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7권 한국 서예문화의 역사
  • 1 고대의 문자생활과 서체
  • 02. 삼국시대의 문자생활과 서체
  • 신라와 가야
  • 1. 신라
손환일

신라는 시조 혁거세부터 경순왕까지 56대, 992년 간 존속하였다. 국호는 신라·신로(新盧)·사라(斯羅)·서나(徐那)·서나벌(徐那伐)·서야(徐耶)·서야벌(徐耶伐)·서라(徐羅)·서라벌(徐羅伐)·서벌(徐伐) 등으로 불렸는데, 모두 마을(邑里)을 뜻하는 사로(斯盧)로 해석된다. 신라는 『삼국사기』에 의하여 다음과 같이 3기로 나누어 시대 구분을 할 수 있다.

① 상대(시조∼28대 진덕여왕, B.C. 57∼A.D. 654)는 원시부족국가·씨족국가를 거쳐 고대국가로 발전하여 골품제도가 확립된 시기이다.

② 중대(29대 무열왕∼36대 혜공왕, 654∼780)는 삼국을 통일하고 전제왕권이 확립되어 문화의 황금기를 이룬 시기이다.

③ 하대(37대 선덕왕∼56대 경순왕, 780∼935)는 골품제도의 붕괴, 족당(族黨)의 형성 및 왕권의 쇠퇴로 호족 세력이 등장하고 멸망에 이르는 시기이다.

이 밖에 29대 무열왕 이전을 삼국시대, 그 이후를 통일신라시대로 구분한다.

문자의 활용은 통치에 반드시 필요한 수단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자생활은 통치 문화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언제부터 신라에서 문자가 사용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토기에 사용된 기호문자를 통하여 그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다양한 서체의 운용은 문자생활이 상당히 진전된 후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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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중성리신라비 원석(501)
포항 중성리신라비 원석(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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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중성리신라비 부분 탁본
포항 중성리신라비 부분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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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일 냉수리신라비 원본(503)
영일 냉수리신라비 원본(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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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일 냉수리신라비 부분 탁본
영일 냉수리신라비 부분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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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문자자료에는 토기에 쓰여진 ‘대(大)’·‘부(夫)’·‘정(井)’·‘상(上)’·‘생(生)’·‘십(十)’·‘정물(井勿)’·‘입(卄)’·‘신(辛)’·‘대간(大干)’·‘본(本)’ 등의 글자들이 있다. 이들은 태토가 굳기 전에 도자가 아닌 송곳과 같은 뾰족한 도구를 사용하여 글씨를 썼다. 토기의 기호나 문자 외에도 금속에 글씨를 썼는데 <서봉총 출토 은합>(451)·<고덕흥명 청동초두(高德興銘靑銅鐎斗)>·<부인대명 은대(夫人帶銘銀帶)> 등은 은이나 청동판 위에 글씨를 쓰듯이 새긴 것이다. 그러나 <호우명>·<대부귀명 청동탁(大富貴銘靑銅鐸)>·<왕공대중명 동경(王公大中銘銅鏡)>·<오수명 청동과대장식(五銖銘靑銅銙帶裝飾)> 등은 흙으로 만든 거푸집에 글씨를 새긴 후 주물로 부어 낸 것으로 서사기법이 서로 다르다. 이러한 글자들은 해서의 팔법을 갖추지 못하고, 필획의 굵기가 같은 예서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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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 봉평리신라비 부분 탁본(524)
울진 봉평리신라비 부분 탁본(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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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 봉평리신라비 원본
울진 봉평리신라비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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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석문(石文)양식은 바위에 새긴 마애명과 석비(石碑)양식이 있다. 바위에 새긴 마애명의 양식으로는 <울주 천전리서석곡 각석>이 있고, 6세기 석비로는 <포항 중성리신라비>(501, 지증왕 2)·<영 일 냉수리신라비>(503, 지증왕 4)·<울진 봉평리신라비>(524, 법흥왕 11)·<영천 청제비 병진명>(536, 법흥왕 23)·<단양 신라적성비>(551, 진흥왕 12)·<명활산성 적성비>(551)·<창녕 신라진흥왕척경비>(561, 진흥왕 22)·<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568, 진흥왕 29)·<마운령 신라진흥왕순수비>(568)·<황초령 신라진흥왕순수비>(568)·<대구 무술명 오작비>(578, 진지왕 3)·<경주 남산신성비>(591, 진평왕 13) 등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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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청제(536)
영천 청제(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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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청제비
영천 청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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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청제비 글자 부분
영천 청제비 글자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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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비 양식은 두 가지로 분류되는데 하나는 비신(碑身)에 개석(蓋石)과 대석(臺石)이 없이 자연석 그대로에 석비면을 물갈이하여 글씨를 새긴 양식과 개석과 대석을 갖춘 양식으로 구분된다. 개석과 대석 없이 자연석을 다듬어 간단히 물갈이하여 사용한 예로는 <포항 중성리신라비>·<영일 냉수리신라비>·<울진 봉평리신라비>·<영천 청제비>·<단양 신라적성비>·<창녕 신라진흥왕척경비> 등이 있다. 이러한 양식은 5∼6세기의 일반적인 석비 제작양식이다. 그러나 <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마운령 신라진흥왕순수비>·<황초령 신라진흥왕순수비> 등의 석비부터는 개석과 대석을 갖추게 되었다. 이 석비들은 비신의 4면을 다듬고 대석과 개석을 갖춘 석비의 효시이다. 이 석비들은 국가의 중앙에서 조성한 것으로 당시 최고의 선진 기법과 양식으로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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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 이성산성 출토 목간(548)
하남 이성산성 출토 목간(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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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진한 12개 성읍국가 중의 하나인 사로에서 출발하여 내물마립간 때에 연맹왕국을 형성하여 신라로 발전하였다. 눌지마립간 때에 왕위 부자상속제 확립, 6촌을 6부로 중앙집권화 정책, 우역 설치, 시장 개설, 백제 동성왕(東城王, 479∼441)과의 통혼 등 대내외의 발전으로 지증왕(500∼514)과 법흥왕(514∼540)에 이르러서는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었다. 지증왕 때에 우경, 수리산업으로 생산력의 발달을 가져왔고, 정치개혁으로 국호를 신라로, ‘마립간(麻立干)’을 ‘왕(王)’으로 바꾼 점은 대륙 중원의 정치조직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개혁을 법흥왕은 율령 반포, 연호의 사용, 불교의 공인 등을 통하여 대내외적으로 왕권의 확립을 가져와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로서의 통치체제를 완성하였다. 특히, 불교의 공인은 통일국가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고 선진문화 수용의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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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 성산산성 출토 목간(555)
함안 성산산성 출토 목간(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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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 봉평리신라비>에 기록된 사건은 법흥왕 7년(520)에 율령을 반포한 4년 후 야기되었다. 사건 발생 후 법흥왕(매금왕)과 6부라는 신라 통치세력들에 의해 집행되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울진 봉평리신라비>의 조성은 중앙에서 파견된 중앙관의 손에 의하여 글을 짓고 썼을 것이다. 단편적이지만 <울진 봉평리신라비>에 나타난 중앙관의 필적은 당시 서사문화의 단편을 이해할 수 있고, 서체의 분석을 통하여 6세기 신라 서사문화의 수용 관계와 주변국에 미친 영향을 유추해 볼 수 있으며, 서사습관과 서법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체자의 자형변화를 통하여 당시 신라인들의 문자 운용 능력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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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 성산산성 출토 목간(555)
함안 성산산성 출토 목간(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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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역사에서 4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에 이르는 2백년 간은 종래의 후진성을 탈피하면서 눈부신 발전으로 국가의 면모를 일신했던 기간이었다. 신라는 대내적으로는 체제정비,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와의 호의적 관계를 맺고, 백제와 동맹을 맺으면서 삼국 간의 균형을 유지하고 자국의 발전을 도모하였다. 진흥왕대는 신라의 전성기로 내적 체제정비와 한강유역의 장악으로 삼국 통일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독자적 기반을 구축하였다. 이어 법흥왕은 4년(517) 병부 설치, 7년 율령반포와 백관 공복 채택, 15년 불교공인, 18년 상대등제의 실시로 제도정비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국가의 면모를 일신시키고 문화국가임을 자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법흥왕은 이차돈을 통해 왕권이 불안하였던 신라에 불교를 공인하여 통치이념을 확립한 왕으로 대륙 남조의 양과 국제교류를 하였으며, 신라 최초 ‘건원(建元)’이란 독자적인 연호를 쓰기도 하였다. <울진 봉평리신라비>는 신라 중흥에 결정적 기틀을 마련하였던 법흥왕이 밖으로는 국가의 세력을 확장하고 안으로는 국가내부를 안정시키고자 하였던 당시의 금석문으로 의미하는 바가 크다. 이 석비의 제작 양식은 자연석의 한 면을 정으로 다듬고, 다시 물갈이하여 정교하게 세공하였다. 비면의 전체를 수평하게 하지는 않았으나 비면을 고르게 연마하였다. 패인 부분은 글자를 건너 띠어 공백을 두고 글씨를 새겼으며, 계선(界線)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러한 방법은 고구려의 <광개토왕릉비>에서도 볼 수 있는 예이다. 그리고 하단과 상단을 정렬하여 장법을 구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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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신라진흥왕척경비(561)
창녕 신라진흥왕척경비(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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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신라진흥왕척경비 부분
창녕 신라진흥왕척경비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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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신라진흥왕척경비 부분 탁본
창녕 신라진흥왕척경비 부분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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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 봉평리신라비>의 글씨를 쓴 사람은 직명(職名)이 서인(書人)으로 중앙관 17관 위계 중에서 길지지(吉之智, 京位 14위)에 해당하는 모진사리공(牟珍斯理公)이라는 사람이다. 당시 글씨를 쓴 사람의 표기는 ‘기(記)’·‘서인(書人)’·‘서사인(書寫人)’·‘서척(書尺)’·‘작서인(作書人)’ 등으로 기록하였다. ‘서척’은 ‘서자(書者)’로 역시 글씨를 쓴 사람을 가리킨다. ‘문작인(文作人)’·‘문척’ 등은 글을 지은 사람인데, ‘문척(文尺)’은 ‘문자(文者)’로 읽을 수 있으며, 역시 글을 지은 사람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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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무술오작비(578)
대구 무술오작비(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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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무술오작비 부분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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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記)는 <포항 중성리신라비>·<영일 냉수리신라비> 등에서 사용되었고, 서인(書人)은 <울주 천전리서석곡 각석 계사명>·<울진 봉평리신라비>·<단양 신라적성비>·<창녕 신라진흥왕척경비>·<울주 천전리 각석 계사명> 등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작서인은 <울주 천전리 각석 을사명>, 서사인은 <명활산성 작성비>에 사용되었고, 서자는 글씨를 쓴 사람인데 <경주 남산신성비 제4비>, 문자는 <경주 남산신성비 제1·2·3·9비>, 문작인은 <대구 무술명 오작비> 등으로 사용되었다.

기·서인·서사인·서자·작서인 등은 글씨를 쓴 사람이고, 문작인·문자 등은 글을 지은 찬자에 해당하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글씨를 쓴 사람과 글을 지은 사람이 동시에 표기된 예가 없기 때문에 글을 지은 사람도 기·서인·서사인·서자·작서인 등으로 표기할 수 있고, 글씨를 쓴 사람도 문작인·문자 등으로 표기할 수 있다. 이들 용어는 모두 통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에는 글을 짓는 찬자와 글씨를 쓴 서자가 구분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글을 지은 사람이 글씨도 썼을 것이며, 글씨를 쓴 사람이 글을 짓기도 하였을 것이다. 신라에서 찬자와 서자가 구별되는 것은 문장과 글씨가 전문화되는 통일 이후에 이르러서이다. 이는 중국의 경우도 예가 같으며, 당에 이르러서야 구별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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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 부분 탁본
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 부분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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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
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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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문의 문장법에서 한문이 아닌 이두문으로 기록된 것은 고려나 조선의 문서기록에서 사용된 예와 같다. 이렇게 이두문으로 작성된 문장은 일상의 생활기록문으로 볼 수 있으며 적어도 6세기까지는 기념기록에도 이두를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석비의 양식을 갖추게 되는 <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마운령 신라진흥왕순수비>·<황초령 신라진흥왕순수비> 등부터는 문장에 있어서도 기념기록과 생활기록으로 구분하였다. 즉, 대부분 격식이 필요한 기념기록에는 한문을 사용하였고, 일상의 생활기록에는 이두문을 사용한 예로 구분된다.

서사(書寫)를 담당했을 만한 직명을 살펴보면, 대도서[大道署, 1명, 사전(寺典)·내도감(內道監). 예부(禮部)에 소속]의 주서(主書, 11∼13位), 공장부 주서(工匠府 主書, 11∼13위), 채전[彩典, 경덕왕 때 전채서(典彩書)로 개칭 후 환원]의 주서(11∼13위), 좌사록관(左司祿館, 677년 설치)의 주서(11∼13위), 우사록관(右司祿館, 681년 설치)의 주서(11∼13위), 신궁[新宮, 717년 설 치, 경덕왕 때 전설관(典設館)으로 개칭 후 환원]의 주서(11∼13위), 동시전(東市典, 508년 설치)의 서생(書生), 서시전(西市典, 695년 설치)의 서생, 남시전(南市典, 695년 설치)의 서생, 사범서(司範署, 예부 소속)의 대사(大舍)·주서 등으로, 주서는 각각 2명씩 두었으며 사지[舍知, 소사(小舍) 13위]에서 나마(奈麻, 11위)까지이다. 여기서 17등 관계 중에서 대개 11∼13위에 해당하는 직급의 중앙관료들이 서사를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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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신성비 제1비(591)
남산신성비 제1비(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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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신성비 제2비(591)
남산신성비 제2비(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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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신성비 제2비 부분 원석
남산신성비 제2비 부분 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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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월성해자 출토 목간(500∼600)
경주 월성해자 출토 목간(50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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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문에서도 아래 표와 같이 중앙관의 하위직과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으로 구성되었다. 일벌(一伐)은 지방관직 8등급으로 중앙관 길차(吉次, 14관등)에 해당한다. 6세기 금석문의 서사는 중앙의 서사문화를 대변해 준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울진 봉평리신라비>는 중앙관 14위에 해당하는 길지지의 필적이다.

석비명 찬서자 관직 찬서자 관위 찬서자 기록형식
<포항중성리신라비>(501, 지증왕 2)     기(記)
<영일냉수리신라비>(503, 지증왕 4)    
<울주천전리각석계사명>(513, 지증왕 14) 소사(小舍) 경위(京位) 13위(位) 서인(書人)
<울진봉평신라비>(524, 법흥왕 11) 길지지(吉之智) 경위 14위 서인
<울주천전리각석을사명>(525, 법흥왕 12) 대사(大舍) 경위 12위 작서인(作書人)
<단양신라적성비>(551, 진흥왕 12) 아척(阿尺) 경위 11위 서인
<명활산성작성비>(551) 아척 경위 11위 서사인(書寫人)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561, 진흥왕 22) 대사(大舍) 경위 12위 서인
<울주천전리각석계사명>(573, 진흥왕 34)     서인
<대구무술명오작비>(578, 진지왕 3) 일척(一尺) 외외(外位) 9위 문작인(文作人)
<경주남산신성비제1비>(591, 진평왕 13) 아척(阿尺)
일벌(一伐)
외위 11위
외위 8위
문척(文尺)
<경주남산신성비제2비>(591) 일벌 외위 8위 문척
<경주남산신성비제3비>(591) 소사
길사(吉士)
외위 13위
외위 14위
문척
<경주남산신성비제4비>(591) 상간(上干) 외위 6위 서척(書尺)
<경주남산신성비제9비>(591) 일벌(一伐) 외위 8위 문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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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주 천전리서석곡 전경
울주 천전리서석곡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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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주 천전리서석곡 각석
울주 천전리서석곡 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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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주 천전리서석곡 각석 부분 탁본
울주 천전리서석곡 각석 부분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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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 봉평리신라비>가 조성된 시기는 자체가 예서·팔분에서 해서가 혼용되는 과도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필획과 결구에 대한 기본적인 법칙이 정립되지 않아 다양한 서법이 자유분방하게 혼용되었다. 당시 금석문의 경우를 보면 신라 역시 아직 필획과 결구 장법 등이 정확하게 갖추어지지 않았고 부정형이 많았다. 그리고 여러 가지 자체의 필법을 혼용하는 경우가 많아서 정확하게 자체를 분류하기는 어렵다. 더구나 자체별로 특징적인 필법을 완전하게 갖춘 글자가 매우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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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 신라적성비(551)
단양 신라적성비(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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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 신라적성비 부분 탁본
단양 신라적성비 부분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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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전서로 쓰여진 고대의 금석은 <청동검명문>·<청동거울명문> 등이 있다. 예서는 팔분과 함께 그 명칭이 오래 전 북송의 구양수부터 혼용되어 왔으므로 지금까지도 예서와 팔분을 구분하지 않고 통칭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학술적으로는 반드시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예서의 필획은 팔분에서 꼭 갖추어야 할 일자(一字) 일파(一派)의 파세(波勢)가 없다. 결구도 예서결구는 정사각형의 결구이고, 팔분결구는 납작한 직사각형이다. 예서의 대표적인 글씨는 <광개토왕릉비>이다.

<울진 봉평리신라비>의 예서는 <광개토왕릉비>의 예서와 같이 전서·예서·팔분·초서·해서 등의 필법이 함께 사용되었다. 그리고 많은 부분이 <광개토왕릉비>의 예서와 같은 필법이다. 이를 통하여 신라의 서사문화는 고구려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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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무열왕릉 이수와 귀부
태종무열왕릉 이수와 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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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무열왕릉 이수와 귀부
태종무열왕릉 이수와 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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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광개토왕릉비>의 예서나 신라의 <울진 봉평리신라비>의 예서는 한(漢)대의 벽돌명문의 예서와 다른 점이 있다. 곧, 결구는 정사각형으로 매우 유사해 보이나 전서·예서·팔분·초서·해서 등의 필획법이 함께 사용된 것이 다르게 구분되는 점이다. 그리고 필획에 있어서 한대의 벽돌명문의 예서보다 훨씬 섬세하고 정교하다. 이러한 점은 예서만을 사용하였던 한대 벽돌명문의 예서는 다분히 형식적으로 자체를 디자인하듯 형식화하는 측면으로 치중되었는가하면, <광개토왕릉비>의 예서나 신라의 <울진 봉평리신라비>의 예서는 자체의 변혁기를 거치면서 매우 다양한 서체의 필법을 혼용하였다. 그 결과 다양한 필법의 구사를 통하여 자체와 서체의 복합적인 필법을 구사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울진 봉평리신라비>는 서사문화의 시대적인 자형변천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광개토왕릉비>와 같은 예서이다.

<울진 봉평리신라비>의 필획은 <광개토왕릉비>와 같은 예서 필획과 <단양 신라적성비>와 같이 기필과 수필이 정확하지 않은 노봉의 필획이다. 대개 이 두 종류의 예서 필획이 대부분이며 전서·팔분·초 서·해서의 필획도 포함되어 있어서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그 수는 아주 적은 편이다. 필획의 기필은 역입(逆入)이 생략된 노봉(露鋒)의 필획이며, 행필(行筆)에선 절법(節法)이 생략된 직필(直筆)이고, 수필(收筆)은 회봉(廻峯)이 생략되거나 약화된 노봉(露鋒)의 필획으로 굵기가 같은 예서 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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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무열왕릉비(600년대)
태종무열왕릉비(60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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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무열왕릉비 제액
태종무열왕릉비 제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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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 신라 금석문의 결구는 두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대부분 6세기 전반기의 결구는 <광개토왕릉비>와 같은 정사각형의 결구가 많고, 후반기에는 <단양 신라적성비>와 같은 마름모꼴의 결구가 많다. <울진 봉평리신라비>의 결구는 <광개토왕릉비>와 같은 정사각형의 결구이다. 그러나 때로는 왼쪽삐침법이 강조되고 오른쪽삐침법이 약화되어 자형이 한쪽으로 기운 <단양 신라적성비>와 같은 마름모꼴의 결구가 사용되기도 하였다.

장법(章法)은 행간은 좁고 자간은 넓게 구성된 팔분의 장법이다. 6세기 신라 금석문 중에서 팔분장법으로는 <단양 신라적성비>, <경주 남산신성비 제4비> <울진 봉평리신라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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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무열왕릉비 부분
태종무열왕릉비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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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문자생활의 대중화는 불교의 저변 확대와 왕권의 성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불교를 국교로 정하면서 이에 따른 역사·미술·의학·역학·천문·노장학 등 모든 분야에 문화의 폭을 넓혀주었다. 이와 같이 한문의 수용과 보급은 법흥왕 때부터 시작하며, 진덕여왕 때에는 성행한 불교를 통하여 한문의 사용이 확대되었다. 이들의 수준은 <포항 중성리신라비>·<영일 냉수리신라비>·<울진 봉평리신라비>·<영천 청제비>·<단양 신라적성비>·<임신서기석>·<남산신성비>·<진흥왕순수비> 등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신라의 미술은 초기에는 고구려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뒤에는 백제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뿐만 아니라 육조·수·당 등 대륙 중원문화와 멀리 인도 등의 남방문화까지 받아들임으로써 아름답고 섬세한 양식으로 발전하였고, 통일 후에는 보다 화려하고 세련된 면을 보여준다.

신라는 지리적 영향으로 비교적 문자가 늦게 전래되었는데, <포항 중성리신라비>(501), <영일 냉수리신라비>(503), <울진 봉평리신라비>, 세 종류의 진흥왕순수비 등과 같은 예서법을 유지하고 있다. 신라는 고구려·백제와 매우 관계가 깊어 많은 소통이 있으므로 고대신라의 서사문화는 석비의 양식이나 기법, 그리고 서법에서 고구려의 서사문화와 관계가 깊다. 이러한 서사문화는 불교문화를 통하여 서로 전래 수용된 것이다. <울진 봉평리신라비>를 쓴 모진사리공 은 고신라의 서법을 사용하였고, <태종무열왕릉비>를 쓴 김인문(金仁問, 629∼694)은 당에서 배운 구양순의 필법으로 비의 음기를 썼다. 그러나 제액은 당에서도 보기 드문 대전인 유엽전(柳葉篆)을 사용한 점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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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태화산성 출토 관명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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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 신라적성비>·<창녕 진흥왕척경비>·<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마운령 신라진흥왕순수비>·<황초령 신라진흥왕순수비>·<감악산비> 등은 신라 진흥왕이 국토를 확장하고 제사한 후 세운 기념비이다. 진흥왕대는 신라가 종전의 미약했던 국가체제를 벗어나 일대 팽창,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때이다. 진흥왕은 재위 37년 동안 정복적 팽창을 단행하여 낙동강 서쪽의 가야세력을 완전 병합하였고, 한강 하류 유역으로 진출하여 서해안 지역에 교두보를 확보하였으며, 동북으로는 함남 이원지방까지 이르렀다. 해서체로 음각된 이들 순수비에는 신라의 강역뿐만 아니라 신료(臣僚)의 명단과 소속부명·관계명·관직명 등이 기록되어 있어 당대의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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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서기석(552)
임신서기석(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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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순수비의 서체분석을 통하여 당시의 서사문화와 유행을 살펴보면, 복잡한 인접국의 서사문화가 융합되어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같은 6세기에 기록된 것이라도 <단양 신라적성비>는 팔분이고, <창녕 신라진흥왕척경비>·<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는 예서이며, <마운령 신라진흥왕순수비>·<황초령 신라진흥왕순수비>는 북조의 해서이다. 그만큼 6세기는 서체의 변모가 심하게 나타난 시기이며, 기념기록에 예서, 팔분, 해서 등의 모든 서체를 사용하던 시기였다.

신라의 북조 서법은 고구려로부터 수용된 서법임을 알 수 있다. 즉, 6세기 신라는 아직 당의 서사문화가 수용되기 전으로 고구려와의 교류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러한 사실은 신라의 회화·고분·불상조각에서도 고구려 불상양식에 중국 북조 북위의 불상양식이 반영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 북위의 서법은 고구려의 서법과 무관하지 않은 점은 북위 불상의 고구려적인 요소와 함께 고구려의 선진문화가 서점(西漸)하였는가에 대하여 재고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문화의 배경을 바탕으로 진흥왕순수비들의 서체를 분석하면 필획은 기필과 수필에서 노봉이 많은 필획으로 <광개토왕릉비>의 예서필획과 북위의 해서필획이 혼용된 필획이다. 쌍이(雙耳) ‘부(阝)’를 절이(節耳) ‘절(卩)’로 한 점, 쌍죽세(雙竹勢) ‘죽(竹)’이나 ‘초(艹)’를 분별하지 않고 함께 ‘ㅛ’로 쓴 점, ‘세(歲)’의 필획이 원래 ‘지(止)’인데 ‘산(山)’으로 바꿔 썼으며, ‘지(智)’에서 모두 ‘구(口)’ 밑에 ‘일(日)’을 넣어 썼다는 점은 이 시대의 서사습관으로 볼 수 있다. 또 이러한 필획이나 결구법은 예서 필법에서 비롯된 서사습관이다. 그러나 <황초령 신 라진흥왕순수비>는 명확한 필획을 갖춘 해서의 효시이다. 이후부터는 정확한 해서 필획이 정착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북조의 경우 해서의 필획이 일반적으로 정착된 시기가 500년대 전후인 점을 보면 약 50년의 시차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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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봉황동 출토 논어 목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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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구도 복잡한 형태로 정사각형의 <광개토왕릉비>의 결구와 납작한 팔분의 결구, 갸름한 해서의 결구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만큼 정체성을 찾기 어려운 서사문화의 혼란기이다. 해서의 결구는 <황초령 신라진흥왕순수비>·<마운령 신라진흥왕순수비> 등을 말할 수 있으며 대부분 북조 서법의 500∼540년에 유행하던 서체로 볼 수 있는 범주에 있다. 특히, 이체자(異體字)에서 이러한 현상을 파악할 수 있다. 장법은 정사각형의 <광개토왕릉비>와 같은 예서 장법이다.

진흥왕순수비들은 고구려 <광개토왕릉비>의 예서에서 북위·북제와 같은 북조 서법의 해서로 넘어오는 과도기의 서체이다. 이러한 과도기의 서체가 <황초령 신라진흥왕순수비>에 와서는 정확한 북조 해서법의 필획과 능숙한 결구로 통일신라 서사문화의 전성기를 열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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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저포리 출토 가야명문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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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법을 중요시한 중국의 서법이나 정신에 비중을 둔 일본의 서도와는 달리, 미적인 감성의 측면에서 아름다움을 우선하였던 한민족의 서예에는 민족성이 잘 표현되어 있다. 서예에도 조각·토기·도자기 등 한민족의 전반에서 나타나는 꾸밈이 없고 순박한 한민족의 정서가 있듯이 서법 위주보다는 느낌이나 정서 위주의 표현이 많다는 점이다. 필획에 있어서도 일관된 용필법보다는 정감에 의한 운필법 위주의 인위적이 기보다는 자연적인 필획과 결구가 신라의 서예의 특징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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