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7권 한국 서예문화의 역사
  • 1 고대의 문자생활과 서체
  • 03. 통일신라·발해의 문자생활과 서체
  • 발해
손환일

건국 초기 발해(698∼926)의 문화는 고구려의 문화를 기본으로 하였다. 이후 당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임에 따라 당 문화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층 문화는 말갈 문화가 중심이 되고, 이밖에 중앙아시아나 시베리아로부터 전파된 요소와 발해인들이 창조한 고유한 문화도 보인다. 상경은 발해의 수도로 만주 지역의 문화적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문왕 대흥(大興) 40년(776) 이후 국가의 문물제도가 정비되고 당의 문화를 수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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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십(卄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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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덕(保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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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녕(大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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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약(卯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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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십(保十)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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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약(卯若)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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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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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지(毛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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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삼칠(十三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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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切)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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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舍十)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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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試)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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녕(寧)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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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도(奴刀)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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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덕(保德)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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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십(鄭十)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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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문화는 전통적인 고구려 문화의 토대 위에서 당의 문화를 수용하였기 때문에 온돌장치·미술양식·무덤양식 등에서 고구려적인 요소가 나타나 있다. 즉, 발해의 도시유적·성·고분·건축·조각·공예품 등을 비롯하여 유물·유적들은 고구려의 문화를 계승 발전시킨 것이다.

발해의 막새는 제작방식이나 구조와 무늬에서 고구려의 막새기와 관련이 깊고, 기와는 특유의 질박하면서도 호방한 풍취가 느껴지며, 발해인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도구와 무기, 살림집터와 창 고, 무덤 등은 기본적으로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발해 불상의 특징은 같은 시대의 당나라보다는 그 이전의 북조 또는 고구려 때 유행하였던 고식(古式)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발해 불교가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발해 절터에서 출토된 와당양식이 고구려 와당양식과 통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와당의 연꽃 문양이 고구려의 전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전기 발해 불교는 같은 시대의 당나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전통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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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연해주 두만강 근처 염주성(Kraskino성) 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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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연해주 두만강 근처 염주성(Kraskino성) 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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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서사문화에 있어서도 발해에 고유의 문자가 있었다는 견해는 1930년대 이후 발해 건국 유지에서 발굴된 기와에 문자와 부호를 새긴 것이 출토된 데에서 비롯되었다. 이들 명문 기와에 새겨진 문자는 대부분 한자이며, 부호가 쓰여 있는 경우도 있다. 일부 학자들은 명문 기와에 나타나는 이체 한자는 발해가 한자를 기초로 하여 만든 글자이며, 발해인들이 이것을 한자로써 사상을 표현하는 이외의 보충 수단으로 삼았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출토되는 명문기와의 수량이 제한되어 있고, 문장이 아니라 대부분 낱글자이기 때문에 이체 한자를 규명함에 있어서 발해에서 사용된 고유문자라고 단정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고구려 토기 명문이나 발해에서 일본에 보낸 사신의 기록에는 발해에서 만들어 사용된 한자의 예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발해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서사문화를 살펴보면 문왕의 대당교섭 전후로 볼 수 있다. 발해의 전기에 해당하는 문왕 대당교섭 전에는 고구려 <광개토왕릉비>나 <고분벽화 명문>의 서체와 같은 필법을 구사하였다. 문왕이 대당교섭 후부터 당과의 교류가 긴밀해졌고, 이로 인하여 당에서 유행하던 해서와 왕희지의 필법이 전해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발해 전기에 사용된 문자의 서사문화를 살펴보는 입장에서 예서와 해서로 나누어 분석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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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서는 진(秦)에서 시작되어 한대에 유행하였다. 특히, 벽돌이나 와당에 주로 사용되었다. 일반적으로 비석에는 팔분이 사용되었고, 목간이나 죽간에는 팔분과 초서를 혼용한 서체로 이른바 목간체가 쓰여졌다. 삼국과 남북조를 거치면서 해서체가 등장하였고, 이러한 서체의 변화에 따라 많은 이체자가 발생하였다. 수(隋)에 의하여 서체도 많이 정리되었다. 이러한 정비를 바탕으로 당(唐)대에 해서의 전성기를 가져왔다. 당대에는 예서의 사용이 거의 없어졌고, 팔분에 있어서도 두전에 사용하는 정도였으며, 예술성이 떨어져 당예(唐隷)나 당팔분(唐八分)으로 분류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중원의 서사문화는 시대별로 특징을 갖고 있다.

발해는 고구려·말갈·중앙아시아 계통의 문화를 상당히 수용하고 있다. 서체는 당시 통치지배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상급문화이므로, 발해 기와 명문의 서체는 발해가 누구에 의하여 건국되었는가를 말해 준다. 서체에는 당시 지배계층의 문화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고구려인들이 세운 국가라면 고구려의 문화가 있을 것이고, 말갈 사람들이 세운 국가라면 말갈의 문화가 있을 것이다.

발해 기와 명문에 사용된 서체는 크게 두 종류다. 문왕이 당과 교류한 전후를 통하여 당 서법을 수용하기 전의 서체와 그것을 수용한 후의 서체로 나누어 정리할 수 있다. 전자를 발해 명문 서체의 전기, 후자를 후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전기의 작품은 대부분 기와의 명문을 통하여 살펴볼 수 있고, 후기의 작품은 <정혜공주 묘지>·<정효공주 묘지> 등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발해 기와 명문의 연구는 당 서법을 수용하기 전 기와 명문 위주로 진행되어 왔다. 전기의 서사문화에 해당하는 기와 명문을 중심으로 발해에서 사용된 글자의 자체를 예서와 해서 필법으로 나누어 분석이 가능하다.

발해 전기의 서사문화는 변방의 서사문화를 갖고 있다. 아직 예서나 북조의 서법을 사용하고 있는데, 당시에서 볼 때 예서는 한대에 수용한 고식이고, 북조의 서법은 삼국시대에 등장한 해서법으로 새로운 필법이다. 고구려의 경우도 <광개토왕릉비>에는 고식을, 벽화에는 일상 생활에 사용하는 새로운 필법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중원과 변방의 서사문화의 상황을 이해하고 발해 명문의 자체를 예서와 해서로 나누어 서체의 필획과 결구를 분석하여 보면, 발해 전기 기와의 명문은 ‘계(計)’·‘고(固)’·‘공(公)’·‘남(男)’·‘대(大)’·‘모(毛)’·‘모(牟)’·‘갑(甲)’·‘보(保)’·‘비(非)’·‘술(述)’·‘야(也)’·‘여(女)’·‘윤(尹)’·‘입(卄)’·‘전(田)’·‘절(切)’·‘지(地)’·‘취(取)’·‘하(下)’ 등에서 고구려 <광개토왕릉비> 예서법의 특징을 많이 가지고 있다. 즉, 이러한 현상에서 발해 지배계층의 서사문화는 고구려의 서사문화임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고, 지배계층은 고구려인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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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고성자 출토 명문(700년대)
서고성자 출토 명문(70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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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중원의 한족(漢族)은 구양순·우세남·저수량·안진경 등 당(唐) 4대가의 유려한 해서문화를 꽃피우던 시기다. 이 시기 당에서는 예서의 서법을 특수한 경우인 두전에서나 사용되는 정도이다. 그것도 팔분체를 사용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절(切)’을 ‘절(下刀)’로 사용한 이체자는 사경체의 서법으로, 이는 고구려를 통한 불교의 수용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인다. 일본과의 왕래에 있어서도 고구려인이 사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예로 일본 나라현 헤이조쿄(平城京)에서 발견된 목간 묵서에 “의견고려사외래 천평보자이년 십월 팔일 진이계급(依遣高麗使廻來 天平寶字二年 十月 八日 進二階級)”이라고 하였다. 이는 758년 발해 사신 양승경 일행과 함께 귀국한 일본의 오노 다모리(小野田守) 일행을 2계급 특진시킨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발해에 보낸 사신을 ‘견고려사(遣高麗使)’라고 한 것은 사신이 고구려인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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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명문과 광개토대왕릉비 비문 비교
발해 명문과 광개토대왕릉비 비문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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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의 필법은 북위를 중심으로 유행하던 필법이다. 북위의 묘지나 조상기에 가장 많이 남아있다. 필획이 굵고 날카롭게 모난 필획을 위주로 사용하였고, 예서나 팔분에서 해서체로 서체가 변화되는 과정에서 유행하던 서체이기 때문에 이체자가 많다. 이러한 이체는 유행하던 시기와 지역의 분별이 가능한 것도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 명문에도 이러한 북조서법의 필획이 많이 구사되었으며 이체가 사용되었다.

이는 당시의 변방의 서사문화로서 시대가 앞서는 것이다. 북조 필법의 연원에 대하여 고구려 고분벽화 명문의 서체도 그 대상으로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초기 북조의 필법은 한족의 중원문화가 아니다. 한족의 중원문화는 왕희지·왕헌지의 서체를 중심으로 남조에서 유행하던 서체이다. 즉, 남조체가 한족을 대표하는 서체였다. 수대에 와서야 비로소 남국과 함께 서체가 정리되어 남북조의 구별이 없어졌다. 발해의 와당에 쓰여진 명문들은 대부분 고구려의 <광개토왕릉비>와 같은 예서나 북조체와 같은 해서 필법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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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화사 4년명 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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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화사 4년명 불상 명문(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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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전기의 서체에서 ‘강(羌)’·‘다(多)’·‘덕(德)’·‘도(刀)’·‘약(若)’·‘연(延)’·‘유(有)’·‘육(六)’·‘적(赤)’·‘절절(下刀切)’ 등은 북조 필법의 특징을 보이는 글자들로 고구려 벽화명문과 관계가 있다. 그리고 삼국의 사경이나 북위의 묘지명에서나 볼 수 있는 ‘절절(下刀切)’과 같은 이체자는 불교의 수용과 관계가 깊은 것으로 고구려의 불교수용과 관련하여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조(朝)’와 같은 서체는 당 서사문화가 수용된 후의 서체로 후기 서체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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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공주 묘지 명문(780)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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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공주 묘지 명문(780)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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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하지 못한 글자에 대하여는 발해어를 표현한 글자인지 확실하지 않다. 발해 문자에 대한 문헌기록은 『구당서』에 “발해파유문자급서기(渤海頗有文字及書記)”, 『신당서』·『동국사략』·『동국통감』에 “파지서계(頗知書契)”, 『유취국사』에 “발해신파지서(渤海信頗知書)”, 『거란국지』에 “발해지서계(渤海知書契)”, 『고려사』·『금사』에 “발해유문자(渤海有文字)” 등과 이태백(李太白)·온정균(溫庭筠) 등이 발해 사신의 글을 해독한 기록, 일본인이 발해 문자를 해독한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발해 문자는 한자와는 다른 문자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차산성에서 출토된 고구려 토기 명문 중에 「小」(아래 그림 참조)의 명문은 발해 사신의 이름과 매우 유사한 조자원리로 만들어진 「石」(아래 그림 참조)·「木」(아래 그림 참조) 등과 같은 글자들이 있다. 이들은 서로 무관하지 않은 조자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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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토기에 새겨진 글자
고구려 토기에 새겨진 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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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문자의 연구는 1930년대 이후 발해 건국 유지에서 발굴된 기와 문자 출토에서 비롯되었다. 한자가 주를 이루고, 이체자가 사용되었으며, 발해 문자도 사용되었다. 발해 문자에 대하여 당시 김육불(金毓黻)은 “발해인이 특별히 문자를 창제하여 특유의 음을 표출하였다.”는 것이고, 손수인(孫秀仁)도 『당대 발해의 문자와 문자와(唐代渤海的文字和文字瓦)』에서 “읽을 수 없는 문자는 발해인이 창제한 문자”로, 진현창(陳顯昌)도 「당발해문자와」에서 “발해인민이 만든 창조적인 문자”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강(李强)은 「논발해문자(論渤海文字)」에서 이체자를 ‘수이자(殊異字)’ 혹은 ‘부호’로 분류하면서 “발해민족이 창제한 문자는 없다.”고 하였다.

고구려는 음훈표기법을 사용하여 사상과 감정, 문학 및 지명·인명 등의 고유명사를 표현하였다. 해독하지 못한 이들 발해 기와 명문도 한자의 음훈을 빌어 발해어를 표현하는 이두와 같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이두사전』에 “삼국의 초기부터 인명·지명·관직명을 적는데 한자의 음훈을 빌어 적는 방법을 이두”라 하였듯이 고유명사에 ‘叱’ 등을 사용한 예는 <고구려 고분벽화 명문>과 <광개토왕릉비>의 명문에서 보이며 통일신라의 여러 금석문에서도 확인되었다. 이는 이두에서 ‘곳(廤)’·‘곳(蒊)’·‘말(唜)’·‘엇(旕)’·‘각(㔖)’ 등 종성어미의 닫소리로 사용되어 우리말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발해도 역시 발해어 중에서 한자로 표기가 어색한 것은 문자를 만들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발해의 문자는 한자의 자형에서 필획의 가감에 의하여 발해의 언어를 표현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거란 문자가 참고된다.

이상을 정리하면 발해 기와 명문의 서체는 당 서법의 수용을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눈다. 당의 서법이 수용되기 전에는 <광개토왕릉비>의 예서체와 북조 해서체의 서법으로 쓰여졌고, 후기 즉 당나라 서법을 수용한 후의 서체는 당에서 유행한 서체로 쓰여 졌다. 그러므로 발해를 통치한 민족은 <광개토왕릉비>의 예서를 구사할 줄 아는 고구려인들이었다.

『구당서』에 “대조영(大祚榮)을 ‘고려별종(高麗別種)’이었다.”라는 기록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발굴된 유물의 분석을 통하여 발해 문화가 고구려 문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음이 발해 전기 서사문화에서도 입증되었다. 도시·건축·성·무덤 등의 유적들은 상당히 높은 수준의 문화였다. 발해의 수준 높은 문화는 고구려의 문화를 계승하여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즉, 발해의 문화는 초기에 고구려 문화가 중심을 이루다가 8세기 중반 이후 당나라 문화가 중심을 이루면서 더욱 다양하게 변모해 갔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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