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7권 한국 서예문화의 역사
  • 1 고대의 문자생활과 서체
  • 02. 삼국시대의 문자생활과 서체
  • 백제
손환일

백제는 일찍부터 문자생활을 하였다. 근초고왕(346∼375)대에는 박사 고흥(高興)이 서기(書記)를 편찬하였고, 384년(침류왕 원년)에는 동진(東晉)의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불교를 전하였다. 이러한 수준 높은 문자 생활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오랫동안 영위되어 발생한 문화이다. 기원 전 2세기 말 진국(辰國)이 한(漢)에 통교를 희망하는 국서(國書)를 보낸 사실, 나라(奈良) 이소노카미진구(石上神宮)의 칠지도(七支刀), 백제 한성시기의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井’·‘大夫’ 명문과 압인와, <인천 계양산성 논어 목간>(400) 등은 이를 입증해 준다. 특히, 사경체인 논어 목간을 통하여 매우 이른 시기부터 『논어』가 보급되어 문자생활이 대중화되었으며, 불교의 수용이 이미 400년 이전에 있었음을 말해 준다.

백제의 기록문화는 기념기록인 금석문과 생활기록인 목간, 사경기록인 사경 등을 통하여 살필 수 있다. 사경기록으로는 익산 왕궁리 5층석탑에서 발견된 <금제금강경>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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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왕명 사리감 탁본(567)
창왕명 사리감 탁본(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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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 지석 탁본(523)
무령왕릉 지석 탁본(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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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 지석(왕비) 탁본(526)
무령왕릉 지석(왕비) 탁본(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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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 지석(왕비) 탁본 후면
무령왕릉 지석(왕비) 탁본 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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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지약아식미기> 목간






























使





小吏
治豬








使





牟牟
祋氏
































(大)
‘支|
藥|
兒|
食|
米|
記|’





















4면 3면 2면 1면
<표> <좌관대식기> 목간

































 














 


後面
<표> <좌관대식기> 목간


















一石























二石



未二




前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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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능산리사지 출토 계송목간(538∼567)
부여 능산리사지 출토 계송목간(538∼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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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능산리사지 출토 계송목간(538∼567)
부여 능산리사지 출토 계송목간(538∼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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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능산리사지 출토 주술목간 부분 봉의(奉義, 538∼567)
부여 능산리사지 출토 주술목간 부분 봉의(奉義, 538∼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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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기록인 금석문은 <무령왕 묘지>(525)·<창왕명 석조사리감>(567)·<부여 왕흥사지 출토 청동사리함>(577)·<익산 미륵사지석탑 진신사리봉영기>(639)·<사택지적비>(654) 등을 통해 볼 때 위진남북조시대의 세련된 해서법을 사용하였다. 이 중에서 <무령왕 묘지>·<창왕명 석조사리감>·<부여 왕흥사지 출토 청동사리함> 등은 돌에 새긴 것으로 명석서(銘石書)의 개념이다. 이들에 사용된 서체는 당시의 문자생활을 보여주는데 내용과 필법(筆法), 도법(刀法)을 통한 백제의 서사문화는 지금과 달랐다는 것을 살필 수 있다.

생활기록은 목간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인천 계양산성 논어 목간>·<부여 능산리 출토 목간>(538∼567)·<금산 백령산성 출토 목간>(596∼598)·<나주 복암리 출토 목간>(610)·<부여 쌍북리 출토 목간>(618)·<부여 관북리 출토 목간>(7세기)·<부여 현내뜰유적 출토 목간>(7세기)·<부여 궁남지 출토 목간>(7세기)·<부여 동남리 출토 목간>(7세기)·<익산 미륵사지 출토 목간>(7세기) 등이 대표적이다. 그 중에서도 부여 능산리에서 출토 목간된 <지약아식미기>(567)와 쌍북리에서 출토된 목간 <좌관대식기>(618)는 완전한 문서형식을 갖추고 있다.

기념기록과 생활기록으로 대별하여 백제의 기록문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고대의 붓과 도자는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 붓 3자루와 도자 1자루, 함안 성산산성에서 붓 2자루와 도자 1자루, 왕흥사지에서 2자루의 도자가 출토되었다. 이러한 서사도구로 행정이나 교역품의 물품목록을 목간에 기록하였을 것이다. 목간은 붓으로 서사한 이른 시기의 묵적에 해당한다.

기념기록 중에서도 도자로 새겨진 유물로는 『한국의 고대 목간』 <부여 능산리사지 출토 목간>에 ‘봉의(奉義)’가 있다. ‘봉의’의 각획을 보면 한 번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필획의 상하좌우면이 여러 차례 도자를 사용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경우는 새겼다고 할 수 있다. 역시 도자로 쓰듯이 긁어 표시한 것도 새겼다고 할 수 있다. 후자의 경우와 같이 <청동제 사리함 명문>은 도자를 사용하여 일획을 일필로 그어 ‘쓰듯이 새긴’ 것으로 <부여 능산리사지 출토 목간>과는 도법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도법은 ‘쓰듯이 새긴’ 것이다. 붓 대신 도자를 사용한 것으로 일필로 한 획을 완성하였는데, 도구가 다를 뿐이지 필법을 지켜 도자로 쓰듯이 새겼다. 그러나 <부여 능산리사지 출토 목간>의 ‘봉의’는 쓴 것이 아니라 도자를 여러 번 사용하여 새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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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능산리사지 출토 주술목간(538∼567)
부여 능산리사지 출토 주술목간(538∼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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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능산리사지 출토 주술목간(538∼567)
부여 능산리사지 출토 주술목간(538∼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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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왕흥사지 청동사리함 명문>의 서체는 <부여 능산리사지 출토 목간>·북위의 <안락왕묘지>·<무령왕 묘지>·<무령왕릉 매지권>·<무령왕비 묘지> 등과 서사 시기가 가까워 백제 서사문화의 이해에 도움이 된다. 필법에 있어서도 대륙의 중앙 문화와의 차이가 많지 않다. 기본적으로 필획과 결구와 장법이 <부여 능산리사지 출토 목간>과 <안락왕 묘지>·<무령왕 묘지>·<무령왕릉 매지권>·<무령왕비 묘지> 등과 같은 것이다. <부여 왕흥사지 청동사리함 명문>은 서사 시기가 이들 명문과 큰 차이가 나지 않아서 같은 시대의 서사 유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 필법은 북위 조정의 중앙 서사문화의 북조서법이 지배적이며, 남조서법도 혼용하여 서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상의 서술로 통해 볼 때 마치 백제의 서사문화가 대륙의 그것을 그대로 답습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특히, 지배적인 북조서법, 남조서법도 혼용이라는 표현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생각되어 백제의 서법이 중국과 다른 점에 대하여 지적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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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왕흥사지 출토 청동사리함
부여 왕흥사지 출토 청동사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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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왕흥사지 출토 청동사리함 명문 부분
부여 왕흥사지 출토 청동사리함 명문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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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백제의 서체가 북조서법, 남조서법과 구분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연구는 궁극적인 목표에 해당한다. 그러나 서체는 회화나 조각, 건축 등의 양식과 달리 매우 표현이 섬세하여 특징의 구분이 어렵다. 해서의 요점은 ‘영자팔법(永字八法)’에 있다. ‘영자팔법’은 필획의 용필법으로 필획마다 모두 정해진 특징적인 필법이다. <부여 왕흥사지 청동사리함 명문>이 중국의 서법과 다른 점을 필획과 결구로 구분하여 살펴보면 백제 서체의 특징을 파악할 수 있다. 각자(刻字)에서 거론하였지만 중국의 서법, 특히 <안락왕 묘지>의 경우도 팔법의 필획과 결구가 획일적인 모양이다. 그러나 <사리함 명문>은 같은 글자라 하더라도 필획이 자유분방하여 모양이 불규칙하고, 결구도 서로 다른 것이 특징이다.

<부여 왕흥사지 청동사리함 명문>을 통하여 “577년 2월 15일 백제 위덕왕 창(昌)이 죽은 왕자를 위해 사찰을 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목탑지의 심초석 밑 사리안치석의 사리공에 안치된 이 명문은 붓 대신 도자를 사용하여 쓴 것이다. 도자의 모양은 다호리에서 출토된 도자와 같은 것이다. 서체는 북조체가 주류이나 남조체의 필법이 가미되어 있는 것은 <무령왕릉 묘지>와 같은 서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서사문화 현상은 당시 백제의 문화가 남조보다는 북조의 서사문화에 익숙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부여 왕흥사지 청동사리함 명문>의 필획은 기본적으로 대부분 북조필획을 구사하고 있으며, 장두호미법을 알고 있었다. 이 명문의 가로획과 같이 강조되는 필획은 기본필법을 잘 지키고 있으며 대부분 중봉의 도법이다. 그러나 짧은 필획은 남조에서 유행한 남조법으로 대부분 노봉을 사용한 편봉의 도법이다. 이는 명문에 사용된 삐침이 중봉의 도법을 사용한 예에서도 잘 나타난다. 필획의 방향이 바뀌는 곡척에서는 도자를 떼었다가 방향을 바꾸어 행필하였거나 작은 필획은 절법(折法)을 사용하였고, 필획이 큰 것은 전법(轉法)을 사용하였다. 절법이 아니라 전법을 사용한 것은 도자라는 서사도구의 특수성 때문이다. 필획법은 북조의 필획법이 주로 사용되었으나 어떤 부분은 남조의 필획법도 혼용되었다. 곧, <부여 능산리사지 출토 목간>·<안락왕 묘지>·<무령왕 묘지>·<무령왕비 묘지>·<무령왕릉 매지권> 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결구는 대부분 정사각형의 예서결구이거나 갸름한 직사각형이다. 북조체의 영향을 받아 세로획이 강조된 마름모꼴 결구는 <부여 왕흥사지 청동사리함 명문>[월(月)]·<왕흥사지 청동사리함 명문>[사(舍)]·<왕흥사지 청동사리함 명문>[시(時)]·<왕흥사지 청동사리함 명 문>[화(化)] 등을 지적할 수 있다. 정사각형의 결구는 북조결구이고 갸름한 직사각형의 결구는 남조결구로 분류할 수 있다. 곧, 남북조의 결구가 혼용된 것이다.

장법은 남조의 행서·초서에 사용되는 자간이 좁고 행간은 넓은 남조장법이 사용되었다. <무령왕 묘지>·<무령왕비 묘지>·<무령왕릉 매지권> 등의 장법은 <부여 왕흥사지 청동사리함 명문>과 같이 남조에서 유행한 행서나 초서의 장법으로 남조장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안락왕 묘지>는 자간과 행간의 간격이 같은 북조장법이다.

도법은 새긴 것이 아니라 쓴 것이다. 즉, 도법을 필법과 같이 사용하였다. <부여 능산리사지 출토 목간>의 ‘봉의(奉義)’는 쓴 것이 아니라 새긴 것이지만, <부여 왕흥사지 청동사리함 명문>은 일필로 일획을 완성하여 도자로 쓴 것이다. 필획과 결구는 남북조의 필법이 혼용되었고, 장법은 남조의 장법을 사용되었으며, 도법은 필법과 같은 용필법으로 도자가 사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남북조의 서사문화가 혼합되어 사용된 점에서 당시 정세가 복잡하였던 대륙과의 문화교류를 유추할 수 있다.

백제 미륵사지석탑 발견 <석가모니 진신사리 봉영기>의 문체와 명문의 서체를 고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사리 신앙의 구현을 위하여 탑을 조성하면서 봉영한 <석가모니 진신사리 봉영기>는 3단락으로 구성되었다. 첫째 단락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세상에 환생하시게 된 동기와 목적, 그리고 공덕을 설명하고, 둘째 단락은 사찰을 조영하게 된 연유와 목적, 일시 등의 사실을 기록하였으며, 셋째 단락은 발원문을 기술하였다. 이것이 <석가모니 진신사리 봉영기>의 내용과 기록형식이다. 이 봉영기는 산문으로 ‘석가모니진신사리를 봉영한 기록’이며 ‘기(記)’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지약아식미기>와 <좌관대식기>에는 ‘지약아식미기’·‘좌관대식기’라는 기문에 표 제어가 있으나 <석가모니 진신사리 봉영기>에는 표제어가 없는 것이 서로 다르다.

<금정(金鉦)> 명문은 사리를 봉영할 당시 즉석에서 급하게 쓴 시주자의 즉각(卽刻)이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금석문이지만 <석가모니 진신사리 봉영기>와 같은 기념을 위하여 의식적으로 쓴 기념기록과는 달리 일상 생활에 사용된 생활기록의 서체이다. 그리고 금정의 명문은 <석가모니 진신사리 봉영기>의 각획과 달리 도자가 아닌 바늘로 긁어 쓰듯이 새긴 것으로 글씨의 크기가 매우 작으며, 각 획의 폭이 매우 좁고 깊다. 그러므로 이 글씨는 바늘을 사용하여 현지에서 급히 쓴 것으로 미루어 짐작되며, 전문 사경승의 글씨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필법은 ‘추획사(錐劃沙)’라는 것으로 마치 송곳으로 모래 위에 글씨를 쓴 효과와 같다. 이러한 필법은 중봉(中峰)의 일종으로 필봉이 누웠을 때 나타나는 편봉(偏峯·側峯)이 나타날 수 없다. 그러나 ‘惊’은 바늘이 아닌, 면이 있는 도자로 새겨졌다. ‘京’의 ‘小’에서 왼쪽 점인 호아세(虎牙勢)가 편봉이다. 이는 예리한 도자를 사용하여 세로획은 칼날을 세워 획을 그었고, 가로획의 호아세는 편도를 사용하였음을 알려 주는 것이다.

7세기부터 백제의 일반 생활기록인 목간 등에는 남조체가 사용되었고, 기념기록인 금석문에는 북조체가 사용되었다. 그런데 여기 <금정>에서는 기념기록인 북조체가 사용되었다. 이는 그만큼 기록의 성격이 짙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와 같이 금석문의 기념기록은 북조체를 주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7세기부터 일상 생활기록에서는 남조체를 사용하게 된다. 특히, 북조체의 수용은 ‘절부(卩部)’의 예를 논거로 하면, 고구려로부터 수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의 문화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화의 수용경로라고 할 수 있다. <금정>에 씌어진 글씨는 사리봉영 당시 즉석에서 바늘로 쓰듯이 새긴 것으로 대부분 북조필법 의 북조체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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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산성 출토 병진압인기와(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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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산성 출토 노성이문
백령산성 출토 노성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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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산성 출토 정사압인기와(597)
백령산성 출토 정사압인기와(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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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산성 출토 무오압인기와(598)
백령산성 출토 무오압인기와(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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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익산 미륵사지 석탑 사리공에서 크기와 형태가 다른 은합(銀盒) 5점과 동합(銅盒) 1점, 모두 6점의 <원형합>(높이 43㎜내외×지름 80㎜)이 발견되었다. 그 중에서 원형동합에 ‘상절부달솔목근(上卩部達率目近)’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는 ‘상부에 사는 달솔(16품 관등 중의 2품관) 목근’이 시주한 것으로 금정 중부(中部)의 덕솔(德率, 4品)이 시주한 ‘금일량(金一兩)’과 비교된다. 사리공에서 발견된 합은 소지품인데 이러한 원형합의 용도는 보석함으로 생각된다. 보석함 안에서는 유리구슬·마노·진주·금괴·호박·곡옥·금환·직물 등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즉, 상부에 사는 2품관 달솔 목근이 소지하고 있던 보석함이며, 내부의 보석들도 달솔 목근의 소유이었을 것이다. 글씨 또한 상부에 사는 달솔 목근의 글씨로 생각된다. 달솔 목근의 글씨를 필법과 각법에 대하여 필획과 결구로 나누어 살펴보면, 기본적으로 도자가 아닌 송곳으로 쓰듯 새긴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는 거의 필획의 강약이 표현되지 않았다. 다만, 기필과 수필, 필획의 방향이 바뀌는 전절법(轉折法)에 있어서 붓과 같이 구체적이지는 못하지만 부분적으로 필법과 각법을 살필 수 있다.

639년 당시 일상생활의 생활기록은 북조의 해서법과 <광개토왕릉비>와 같은 예서법이 혼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당시 문자생활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서사문화적 상황으로 대륙의 당은 이미 남조체가 유행하고 해서의 전성기였던 시기에 해당한다.

생활기록인 금산 백령산성에서는 압인와와 <‘상수와(上水瓦)’명 암기와>, 목간 등이 출토되었다. <백령산성>의 축성 시기는 압인와를 통해 볼 때, 위덕왕의 말년인 596년(위덕왕 43)부터 598년까지 3년에 걸쳐 축성되었다. 기와의 제작은 현지인 백령산성에서 제작된 것이 아니라 ‘나노성’·‘율현현’ 등의 지역에서 제작되어 백령산성으로 공출하여 축성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하여 위덕왕은 557년에 많은 건축과 축성을 진행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축성 공사는 국가의 중앙에서 직접 관여하여 진행되었다. <‘상수와(上水瓦)’명 암기와>는 관문서로 나노성(那魯城,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에서 금산 백령산성으로 기와를 구워 보내며 함께 보낸 이문(移文)이다. 내용과 발신자, 수결이 있으나 수신자는 없다. 문서의 형식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백제시대 서체가 6세기 말까지 북조체를 주로 사용하였다는 점은 백령산성의 출토 명문에서도 확인되었다. 그러나 7세기부터 <미륵사 금제사리봉안기>·<사택지적비> 등에는 북조체를 주로 사용하였지만, 생활기록의 목간인 <좌관대식기>와 <나주 복암리 출토 목간>(610) 등은 남조체를 사용하여 서로 구분된다. 백제의 남조서법의 수용은 신라보다 반세기 이상 앞선 것으로 그만큼 백제가 중국의 선진 문화에 근접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백제 <금산 백령산성 출토 명문기와>와 목간의 서체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백령산성은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역평리와 건천리 사이인 충남과 전북의 경계를 이루는 깊고 험준한 산간에 위치해 있다. 백령산성은 금산의 주변 산성과 함께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의 전황을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곳으로 여겨져 왔다. 이 외에도 백령산성을 포함한 금산군 관내에 있는 여러 산성들은 삼국시대 말기 백제와 신라의 대립상황을 알 수 있는 주요 지역으로 부각되어 왔다. 특히, 백령산성은 조사를 통해 단일한 토층만 확인되며, 층위 내에서는 백제 유물만 출토되어 단일 시기에 축성 사용된 것이다. 백령산성의 축조 및 점유 시기는 대략 백제 사비시기로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백령산성에서 출토된 문자자료는 <‘상수와(上水瓦)’명 암기와>·<‘상절(上卩)’명 암기와> 등과 같이 기와에 썼거나 <병진와율현(丙辰瓦栗峴)>·<정사와이순신(丁巳瓦耳淳辛)>·<병오와이순신(丙午瓦耳淳辛)> 등과 같이 인장을 새겨 기와에 누른 압인와가 있으며, 묵서한 목간 1점이 있다. 특히, <병진와율현(丙辰瓦栗峴)>·<정사와이순신(丁巳瓦耳淳辛)>·<병오와이순신(丙午瓦耳淳辛)> 등을 통하여 산성의 축조연대를 파악할 수 있고, <‘상수와(上水瓦)’명 암기와>를 통하여 기와 제작의 종류와 기와의 제작지 확인을 알려주는데, 중앙관이 관여한 것으로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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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쌍북리 출토 목간 좌관대식기(618)
부여 쌍북리 출토 목간 좌관대식기(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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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명문자료를 통하여 당시 관의 행정과 서사문화 및 정확한 내용 파악을 통해 당시 접경 지역의 산성 축조체계를 살필 수 있다. 이러한 연구는 백제의 서사문화의 파악을 통하여 서예사는 물론, 국어사·역사 등 학제 상호 간의 체계적인 연구를 가능하게 해준다. 당시는 종이가 귀하여 서사재료를 나무나 기와에 쓰거나 새겨서 의사를 서로 소통하던 시대였다. 일상생활의 기록은 대개 관에 의하여 주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문자생활이 매우 제한적인 때의 기록이었다.

백령산성의 기와에 기록된 글씨는 도자와 같은 납작한 칼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둥근 모양의 뾰족한 송곳과 같은 것으로 기와가 굳기 전에 썼다. 그래서 필획의 방향이 바뀌는 곳에서도 필획의 굵기에 거의 영향이 없다. 즉, 붓에 나타나는 해서의 필획법을 정확하게 묘사하였다고 볼 수는 없지만, 여기에는 상당 부분 당시의 서사기법이 표현되어 있다.

수결(手決)은 위진남북조시대부터 사용되어 당나라에서 유행하던 서명법이다. 수결이 언제부터 우리나라에서 사용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중국에서 수용된 서명문화로 추측된다. 수결은 해서법의 필획과 결구로 형성한 수결로 생각된다. 현재까지 확인된 가장 이른 시기의 수결은 1132년(인종 10) 고려의 수결이 있다.

<‘상수와(上水瓦)’명 암기와>의 서체는 살펴본 바와 같이 북조체를 사용하였다. 6세기까지는 금석문의 기념기록이나 생활기록 모두가 북조체를 사용한 시기이다. 그리고 이 명문기와는 비록 큰 의미로 금석문으로 분류하지만, 세부 분류는 생활기록인 문서개념으로 분류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상수와(上水瓦)’명 암기와>는 가장 이른 시기의 이문(移文)에 해당한다.

‘상절부(上卩部)’는 왕도를 5부로 나눈 것 중의 하나다. 성왕은 538년(성왕 16) 사비성으로 천도하고, 중앙의 22부, 지방의 5부 5방(五方, 동방·서 방·남방·북방·중방)제도를 이때 실시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왕도의 통치조직으로 수도를 상부(上部)·전부(前部)·중부(中部)·하부(下部)·후부(後部) 등의 5부로 구획하고, 5부 아래에 5항(五巷)을 두어 5부5항제를 정비하였다. 전국의 5방 밑에 7∼10개의 군을 두는 5방, 군(郡), 성(현)제[城(縣)制]를 행정구역화하였다. 위덕왕은 부왕을 이어 중앙과 지방을 같은 체제로 운영하였으며, 중앙의 상부에서 관여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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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출토 금제금강경(600년대초)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출토 금제금강경(600년대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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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인와는 인장에 글씨를 써서 새긴 것이 아니라, 인고(印稿) 없이 직접 새긴 것이다. 그래서 직접 새기는 과정에서 <병진와(丙辰瓦)>의 ‘병(丙)’자와 ‘율(栗)’자를 뒤집어 쓴 경우처럼 착오를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백제목간 <좌관대식기>에서도 간지를 먼저 쓰고 표제어를 썼으며, <부여 왕흥사지 출토 청동사리함>이나 <사택지적비>에서도 간지를 먼저 썼다. 이것이 일반적인 백제의 간지 기록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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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림사 출토 명문기와
정림사 출토 명문기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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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인와는 내용이 다양하여 기와를 제작한 주체나 지역, 혹은 제작 연대 등을 기록하였다. 압인와의 종류로는 부여 부소산성 출토, 공주 반죽동 출토 <대통(大通)>, 부여 쌍북리 출토 <정사와갈나성(丁巳瓦葛那城)>, 익산왕궁리 출토 <수부(首府)>, 부여 관북리 출토 <상절을와(上卩乙瓦)>, 익산 왕궁리·미륵사지 출토 <중절을와(中卩乙瓦)>, 부여 부소산성 출토·익산 왕궁리 출토 <하절갑와(下卩甲瓦)>, 부여 능사·부소산성 출토 <전절갑와(前卩甲瓦)>·<전절을와(前卩乙瓦)>, 부여 부소산성 출토 <우성갑와(右城甲瓦)>, 익산 왕궁리 출토 <중절갑와(中卩甲瓦)>, 익산 미륵사지 출토 <우사을와(右寺乙瓦)>·<사하을와(寺下乙瓦)> 등이 있다. 역시 압인와도 내용을 오래 남기기 위한 기념기록에 해당된다.

백제목간 <지약아식미기>와 <좌관대식기>는 백제 중앙관에 의하여 기록된 행정문서이다. <지약아식미기>를 형태적으로 분류하면 봉형 사면 목간으로 표제는 ‘지약아식미기’이고, 내용은 “7일 동안 약아에게 식미를 지급한 양을 기록”한 것이다. 중앙 행정문서인 <지약아식미기>는 사실을 기록한 문서로 문체는 ‘기(記)’에 해당하며 서체는 북조의 해서법을 갖춘 단간(單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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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미륵사 서탑 출토 금제사리봉안기(639)
익산 미륵사 서탑 출토 금제사리봉안기(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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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관대식기>의 목간 형태는 판형편철양면(板形編綴兩面)으로 내용은 “좌관이 먹을거리를 대여한 기록”이다. 부기목간(簿記木簡)으로 서체는 남조해서목간인데, 대식자들의 이율은 50%와 33.3%라는 두 부류로 차등이율제가 적용되었다.

<좌관대식기>의 서체는 <지약아식미기>의 서체와 비교할 때 필획과 결구에 있어서 남조필법의 영향을 받았다. 북조법에서 남조법으로 변모하는 백제 서사문화는 7세기 초를 기점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문화의 수용은 백제와 남조 양나라와의 외교관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생활기록에 해당하는 목간의 기록은 금석문과 다른 묵서본으로 당시 실제 사용된 문서기록이다. 목간은 실생활에 사용된 문서기록으로서 여러 종류로 분류하여 체계화할 수 있다. 목간의 분류체계는 목간의 형태와 내용, 기록형식과 방식이 있다. 기록방식은 문체 와 서식으로 분류하고, 기록형식은 붓과 도자로 분류할 수 있다. 문체는 산문과 운문으로 나누어지고, 서식은 서사방식을 말하며 기록방식, 기록형식, 표제기록의 방식에 따라 분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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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미륵사 서탑 출토 청동합(639)
익산 미륵사 서탑 출토 청동합(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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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능산리사지 출토 목간인 <지약아식미기>와 부여 쌍북리 유적 출토 목간인 <좌관대식기>의 문체와 서식을 비교·분석하기로 한다. 시기적으로 <지약아식미기>와 <좌관대식기>는 반세기 차이가 있다. 이 목간들에 기록된 ‘記’의 문체와 서식을 통하여 문자생활에 사용된 서지 사항을 파악할 수 있다. 아울러 이들의 서체 비교 분석을 통하여 당시 기록문화와 서체 운용을 정리할 수 있다.

<지약아식미기>와 <좌관대식기>의 기록형식은 문체와 서식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이들의 문체는 ‘기’이다. ‘기’는 대개 산문으로 사실에 관한 주제를 먼저 기술한 뒤 자신의 소감을 쓰거나 주제와 관계가 있는 내용을 기술한다. 건물 조성기의 경우 공사기간, 공사비용, 일을 주관하고 도운 사람의 성명 등을 기록하고, 의론(議論)을 덧붙여 끝맺는다. 그러나 의론이 중심과 주체가 되는 경우는 ‘논(論)’이 된다. 이것이 변천 과정별로 살펴본 ‘기’의 형식이다.

이 두 목간의 문체는 ‘기’이다. 이들의 문체는 석문과 해석을 중심으로 서사방식인 서식은 기록형태와 기록방식 등으로 분류하여 설명하고, 서체를 분석해 보기로 하자.

<지약아식미기>의 표제는 ‘지약아식미기(支藥兒食米記)’이고, 도사가 제공한 식량을 기록한 중앙관의 행정문서이다. 백제 중앙 행정문서인 <지약아식미기>는 사실을 기록한 문서로 문체는 ‘논’이 없는 ‘기’에 해당하는 생활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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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사택지적비(654) 탁본
부여 사택지적비(654)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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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약아식미기> 목간의 서식은 표제에 [‘⌉’] 모양의 표제부호(標題符號)를 사용하였다. 표제의 시작과 끝, 상하의 옆에 [‘⌉’] 와 같이 따옴표를 찍고, 꺾쇠로 표시하여 표제임을 나타내었다. 즉, ‘지(支)’부터 ‘기(記)’까지 꺾쇠로 길게 긋고, 상하에 점을 찍어 전체 표제를 모두 표시하였다. 이러한 표시가 후대 전적이나 사경에 사용된 장절선(章節線)이나 과단부(科段符)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는 표제의 부호로써 가장 이르게 보이는 부호로 부호표제법에 해당한다. 이와 유사한 부호로는 경주 안압지 출토 목간에서도 표제부호와 유사한 ‘}’(아래 그림 참조)의 부호가 확인된다. 그러므로 <지약아식미기> 목간의 표제법은 부호무간지무단표제법(符號無干支無段標題法)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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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안압지 출토 목간의 부호
경주 안압지 출토 목간의 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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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는 오자나 탈자가 있을 수 있다. 오자는 교정법으로 잘못 기록된 글자를 수정하며 탈자는 보정법에 의하여 빠진 글자를 보정한다. <지약아식미기>의 ‘소리치저이(小吏治猪耳)’에서 ‘치(治)’는 보자(補字)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교정부호나 보정부호는 보이지 않고 조금 작은 글씨 크기로 끼워 쓴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보자의 예는 <울주 천전리각석 기사년명>에서 ‘구(仇)’자를 보자하였고, <익산 미륵사지 사리봉안기>에서도 ‘此’자를 보자한 보정기록이 있다. 이러한 방법이 당시의 일반적인 보정법으로 생각된다. 사실 후대에도 보자할 때는 글자와 글자 사이에 조금 작은 크기로 글자를 써넣었다. 그리고 ‘○’나 혹은 ‘∨’를 사용하여 보정한 글자를 표시하였다. 교정법의 경우에도 잘못 기록된 글자 옆에 조금 작은 글씨로 써 넣어 교정하였다. 이러한 교정법은 후대에 이르 면 오자 옆에 점을 찍거나 혹은 ‘○’·‘∨’·‘∠’ 등과 같은 부호로 표시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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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 지석
무령왕릉 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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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약아식미기> 목간의 서사방식은 봉형목간으로 사면이다. 부호표제를 사용하였고, 단을 나누지 않았으며, 1행으로 세로로 기록하였다. 서체는 해서로 봉형사면부호표제 일단일행세로기록 해서목간으로 분류할 수 있다.

<좌관대식기> 목간은 당시 백제의 사회·경제의 단면을 파악할 수 있는 중앙관에서 실시한 공채성격을 띤 중앙 행정관의 기록이다. 다만, ‘좌관(佐官)’은 ‘좌평관(佐平官)’을 말하는 것으로 ‘좌평관이 대식한 기록’으로 볼 수 있고, 좌평관이 공채를 발행한 기록으로 이해된다. <좌관대식기> 또한 <지약아식미기>와 같이 사실을 기록한 문서로 기념기록이 아닌 생활기록이다. 문체는 ‘기(記)’에 해당한다. 여기서도 다만 ‘논(論)’이 없어서 후기에 의론(議論)이 첨부되는 ‘기(記)’의 형식과는 구별되는 고식의 산문체이다. 백제시대 사용된 ‘기’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6세기 중반부터는 중앙의 행정문서에 사용되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좌관대식기> 목간을 통하여 당시 중앙행정문서 서식의 일면을 알 수 있다. 서식의 형식은 단을 나누어 표제와 내용을 기록하였다. 표제에는 부호나 기호가 없으나 간지를 기록하였다. 전면 첫 단 표제에는 간지와 제목의 행을 바꿔 세로 기록한 이행세로기록표제이다. 그래서 표제법은 분단간지 무부호 이행세로기록표제법이다.

목간 형태는 판형의 양면으로 모두 3단으로 나누어 기록하였다. 편철공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여러 편의 목간을 철한 것 중 하나인 편철목간이다. 둘째 단과 셋째 단은 삼행세로기록이고, 후면은 3단으로 단을 나누어 이행 세로 기록이다. 내용이 많은 것은 단이 길고, 내용이 짧은 후면 3단은 종목 없이 총액수를 정리한 부분이라서 단도 짧다. 그러므로 <좌관대식기> 목간은 편철 양면 분단간지표제 삼단이삼행 세로기록부기 해서목간에 해당한다.

<좌관대식기> 목간은 교정부호나 보정부호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단을 나누는 방법은 선을 그어 표시하는 방법이 아니라 간격을 두어 구분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단의 크기는 대체로 일정하나 마지막 후면 3단은 다른 단에 비하여 짧은 편이다. 이상과 같은 서사방식이 618년에 사용된 백제 중앙관의 행정문서 서사양식이다. 이러한 다단 서사방식은 백제 목간인 능산리 출토 목간 <‘삼귀(三貴)’ 목간>·<‘보희사(寶熹寺)’ 목간> 등과 신라의 목간인 <안압지 출토 ‘우궁북문수(隅宮北門守)’ 목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약아식미기>의 서체는 고구려 서법이 있는 북조법이다. ‘아아(児兒)’·‘초(初)’·‘식(食)’·‘방(方)’·‘이(二)·삼(三)’ 등이 북조의 서법인데, 그 중에서도 ‘후(後)’의 ‘척(彳)’은 팔분법으로 해서의 첩오(疊烏)가 형성되지 못하였다. ‘봉(逢)’·‘도(道)’ 등의 착법(辶法)은 광개토왕릉비와 같은 예서법으로 고구려 서법과 관계가 깊다. 이처럼 <지약아식미기>는 필획과 결구로 보아 전반 적으로 북조의 서법이다. 이러한 북조법은 ‘야(耶)’의 음읍법(音邑法)인 ‘부(阝)’가 퇴화하여 음절법(音節法)인 ‘절(卩)’과 유사한 모양에서 고구려를 통하여 수용된 것으로 확인된다. 이러한 예는 ‘부(部)’를 ‘절(卩)’로 서사한 예로 중국에서는 사용되지 않은 것이며, 다만 고구려와 백제, 일본에서 사용된 예가 있을 뿐 이러한 북조법의 양상은 백제에서 6세기까지 나타나며, 7세기 초 남조의 양나라와의 외교가 시작되면서 남조의 필법이 유행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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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관북리 소상(小上)명 토기
부여 관북리 소상(小上)명 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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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관북리 소상(小上)명 토기 명문 부분
부여 관북리 소상(小上)명 토기 명문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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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약아식미기>와 <좌관대식기> 서체의 경향을 남북 양조로 나누어 비교해 보자. 곧, 서로 같은 글자를 비교하여 보면 북조에서 남조로 변모하는 현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지약아식미기>는 북조의 필법을 주로 사용하였고, <좌관대식기>는 남조의 필법이 주로 사용되었다. 또 이러한 서체의 변모는 서법에서 보여주는 50년 사이의 변모된 양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당시 백제 서사문화의 세부적인 정황을 파악할 수 있는 기준이 된다. 이제까지 백제의 문화는 조각과 공예, 분묘의 축조양식 등, 남조 양나라의 문화를 수용하여 남조문화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연구되었다. 그러나 백제의 서사문화를 놓고 보면 고구려는 물론, 북조의 문화도 수용되어 6세기까지 이어졌음을 나타내 준다.

백제는 고구려와 가장 많은 외교적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북조와의 관계도 깊었으며, 6세기부터는 남조의 양과 많은 친교를 맺었다. 문화의 수용 역시 이들의 외교관계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서법은 불교의 전래와 관련하여 사경의 문화와 관계가 깊다. 백제는 남북조의 서사문화를 수용하였다. 그 중에서도 불교의 수용을 통하여 고구려로부터 북조의 서사문화도 같이 수용된 것으로 판단된다.

남북조는 강남의 남조와 화북의 북조가 대치하던 5세기 초부터 6세기말까지의 시기에 해당한다. 남북조에서는 불교와 도교 를 숭상하였으므로 북조에서는 탑비와 조상기가 금석문 형태로 많이 제작되었고, 불경의 번역과 사경이 많았다. 그러나 남조에서는 금비령의 전통을 이어 받아 금석문이 적고 모각된 전적이나 서첩 형태로 전래되었다. 서체의 특징은 필획이 가늘고, 결구가 능숙하고 고르게 정련되었다. 장법은 자간은 좁고, 행간은 넓은 전형적인 남조필법을 이어 받았다. 남조의 필법은 왕희지와 왕헌지의 서법이 근간을 이룬다. 문화와 전통은 쉽게 변하지 않는데, 이러한 현상은 고대일수록 더욱 심하다. 백제의 서사문화는 중국 북조나 남조와의 격차가 50년을 넘지 않는다는 점도 다시 확인된 셈이다.

백제시대 서체는 <무령왕 묘지>·<무령왕비 묘지>·<백제 창왕명 석조사리감>·<부여 왕흥사지 출토 청동사리함> 등 6세기까지는 북조체를 주로 사용하였으나 7세기부터는 일상의 생활기록에는 남조필법이 유행되었다. 다만, <익산 미륵사지 금제사리봉안기>·<사택지적비> 등 기념기록인 금석문에는 북조체를 주로 사용하였고, <나주 복암리 출토 목간>·<좌관대식기> 등에 남조체를 사용하여 구분된다. 게다가 백령산성에서 출토된 명문들은 같은 시대에 제작된 명문들로 북조서법의 특징이 확인되어 남조체가 유행하게 되는 7세기 전의 필적임을 알 수 있다.

백제시대 서체는 7세기를 전후하여 구분된다. 6세기까지는 모두 북조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7세기부터는 생활기록인 목간과 기념기록인 금석문의 서체가 서로 구분된다. 즉, 7세기부터 생활기록인 목간에는 남조체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7세기라 하더라도 금석문에는 북조체를 주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구분은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도 이어진다. 다만, 간혹 남조체인 왕희지체가 금석문에 집자되거나 쓰여지는 예가 있다. 곧, 백제의 남조서법 수용은 신라보다 반세기 이상 앞선 것으로 그만큼 백제는 대륙의 선진 문화에 근접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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