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7권 한국 서예문화의 역사
  • 2 고려시대의 문자생활과 서체
  • 03. 고려시대 후기
손환일

고려시대 후기에는 정치적으로 원과의 밀접한 관계로, 고려 측에서는 왕 스스로 원의 수도를 빈번하게 왕래함은 물론 장기간에 걸쳐 체류한 적도 많았고, 학자나 관료들도 사절과 왕의 수행원으로 연경을 자주 출입하였다. 이를 통해서 원의 학자나 관료들의 교류가 거듭되어 고려 후기 한문학의 발전과 서예에도 큰 진전을 보였다. 원의 간섭이 진행되는 동안은 신흥 유학자에 의한 개혁기에 해당된다. 이러한 개혁은 성리학의 수용과 궤를 같이 하며 문화의 수용 또한 상관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다. 원과의 잦은 왕래 속에서 서책의 유입도 많아졌고, 서책의 구입은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새로운 문물을 접하게 되었다.

고려는 무신 정변 이후 종래 귀족 중심의 문화가 큰 동요를 일으키면서 그 기반마저 동요되고 있었다. 게다가 몽고의 침략과 간섭을 받게 되어 고려 문화는 기반에서부터 해체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이 같은 사회적 시련과 문화적 갈등을 겪으면서 지방에서 성장한 신진 지식층은 기존의 지배 계층인 보수적 권문세족에 대항하여 전면적인 사회개혁과 문화혁신을 주장하였다. 즉, 정치·사회적 지배세력으로서 권문세족이 존재하였고, 다른 한쪽에서는 사대부가 성장하여 권문세족과 대립한 끝에 결국 개혁을 달성하고 조선 건국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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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각사 보각국사정조비 명첩(1295)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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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각사 보각국사정조비(1289)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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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정방(政房)을 통해 진출한 신진 관인들은 신돈(辛旽)의 개혁을 계기로 ‘신진세력’이라는 정치세력으로 대두하였으며, 고려 후기 농업생산력의 발달과 그에 따른 사회변동이 사대부가 성장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배경이 되었다. 이때 원을 통해서 전래된 성리학은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신진 지식층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으며, 이후 고려 말 조선 초의 문화변동을 주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원을 통하여 새로운 사상체계인 성리학이 도입되고, 원과의 문화교섭이 빈번해 짐에 따라, 안향(安珦)·백이정(白頤正)·이제현(李齊賢) 등이 고려와 원의 학계에 교량 역할을 하면서 성리학을 적극적으로 수용 하였다.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정도전(鄭道傳) 등은 성리학에 입각하여 고려 문화 전반에 대한 비판을 가하면서 그 개혁을 주장하여, 사상적 파동이 매우 컸으며 사회 전반에 걸쳐 변화와 개혁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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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사 장경비(1327) 탁본
문수사 장경비(1327)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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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주사 자정국존비 두전(1342) 탁본
법주사 자정국존비 두전(1342)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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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수용된 문화는 개혁의 주체세력, 즉 신흥 유신 사이에서 유행하였다. 고려 말 원의 문화 수용 초기, 특히 글씨의 경우 과거시험 과정에서 스승의 직접적인 지도와 교본으로 사용하던 서첩에 의한 영향이 지배적이었다. 특히, 충선왕(1275∼1325)이 연경에 만권당을 설치하고(1314), 이제현(1287∼1367) 등 신진사대부들과 당시 서가의 제1인자인 조맹부(1254∼1322)와 교우하게 함으로써 주자성리학이나 송설체의 진수를 직접 전수받았다. 이 때문에 조맹부의 서적이 이 시기에 대량으로 수입되어 고려 말에서부터 조선 초에 이르는 약 200년 간 조맹부 서체가 유행하였다.

조맹부체(송설체)의 수용은 충선왕의 역할이 컸다. 1313년 주자학이 관학으로 선포되면서 11월 과거제도가 부활되고, 충선왕은 1314년 3월 관학의 정비와 그 뒷받침을 하기 위한 만권당 설립을 후원하였다. 여기서 남방과 북방 출신을 막론하고 조맹부·요수(姚燧)·염복(閻復)·원명선(元明善)·우집(虞集)·왕구(王構)·이제현·이란(李欄)·오징(吳澄)·등문원(鄧文源) 등과 노소를 불문하고 서로 사우관계를 맺으며 활동하였으며, 조맹부의 문하생인 주덕윤(朱德潤) 등이 모여 서화를 즐기 면서 상당한 힘을 가진 정치세력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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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사 선각왕사비(1377) 탁본
회암사 선각왕사비(1377)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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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주사 자정국존비 부분
법주사 자정국존비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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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현(1287∼1367) 초상
이제현(1287∼1367)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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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후기(13∼14세기)의 명필로는 김효인(金孝印, ?∼1253)·이암(李嵒)·전원발(全元發, ?∼?)·권중화(權仲和, 1322∼1408)·성석린(成石璘, 1338∼1423)·권주(權鑄, ?∼1394) 등이 있지만 양식·형식·서체 등에 있어서 다양하지 못한 쇠퇴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암은 철저한 소전을 구사한 명필로 <태종무열왕릉비 제액> 이후 최고의 명작을 남겼다. 한수(韓脩, 1333∼1384)의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神勒寺普濟尊者石鐘碑)>와 권주의 <회암사 선각왕사비(檜巖寺禪覺王師碑)> 모두 고려시대 후기의 명품들이다.

고려시대 후기 조맹부체의 유행은 많은 전적의 유입과 사신들의 왕래, 과거제도의 부활, 신흥사대부들의 기호에 잘 부합되어 유행하게 되었다. 고려 말 행촌 이암은 조맹부체의 수용 초기에 서예사의 중요한 시점을 점하고 있다. 그는 조맹부를 배웠으나 조맹부와는 다른 나름대로의 서예 세계를 구사하였다. 고려 후기에는 조맹부의 필법이 유행하여 조선시대 서법에 왕과 왕족, 사대부들과 인쇄문화를 중심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다. 즉, 이암(1297∼1364)은 조맹부체의 대표적인 명필로 <청평산 문수원장경비>가 있다. 서거정은 『필원잡기(筆苑雜記)』에서 “우리나라 사람으로 조맹부의 필법 정신을 얻은 사람은 행촌 한 사람뿐이다.”라고 극찬하였다.

고려시대 후기에 해당하는 13세기부터는 제액과 두전, 그리고 제액식 두전이 함께 사용되었다. 그러나 고려시대 후기에 이르면 제액과 제액식 두전보다는 역시 두전 양식이 지배적이다. 이러한 14세기의 두전 양식은 조선시대로 이어졌다.

제액으로는 <인각사 보각국사정조비>가 있다. 고려시대 후기의 제액으로 매우 드문 예에 해당하며 제액보다는 두전이나 제액식 두전이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액식 두전은 <보광사 중창비(普光寺重創碑)>[1358, 주백기 전(周伯琦 篆)]·<회암사 선각왕사비> 등으로 나누어 분류할 수 있다. 고려시대 중기에 유행한 제액식 두전은 고려 후기에는 쇠퇴하게 되었으며 대신 14세기부터는 두전양식이 유행하게 되었다.

음각두전은 고려시대 후기인 13세기에 보이지 않다가 다시 14세기에 나타나는데, 당시 제일 많이 사용된 기록 양식인 두전으로는 <보경사 원진국사비(寶鏡寺圓眞國師碑)>[1224, 김효인 봉선서(金孝印 奉宣書)]·<법주사 자정국존보명탑비(法住寺慈淨國尊普明塔碑)>[1342, 전원발 전(全元發 篆)]·<최문도 묘지(崔文度墓誌)>(1345)·<불갑사 각진국사비(佛岬寺覺眞國師碑)>(1359)·<태고사 원증국사탑비(太古寺圓證國師塔碑)>[1385, 권주 서단병전액(權鑄 書丹幷篆額)]·<사나사 원증국사석종비(舍那寺圓證國師石鐘碑)>[1386, 의문 서(誼聞 書)]·<창성사 진각국사탑비(彰聖寺眞覺國師塔碑)>[1386, 성석린 전(成石璘 篆)] 등이 있다. 이로부터 두전양식의 유행이 시작되었다.

고려시대 후기에는 양각두전이 자취를 감추었는데, 이는 아마도 새기기 어려우며 품이 많이 드는 경제성 때문으로 생각된다.

고려시대의 해서두전은 <보경사 원진국사비>·<월남사 진각국사 비(月南寺眞覺國師碑)>(1235)·<홍진국존비명(弘眞國尊碑銘)>(1298)·<불갑사 각진국사비> 등이 있다. 이 중에서 해서제액 양식은 <인각사 보각국사정조비> 1점이 있으며, 두전식의 해서두전은 <보경사 원진국사비>·<불갑사 각진국사비> 등이 있다. 제액식 두전의 해서두전과 유엽두전은 볼 수 없다. 그만큼 두전양식이 획일화되면서 자체나 서체 모두 형식에 맞춰지게 되었다. 14세기 두전의 장법 양식이 그대로 조선으로 이어지게 된 예는 고려시대 초기의 제액양식이 신라의 양식을 그대로 수용하여 전수된 상황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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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갑사 각진국사비
불갑사 각진국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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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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