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7권 한국 서예문화의 역사
  • 1 고대의 문자생활과 서체
  • 03. 통일신라·발해의 문자생활과 서체
  • 통일신라
손환일

삼국통일 후 신라의 문학은 애국심의 강조에서 벗어나 전제왕권을 확립하기 위한 현실적인 유교정치 이념으로 변하였다. 이에 따라 신문왕 2년(682) 국학이 설립되었고 717년(성덕왕 16)에는 당으로부터 공자(孔子)·10철(哲)·72제자의 화상을 가져 와서 국학에 안치하였다. 이어서 경덕왕 때에는 국학을 태학감(太學監)으로 개칭하고 경·박사·조교를 두고 『논어』와 『효경』을 필수과목으로 3분과로 나누어 교육하였다. 입학 자격은 15∼30세까지의 귀족 자제이며 수업 연한은 9년이었다. 원성왕 4년(788)에는 독서출신과를 두고 능력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어 관리에 채용하였다. 이 제도는 관리채용의 기준을 골품보다 유학의 실력에 두었기 때문에 6두품의 환영을 받았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결국 실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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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운천동 사적비(686) 탁본
청주 운천동 사적비(686)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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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에 활약한 문신으로 강수(强首)는 외교문서에 능하였고, 김대문(金大問)은 대륙 중원의 문화를 모방하던 단계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을 나타내어 『화랑세기』·『한산기』·『계림잡전』 등 저서를 남겼다. 경서에 조예가 깊은 설총은 이두문을 정리하여 한문학 학습에 공헌하였다.

하대에 들어와서는 왕족이나 6두품 중에서 당에 유학한 자들이 많이 증가하였다. 이들은 10년 간을 수학 연한으로 당의 국학에 입학하여 학문과 종교 분야에서 유능한 석학이 되었다. 이 때 당의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한 자가 58명이고, 오대(五代)의 후당(後唐)·후양(後梁) 때에도 32명이나 되었다. 그 중에서 석학으로는 최치원·최인연· 박인범(朴仁範)·김악(金渥)·최승우(崔承祐)·최신지(崔愼之) 등이 있었다.

또한, 유교 이외의 잡학 교육기관으로 산학·천문·의학·병학·육학 등을 전문으로 하는 관청에서 박사를 두고 학생을 교수하였다. 혜공왕 때 김암(金巖)은 천문·병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당에 유학하여 음양술을 연구, 둔갑술(遁甲術)을 지었으며, 귀국 후 패강진장(浿江鎭將)으로 있을 때 농민들에게 육진병법(六陣兵法)을 교수하였다. 통일신라 말에 이르러서는 도선(道詵)이 풍수지리설을 선양시켜 『도선비기(道詵秘記)』를 남겼다. 이 풍수지리설은 고려 태조 왕건도 그의 훈요10조에 반영할 정도로 고려시대에 크게 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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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릉비 원본(682)
문무왕릉비 원본(6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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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릉비 탁본
문무왕릉비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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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왕희지의 필법으로 쓰여진 글자로는 <단속사 신행선사비(斷俗寺神行禪師碑)>[813, 김헌정(金獻貞)·영업(靈業)·미상]는 영업의 글씨로 김생 이후 최고의 명필이다.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는 의 첫머리에서 7행까지는 김원이 해서로 썼고, 7행의 선(禪)자 이하는 행서로 김언경이 썼으며, 현창이 새겼다. 김원의 필법은 구양순체의 해서, 김언경의 필체는 왕희지체의 행서 이다. 그만큼 구양순과 왕희지가 양립하여 유행하던 시대이다. 그리고 왕희지를 신봉하였던 당 태종의 글씨를 집자한 <흥법사 진공대사탑비(興法寺眞空大師塔碑)>[940, 왕건(王建)·최광윤(崔光胤)집자(集子)·미상]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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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문 묘비 탁본
김인문 묘비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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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말기부터 구양순의 필법이 남종선(南宗禪) 사상을 주창해 온 선사탑비(禪師塔碑)에 사용되었다. 구양순 필법을 가장 먼저 전한 것은 김인문이다. 그가 쓴 것으로 전하는 <경주 문무왕릉비>는 철저히 구양순 필법을 지킨 것이다. 통일신라 말 <보림사 보조선사탑비> 김원의 해서, 최치원의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雙溪寺眞鑑禪師大空塔碑)>, 김립지가 찬한 <성주사 사적기>, <월광사 원랑선사대보선광탑비(月光寺圓朗禪師大寶禪光塔碑)>(890), 최인연(868∼944)의 <성주사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寺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890) 등이 있다.

그 중에서도 최치원이 쓴 <쌍계사 진감선사탑비>는 기본적으로 구양순체를 바탕으로 유공권체, 왕희지체, 김생체 등을 소화하였다. 특히, 두전은 이른바 육국문자인 대전으로 썼는데, 이러한 예는 당에서도 볼 수 없다. 이러한 대전은 약 150년 후 북송의 곽충서에 의하여 『한간(汗簡)』이라는 자전으로 집대성되었다. 최치원의 글씨를 이은 대표적인 사람은 그의 종제 최인연(최언위)과 최인연의 아들 최광윤이다. 최인연은 <성주사 낭혜화상탑비>를 남겼고, 최광윤은 <흥법사 진공대사비>를 태조 왕건이 글을 짓고, 왕희지체를 잘 쓴 당 태종의 글씨로 집자하였으며, 비음을 최치원체로 썼다.

안진경(709∼785)의 필법으로는 <성덕대왕신종>이 있다. 이 글씨는 김부환(金符皖)·요단(姚湍)이 썼다. 안진경의 생시에 안진경체로 썼다는 점은 그만큼 문화의 수용이 빨랐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북조 체의 예로는 <갈항사 석탑기(葛項寺石塔記)>(785∼799)·<보림사 석탑기>(870) 등의 예를 볼 수 있다. 예서의 필법은 안양 <중초사지 당간지주명(中初寺址幢竿支柱銘)>(827)에서 사용하였다. 쌍구법의 예로는 <흥법사 염거화상탑지(興法寺廉巨和尙塔誌)>(844)에 사용되었는데 네 귀에 구멍을 뚫어 벽에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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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리사지(700∼800년대)
경주 남산리사지(700∼80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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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인용사 연지 외곽 출토 묵서 명도편(700년대)
경주 인용사 연지 외곽 출토 묵서 명도편(70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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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찬지비(700∼800) 탁본
경주 찬지비(700∼800)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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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서는 두전을 통하여 살펴볼 수 있다. 두전으로는 <쌍봉사 철감선사탑비(雙峯寺澈鑑禪師塔碑)>(868)·<보림사 보조선사탑비>(884)·<사림사 홍각선사비(沙林寺弘覺禪師碑)>(886)·<실상사(심원사) 수철화상탑비>(893) 등이 있다. 서체는 일반적으로 소전이 서사되었으며, 이들 대부분은 당전(唐篆)의 필획과 결구를 수용한 서법에 해당한다. 이때는 이미 유학생·유학승·숙위 등의 많은 인원이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당의 문화에 대하여 익숙해진 시기에 해당한다.

김생은 왕희지체를 배워 능숙한 결구와 변화무쌍하게 응용된 결구를 능숙하게 구사한 인물이다. 김생 글씨의 특징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응용된 결구법에 있다. 김생의 필적으로는 <태자사 낭공대사탑비>·<전유암산가서(田遊巖山家序)>·<여산폭포시(廬山瀑布詩)> 등이 있다. 이 중 <태자사 낭공대사탑비>는 고려 광종 5년(954) 승려 단목이 김생의 글씨를 모아 집자한 것이다. 그런데 근자에 김생의 집자비인 <조계 묘비(趙棨墓碑)>(1789)와 <서명구 묘비(徐明九墓碑)>(1791), <이현서수장자명비(李玄緖壽藏自銘碑)>(1862)가 발견되어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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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비양론(700년대)
판비양론(70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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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생 서 전유암산가서(700년대)
김생 서 전유암산가서(70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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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화엄사 화엄석경(677)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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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화엄사 화엄석경(677) 탁본
구례 화엄사 화엄석경(677)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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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생의 서법을 추종한 사람으로는 고려의 홍관(洪灌, ?∼1126)이 있고, 조선의 홍춘경(洪春卿, 1497∼1548), 변헌(卞獻, 1570∼1636), 이관징(李觀徵, 1618∼1695), 정생(鄭生) 등이 있다. 정생은 김생의 서법을 본받았으며, 정생이라는 이름은 그의 글씨를 아낀 정조가 하사한 것이다. 정조는 그로 하여금 수원 팔달문(八達門)의 편액을 쓰게 하였으며, 그 자신도 ‘정생로인(鄭生老人)’이라 자칭하였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조선 후기까지도 김생 서법의 명맥이 이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김생 서법이 이렇게 이어졌다는 사실은 서예사적으로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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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복사 석탑 금동사리함명(706)
황복사 석탑 금동사리함명(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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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사 종명(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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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항사 석탑기(785∼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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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화상비(800년대 초)
서당화상비(800년대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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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돈 순교비(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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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거화상탑지(844)
염거화상탑지(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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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 중초사지 당간지주 부분(827) 탁본
안양 중초사지 당간지주 부분(827)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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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사비(845) 탁본
성주사비(845)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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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림사 비로자나불 명문(858)
보림사 비로자나불 명문(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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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안사 비로자나불조상기(865)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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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봉사 철감선사탑비 제액(868) 탁본
쌍봉사 철감선사탑비 제액(868)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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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사 홍각선사비(886) 탁본
사림사 홍각선사비(886)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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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884) 탁본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884)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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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사 홍각선사비 제액(886) 탁본
사림사 홍각선사비 제액(886)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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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 제액(887)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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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림사 석탑지(870) 탁본
보림사 석탑지(870)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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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 제액(884) 탁본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 제액(884)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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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사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890) 탁본
성주사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890)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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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887) 탁본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887)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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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광사 월랑선사대보선광탑비 부분(890) 탁본
월광사 월랑선사대보선광탑비 부분(890)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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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선사 석등기 부분(891) 탁본
개선사 석등기 부분(891)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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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 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893) 탁본
실상사 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893)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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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 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 제액(893) 탁본
실상사 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 제액(893)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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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집자비의 석비 조성은 두전과 본문내용(음기)의 서사자(書寫者)가 다르고, 새기는 각수(刻手) 또한 다르다. 대개는 현존하는 명가의 글씨를 받아서 석비를 만든다. 그러나 명가가 생존하지 않는 경우 그의 글씨를 모아 내용에 맞게 집자를 한다. 그래서 집자비 는 글씨를 직접 써서 석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써놓은 글씨를 여기저기서 발췌하여 석비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글씨를 쓴 서사자는 그 내용을 알 수 없으며 서체의 유형도 조금씩 서로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집자도 서예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금석기록문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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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복사비 쌍귀부(896)
숭복사비 쌍귀부(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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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복사비
숭복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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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자의 효시는 당 회인이 왕희지의 글자를 집자하여 672년에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를 만든 것이 처음이다. 이를 모방하여 한국에서도 통일신라시대부터 집자비를 만들었다. 특히, 역사적으로 유명한 명필의 글씨를 자본(字本)으로 집자되었는데 시대별·개인별로 그 취향이 달랐다.

삼국시대의 집자비는 없고, 통일신라시대부터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한 <경주 무장사 아미타불조상사적비>·<사림사 홍각선사비> 등이 있다. <무장사 아미타불조상사적비>는 김정희와 옹방강이 왕희지의 행서를 집자한 집자비로 추정되었다. <사림사 홍각선사비>는 속성이 김씨인 홍각선사의 비로, 서체는 왕희지의 행서를 집자하였다. 비문은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보림사 보조선사탑비>의 글씨를 쓴 바 있는 수병부랑중(守兵部郞中) 김원(金薳)이 짓고, 승려 운철(雲徹)이 집자하였으며, 두전은 최경(崔瓊)이 썼고, 보덕사의 승려 혜강(慧江)이 새겼다. 이와 같이 통일신라시대부터 당에서 유행한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하는 집자비를 조성하 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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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대왕신종(771)
성덕대왕신종(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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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태2년명 납석제호(758∼780)
영태2년명 납석제호(758∼7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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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국의 통일신라시대에 당의 서사문화가 수용되어 당에서 유행하는 왕희지체와 구양순체의 유행을 보인 것은 전대와 다른 변화이다. 이러한 서사문화의 변화는 각종 사경행위와 전적의 판본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 중에서도 <화엄사 화엄석경>은 사경체로 석경이 조성되었으며, 많은 사경승들에 의하여 필사되어 조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사경체의 예로는 <신라 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무구정광대다라니경>(8세기 중반)·<영태2년명 납석제호>(766) 등이 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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