 고구려의 기와와 같은 양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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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성 출토 고구려 명문(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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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성 출토 고구려 명문(475)
아차산성 출토 고구려 명문(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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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4년명 금동삼존불입상(景四年銘金銅三尊佛立像)(503, 국보 제85호)
경4년명 금동삼존불입상(景四年銘金銅三尊佛立像)(503, 국보 제8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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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4년명 금동삼존불입상(景四年銘金銅三尊佛立像) 명문(503, 국보 제85호)
경4년명 금동삼존불입상(景四年銘金銅三尊佛立像) 명문(503, 국보 제8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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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문화가 일본에 미친 영향에 대해 동경대학교 하니하라 가쓰로(植原和郞) 교수는 「한반도를 경유한 아시아대륙인」에서 “인류학적 시각에서 고찰해 보면 한반도를 통해 일본으로 건너온 이주민들과 일본 원주민의 비율은 대략 85%대 15% 정도이고 또 이주민들은 나라시대까지도 한복을 입고 한국음식을 먹었으며 심지어는 한국말까지 사용하였다. 또 『고사기』·『일본서기』·『만엽집(萬葉集)』 등에 아직 조작되지 않은 부분은 한국어의 한국식 한자 용어가 남아있다.”고 주장하여 일본 고대문화와 한반도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다.

4세기 후반 본격화된 고구려의 남하정책으로 지식인·기술자뿐만 아니라 건축양식·철소재 등 선진문물이 일본에 전래되었다. 환두대도나 채색된 벽화고분은 중국에서는 전한부터, 한반도에서는 고구려부터 시작되어 삼국시대에 유행하였다. 5세기 전반 고구려의 단야기술, 금동제 장신구 등의 공예기술과 생산기술도 한반도에서 전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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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延嘉七年銘金銅如來立像)(539, 국보 제119호)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延嘉七年銘金銅如來立像)(539, 국보 제1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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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정복활동은 일본 창조신화의 무대가 되는 섬인 아와지시마(淡路島)와 일본 중심인 쯔구시까지 미쳐 있었고 반정천황(反正天皇)은 고구려 계통의 천황으로 알려져 있다. 고구려가 왜로 진출한 것은 당시 고구려 계통의 유물이 일본 지역에서 많이 나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부산 복천동 고분에서 출토된 갑주(甲冑)와 같은 것이 5세기 후반 일본의 오사카·나라 등의 고분에서 대량으로 출토되었고, 마주(馬冑)도 와까야마현 대곡고분에서 출토되는 것은 이를 말해 준다.

고구려인 두무리야폐(頭霧唎耶陛) 등이 쯔구시(규슈의 옛 지명)에 투화하여 야마시로국에 배치되었으며 지금의 무원(畝原)·나라(奈羅)·산촌(山村) 등은 고구려인의 선조다. 일본 또한 중국을 갈 때 고구려를 경유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응신천황(應神天皇)은 아지사주(阿知使主)와 도가사주(都加使主)를 오(吳)에 보내 봉공여(縫工女)를 구할 때 고구려왕이 구례파(久禮波)·구례지(久禮志)로 하여금 그들을 인도하게 하였다. 일본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기술자를 불렀고, 삼한에 학승(學僧)을 보냈으며, 고구려에서 투화 한 고구려인 56명을 상목국(常睦國)에 살게 하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고구려 사신인 안정(安定)이 일본에 내조하여 수호를 맺었으며 고구려의 국서(國書)도 발송되었다. 또한, 고구려에서 일본의 사신을 후한 예로 대접하였다는 사례는 상호 교류 관계를 대변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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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강7년명 금동불상 명문(永康七年銘 金銅佛像)(551)
영강7년명 금동불상 명문(永康七年銘 金銅佛像)(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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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카(飛鳥)는 야마토(大和)조정이 헤이조쿄(平城京)로 천도하기 약 200년 전에 도읍했던 곳이다. 그곳의 70∼80%가 도래인이었다는 『일본서기』의 내용을 통해 당시 아스카의 상황을 잘 알 수 있다. 아스카의 다카마쓰(高松塚) 고분벽화가 5∼6세기 경 고구려 화법이라는 것은 학계의 일치된 견해이다. 뿐만 아니라 불교가 전해지는 5세기 초 아스카에 거주하던 백제에서 건너간 승려·노반박사(鑪盤博士)·와박사(瓦博士)·화공(畵工) 등은 일본에 사경·회화·조각·공예·건축 등 많은 불교문화를 수반하였다. 특히, 584년 소가우마코(蘇我馬子)의 사저에 불전을 신설하면서부터 소가노우씨와 왕족들을 중심으로 숭불정책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신문화가 수용되었다.

『일본서기』에 “고구려는 일본에 군후(軍候)·횡적(橫笛)·막목(莫目)으로 춤을 반주하는 음악을 전해 주었고, 담징(曇徵)과 법정(法定)을 일본에 보냈는데, 담징은 오경(五經)을 잘 알고 있으며, 채색 및 지묵을 만들고 수력의 맷돌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담징이 그린 일 본 호류사(法隆寺)의 금당벽화가 있고, 가서일(加西溢)이 밑그림을 그렸다는 <천수국만다라수장(天壽國曼茶羅繡帳)> 등의 유적을 통해서 고구려 문화의 일본 전래와 수용을 알 수 있다.

당시의 대표적이며 최신식 건축이었던 아스카사의 건물 배치는 1탑3금당식(一塔三金堂式)의 초석기단 건물로 고구려의 가람 양식이다. 고구려 동명왕릉 앞의 정릉사지(定陵寺址)나 금강사지(金剛寺址)는 남북으로 놓인 축상에 문·탑·당을 차례로 세운 형식의 가람배치이고, 평양시 동쪽 청암리 토성 안에 위치한 청암리사지(淸巖里寺址)는 팔각전을 중심으로 동·서·북의 3면에 금당을 배치한 일탑 중심 동서북삼금당식(東西北三金堂式) 가람배치이다. 이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절인 아스카사의 배치와 같다. 고구려의 승려 혜자는 일본에 귀화하여 쇼토쿠(聖德)태자의 스승이 되었으며 백제의 혜총(慧聰)과 함께 불교를 포교하여 불법의 동량이 되었다.

아스카문화의 중심을 이룬 것은 사천왕사·법흥사·봉강사(광륭사)·반구사(법륭사)·원흥사·금강사 등과 같은 많은 문화유산들이다. 특히, 아스카문화의 극치인 회화는 백제뿐만 아니라 고구려인의 문화가 어려 있는 유산들이다. 이러한 사실은 수이고(推古朝)가 불상의 조영에 착수하자 고구려 대흥왕(大興王, 瓔陽王)이 황금 300냥을 보냈고, 또한 아스카문화의 건설을 미술 방면에서 돕기 위하여 고승 담징을 보내 그린 법륭사 금당벽화와 약사상·석가삼존상이 있다는 데에서 추측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일본은 고구려·백제·신라와 정치적·문화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6∼8세기 일본 명문에 나타난 고구려 서법을 살펴보면 백제는 물론 고구려와 신라를 통하여 일본에 많은 문화가 전래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서사문화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헤이조쿄 유적에서 출토된 배 모양의 먹은 정창원에 소장 중인 신라 먹과 같은 것이다. 벼루의 경우도 신라나 백제와 같은 양식으로 흙으로 구운 수족원형연(獸足圓形硯)이다. 이는 표면이 거칠어 아마도 북방민족들이 사용하던 고구려의 서사용구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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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성 홍련봉2보루 출토 명문토기(520)
아차산성 홍련봉2보루 출토 명문토기(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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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문화의 일본 전래는 문헌과 출토유물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서사문화와 토기·묘제·건축·회화·조각 등에 이르기까지 고구려의 문화는 전반에 걸쳐 일본에 전래되었다. 서법에 있어서도 <계미명 인물화상경(癸未銘人物畵像鏡)>(503)·<신해명 금상감철검(辛亥銘金象嵌鐵劍)>(531)·<은상감철검(銀象嵌鐵劍)>(507∼531)·<갑인년명 금동석가상광배(甲寅年銘金銅釋迦像光背)>(594)·<무자명 석가여래협시상(戊子銘釋迦如來挾侍像)>(628)·<우치교단비(宇治橋斷碑)>(646)·<약사사 동탑찰주(藥師寺東塔刹柱)>(680)·<산상비(山上碑)>(681)·<무술년명 경도묘심사범종(戊戌年銘京都妙心寺梵鐘)>(698)·<나수국조비(那須國造碑)>(700)·<위나대촌 묘지(威奈大村墓誌)>(707)·<다호비(多胡碑)>(711)·<승도약 묘지(僧道藥墓誌)>(714)·<일본서기(日本書記)>(720)·<아파국조비(阿波國造碑)>(723)·<김정택비(金井澤碑)>(726)·<대안사가람연기 및 유기자재장(大安寺伽藍緣起幷流記資財帳)>(747)·<다하성비(多賀城碑)>(762)·<우치천마애경비(宇治川磨崖經碑)>(778)·<기조신길계녀 묘지(紀朝臣吉繼女墓誌)>(784)·<신라 송산촌범종(新羅松山村梵鐘)> 등이 있다. 또한, 6∼8세기 고대 일본 명문에는 이체자와 특이한 결구에서 고구려의 서법인 <광개토왕릉비>(414)·<건흥5년명 석가금동여래상광배(建興五年銘釋迦金銅如來像光背)>(476)·<연가7년명 금동여래상광배(延嘉七年銘金銅如來像光背)>(539)·<고구려 벽화명문> 등에 표현된 서법이 자주 사용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사이다마현 이나리야마(埼玉縣 稻荷山)고분 출토 명문철검>(417)은 115자의 금상감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 명문들도 <광개토왕릉비>의 결구법으로 고구려의 서사문화와 매우 유사하다. 특히, ‘기(記)’와 같은 정사각형 결구법, ‘획(獲)’과 같은 좌소우대형(左小右大形), ‘의(意)’·‘귀(鬼)’·‘아(兒)’ 등의 상대하소형(上大下小形) 결구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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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성 홍련봉2보루 출토 명문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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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신해명 금상감철검(辛亥銘金象嵌鐵劍)>· <은상감철검(銀象嵌鐵劍)>·<일본서기>에 사용된 ‘궁(弖)’은 일반적으로 ‘저(氐)’라고 읽혀지는데 무슨 글자인지는 모르나 대부분 고유명사에 사용되었다. 이는 고구려 <광개토왕릉비>를 비롯하여 다른 명문에서도 같은 경우이다. 『일본서기』에 자주 보이는 ‘질(叱)’의 경우도 고구려 <안악1호분 현실동서벽>·<이성산성 목간>·<덕흥리 벽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신라의 명문에 자주 쓰이는 것으로 이는 ‘곳(㖜)’·‘곳(廤)’·‘곳(蒊)’ 등의 예와 같이 닷 소리의 종성어미로도 사용되었으며, 이는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일본 소재 <이나리야마고분 출토 철검(稻荷山古墳出土鐵劍)> 명문과 <후나야마고분 출토 은상감대도(船山古墳出土銀象嵌大刀)> 명문의 서체는 고구려와 백제, 신라 명문의 서체와 관계가 깊다. 이 명문들에도 고구려에서 독특하게 사용된 <광개토왕릉비>의 필획법과 결구법이 사용되었다.

결구는 전반적으로 정사각형의 <광개토왕릉비>나, 마름모꼴의 <적성비>와 유사한 결구가 많다. 특히, <이나리야마고분 출토 철검>의 ‘死’로 서사된 결구는 <거연한간>에서 사용되었고, 고구려의 석각인 <광개토왕릉비>·<농오리석각> 등과 신라의 <남산신성비>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결구다. <후나야마고분 출토 은상감대도> 명문의 서체는 고구려의 서법이 주를 이룬다. 고구려의 서법은 서한의 필법이 고구려 초기에 많이 수용되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전고구려 벽비(壁碑)>와 <아장승열반축봉기(阿丈僧涅槃築封記)>의 서체도 같은 필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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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농오리산성 마애각석(300년대 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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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 각석(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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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리야마고분 출토 철검>명문에서 ‘호이가리획거(互已加利獲居)’의 ‘호(互)’, <후나야마고분 출토 은상감대도>명문의 ‘공(工)’ 등은 그 글자의 발음이 ‘こ’·‘ご’ 등과 같은 음이다. 이러한 예는 한자의 구별 없이 음차하여 사용된 예로 이두에서 많이 사용되는 차자표기법이다.

착법(辶法)의 필획과 ‘강(岡)’·‘인(寅)’의 특이한 결구, ‘부(部)’를 ‘절(卩)’로 사용한 예, ‘서(誓)’의 상소하대형(上小下大形)이나 ‘오(奧)’와 같은 상대하소형의 결구법, ‘획(獲)’과 같은 좌소우대형(左小右大形) 등의 결구법, ‘육(肉)’을 ‘육(宍)’으로 쓰는 서사법은 고구려 <집안 사신총 현실 남측천정 묵서명>에서 처음 확인할 수 있고, ‘호(号)’와 같은 간자는 고구려 <광개토왕릉비>에서 가장 이르게 확인할 수 있는 결구다. 이러한 특이한 결구와 간자·이체를 통하여 한 시대의 서사문화의 전래와 수용을 확인할 수 있다. 6∼8세기 고대 일본의 서법은 필획과 결구가 고구려 서법의 범주에 있다. 일본에서는 이러한 고구려 서사법이 부분적으로 가마쿠라시대에 이르러서까지도 일상생활의 서사에 사용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나리야마고분 출토 철검>과 <후나야마고분 출토 은상감대도>는 당시 고구려에서 유행하던 기록 문화로서 고구려의 손에 의하여 제작되었거나 고구려의 기록문화를 수용한 백제, 혹은 신라인의 손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한반도의 문화는 이 두 유물에서 뿐만 아니라, 나라 호류사의 일본 국보 <옥충주자불감>(7세기)과 <호류사 금당 벽화>, 주구사(中宮寺)에 소장된 <천수국 만다라수장(天壽國曼茶羅繡帳)>(622), <다카마쓰(高松) 고분벽화>(7세기 후반∼8세기 초) 등으로 7세기 일본을 주도했던 고구려 문화이다. 이처럼 고구려의 서사문화는 토기·묘제·건축·회화· 조각 등과 아울러 걸쳐 일본에 전래되었다. 곧, 6∼8세기 일본 고대명문에 나타나는 독특한 결구·이체·간자 등에서 고구려의 서법임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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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 각석(589)
평양성 각석(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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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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