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7권 한국 서예문화의 역사
  • 1 고대의 문자생활과 서체
  • 02. 삼국시대의 문자생활과 서체
  • 신라와 가야
  • 2. 가야
손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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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예안리49호분 출토 명문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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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예안리49호분 출토 명문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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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예안리30호분 출토 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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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예안리30호분 출토 명문
김해 예안리30호분 출토 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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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의 문자생활은 파악하기 어렵다. 문자의 기록도 매우 드물 뿐만 아니라 남아있는 문자 자료들이 선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선 <김해 봉황동 출토 논어목간>(5세기 초)이 묵서로 유일하다. 이 논어목간은 『논어』「공야장」의 일부이다.

가야에서 『논어』가 수용되어 사경체로 학습되었다는 사실은 가 야의 문자생활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는 5세기 유교와 불교 수용에 있어서 구분이 없이 수용되었음을 말해 준다. 즉, 승려들의 역할이 종교적인 활동이 아니라 유학과 불교와 같은 선진문화의 수용에서 적극적이고 진취적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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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저포리 출토 명문토기(500년대)
합천 저포리 출토 명문토기(50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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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저포E지구 4호분 출토 명문토기(6세기) 탁본
합천 저포E지구 4호분 출토 명문토기(6세기)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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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체는 사경체를 구사하여 <인천 계양산성 출토 목간>과 같아, 같은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목간에 사경체를 구사한 것은 불교의 수용과 관계있으므로 당시의 사경문화가 미치는 영향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역시 일상생활의 생활기록에는 사경체가 사용되던 시기로 볼 수 있다. 그만큼 문자생활의 대중화에 있어서 사경의 역할이 컸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금석문으로 유일한 석비가 <합천 매안리비>(531)가 있는 데, 북위의 서법이다. 그리고 토기의 명문으로 <합천 저포리 출토 토기명문>은 ‘하부사리(下部思利)’란 명문의 해서법의 토기와 ‘대왕(大王)’이 새겨진 예서법의 항아리가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기념기록에 해당하는 것이다. 역시 가야에서도 문자는 기념기록과 생활기록, 사경기록 등으로 나누어 사용되었다. 기념기록에는 예서나 해서가 사용되었고, 생활기록과 사경기록에는 사경체를 사용하였다.

가야는 예서의 사용과 해서법의 문화가 수용되는 시기에 멸망한 것으로 추측된다. 가장 늦게까지 존재하였던 아라가야는 554년까지 존속하였으나 명백한 가야의 문자자료는 파악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다만, 다호리에서 출토된 붓과 도자가 있고, <토제수족원형 벼루>(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가 전하여 당시 문자생활의 면모를 추찰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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