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7권 한국 서예문화의 역사
  • 2 고려시대의 문자생활과 서체
  • 05. 고려시대 사경
손환일

불경의 제작은 인쇄본인 인경(印經)과 필사본인 사경(寫經)으로 나눈다. 인경은 대개 목판인쇄본이 많고, 사경은 직접 종이에 먹으로 쓰거나 금분(金粉)이나 은분(銀粉)을 아교에 개어 필사한다. 인경은 판각본을 인출하여 성책하거나 장정으로 제작된다. 불경의 제작과 관련된 의식과정, 구성이나 형식은 인경과 사경이 서로 유사하다.

인경은 인쇄경(印刷經)의 준말로, 고려 인경은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속장경(續藏經)>·<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이 대표적이다. <초조대장경>은 고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을 불력(佛力)으로 물리치기 위해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이 흥왕사(興王寺)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고 대장경의 주석서를 집대성하여 1011년에 판각하기 시작하였으며, 1090년부터 1101년까지 간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대구 부인사에 보관했지만 1232년 몽골의 2차 침입 때 모두 불타 버렸다. 한편, 초조대장경이 의천의 주도하에 보완된 것이 <속장경(續藏經)>(1092∼1101)>이다. 그리고 고려 고종 때 1232년 강화로 도읍을 옮기고 대장도감(大藏都監)에서 판각 한 대장경판이 해인사의 재조대장경판(再雕大藏經版)이다. 초조대장경판은 남아있지 않지만 이것을 기초로 다시 제작한 <재조대장경>을 통해 규모와 정교함을 엿볼 수 있다. 대장경의 판각은 인쇄술의 발달을 가져왔다. 14세기에는 이미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사용하였음이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1377)을 통하여 알려졌다.

사경은 필사경(筆寫經)의 준말로 불경(佛經)을 붓으로 쓰는 것이다. 고려시대 사경은 서사문화에 중요한 분야이다. 사경은 불경으로, 불경은 삼보(三寶) 중의 하나이다. 삼보는 불(佛)·법(法)·승(僧)을 말하는 것으로,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법보(法寶)는 법신사리인데, 『법화경』에는 불경을 진신사리와 동일하게 말한다. 이와 같이 사경은 신앙의식을 통하여 만들어지는 성스러운 결과물이다.

사경은 국왕발원경과 개인발원경이 있다. 특히, 국왕발원경은 사경승(寫經僧, 經生)이라는 사경을 담당하는 필사전문 승려가 담당한다. 충렬왕 16년(1290)에는 고려 사경승을 100여 명이나 요청하였을 정도로 고려의 사경은 인기가 대단하였고, 품격이 높았으며, 질이 좋은 사경을 사성(寫成)하였다. 그 중에서도 전문 사경승에 의하여 조성된 국왕발원경은 당시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예술품으로 대표된다.

고려시대에 가장 많이 필사한 불경은 『묘법연화경(妙法蓮花經, 법화경)』이다. 그리고 『대방광불화엄경』·『금강경』·『금광명경』·『아미타경』·『지장보살본원경』·『부모은중경』·『원각경』·『능엄경』 등이 주로 많이 사경되었으며, 이들 경전은 시대마다 조금 다르게 유행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사경필사의 기본정신이 퇴색하여 구복과 재앙구제 등 불사(佛事)의 개념으로 성행하였다. 특히, 귀족 불교문화의 융성은 사경을 고급화하였다. 그래서 백지묵서경이 드물고 감지금니경이나 감지은니경과 같은 금자경이나 은자경의 고급사경이 많이 제작되었다. 그러나 고려 초기 금사경과 은사경을 금지하자는 최승로(崔承老, 927∼989)의 상소로 보아 그 폐해가 컸던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감지금니경은 그 제작과정이 어렵고 비용이 많이 소요되어 가능한 제작을 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고려 중기의 사경은 매우 드물다.

사경은 제본형태에 따라 두루마리형식의 권자본, 병풍처럼 첩으로 접는 형태의 절첩본(첩장본), 오침안정법에 의하여 묶은 선장본 등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형식이 권자본인데 함안 성산산성에서 6세기 중반 권자본에 사용된 제첨축이 출토된 바 있다. 후대에 내려올수록 본원경(本願經)의 주석이 많아지기 때문에 분량이 많아지면서 선장본으로 성책하여 간행되었다.

사경의 구성은 대체로 표지, 변상도(變相圖), 본원경, 조성기로 구분된다. 표지에는 연화문과 보상화문을 장식하고 표제를 갖추었다. 권 머리 장식에는 화사(畵師)가 변상도를 그려 넣었고, 변상도 다음에는 사경승에 의하여 본원경이 기록된다. 그리고 본원경의 뒤에는 간단히 조성기를 만들어서 언제, 어디서, 어떤 연유로, 누가 시주하여 사성한다는 발원자를 기록하고 끝에 필사자를 적었다. 물론 이러한 원칙이 모두 갖추어진 것은 아니나 대부분의 사경에 이러한 조성기가 있다.

사경의 제작은 닥나무를 기르는 일에서부터 종교적인 의식이 따랐으며 매우 신성하게 진행되었다. 사경의 제작과 관련하여 <신라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국보 제196호)의 발원문에는 그 내용이 자세하다. 사경의 제작에는 사경지(寫經紙)를 만들기 위하여 필요한 닥나무의 재배에서부터 사경이 완료될 때까지의 사경제작에 참여하는 제작자들의 자세와 의식절차와 방법이 자세하다. 그 중에서도 사경은 필사(筆師, 寫經僧, 經生)가 사경소(寫經所)에서 엄숙하고 장엄한 의식절차에 의하여 진행되었다. 그래서 사경은 단순한 필사(筆寫)의 개념이 아니라 신앙의식이다. 『법화경』「권발품」에는 “법화경을 서사하면 도리천(忉利天)에 태어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처럼 사경은 행위자체가 공덕이 큰 것이다.

고려 초기에는 주로 사찰을 중심으로 사경승에 의하여 사경이 제작되지만 무신집권기 중기 이후부터는 국가에서 사경원(寫經院)을 설치하고 금자원(金字院)과 은자원(銀字院)을 두어 <대장경(大藏經)>의 사성이 주로 이루어졌다. <신라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의 의하면 사경의 제작은 종이 만드는 지작인(紙作人), 사경하는 필사자(筆寫者), 축심을 만드는 경심장(經心匠), 변상도를 그리는 화사(畵師), 불경의 표제를 쓰는 경제필사(經題筆寫) 등이 서로 역할을 분담하였다.

사경은 묵서경, 금자경(金字經), 은자경(銀子經) 등이 있다. 쪽물로 염색한 감지에 금으로 쓰면 감지금니, 은으로 쓰면 감지은니, 도토리로 물 드린 종이에 금으로 쓰면 상지금니, 은으로 쓰면 상지은니 사경이다. 그러나 흰 종이에 먹으로 쓴 백지묵서가 일반적으로 사성되었다.

인경을 위한 인쇄용 목판이나 활자에도 획이 바른 서체양식을 선호하였다. 그래서 인경의 경우도 <초조대장경>·<속장경>·<재조대장경>·<감지금니대반야바라밀타경 권175>(1055) 모두 구양순체가 주로 사용되었다. 구양순체의 사용은 991년 한언공(韓彦恭)에 의하여 들여온 송나라 관판대장경(官版大藏經)을 토대로 <초조대장경>을 간행했기 때문에 송판(宋版)에 사용된 구양순체를 판본으로 사용하게 된 것에서 연유한다. 그러나 간혹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경우와 같이 북조체가 사용된 예를 볼 수 있다. 이같이 불경을 새긴 경판에는 간결하고 단순한 필획, 엄정한 결구의 구양순체가 주로 사용되었다. 경판에 사용된 각법은 모두 양각이다. 음각보다 양각은 각수(刻手)의 공력이 더 많이 필요한데 이는 부처님 말씀에 대한 공경의 표시로 생각된다.

사경은 일반적인 묵서의 기록개념과는 다르기 때문에 여러 의식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서체에 있어서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즉, 예술적인 표현의 영역이 한정되었다. 사경은 항상 필획의 필법이 분명하고, 결구가 엄정한 해서로 쓰여 졌다. 한 점, 한 획의 착오도 허용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자간(字間)과 행간(行間)이 분명하여 글자의 필획이 겹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글자 간의 필획이나 결구가 서로 겹치는 것은 엄격하게 제한된 금기의 필법이다. 그리고 사경에서는 허획(虛劃)의 사용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초서나 행서로 쓰지 않는다. 왕희지의 행서나 초서가 사경에 사용되지 않은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래서 사경에는 교정이나 보정이 사용되지 않았으며 보수성이 강한 사경법이 전수되었다.

사경에 사용된 서체는 대부분 필획은 구양순체, 결구는 사경체가 사용되었다. 대체로 고려 초기에 조성된 <대보적경 권32>(1006)·<대반야경 권175>(1055)·<법화경>(1081) 등은 구양순체의 필획, 사경체의 결구로 사성된 사경들이다. 이들이 구양순체로 사성된 것은 송판을 본으로 한 <초조대장경>의 제작과 무관하지 않다. 물론 구양순체가 가장 획이 바른 서체이기도 하다. 그러나 판본제작의 어려움이 판각에 있고 판각의 필획을 새기는 것은 곡선이 어렵고 직선이 쉽기 때문에 구양순체를 선호하였을 것이다. 반면에 사경체는 필획에 곡선이 많아 새기기 어렵고 품이 많이 들어 피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판본의 인경에는 구양순체가 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결구는 사경체의 정사각형 결구를 따랐다.

고려 중기에는 사경이 매우 드물다. <법화경>(1249)·<장아함경>(1199) 등의 예가 있을 뿐이다. <법화경>은 구양순체를 따랐지만, <장아함경>은 사경체를 본받았다. 인경의 예로는 <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初)>·<정원신역화엄경소(貞元新譯花嚴經疏) 권6>·<금강반야경소개현초(金剛般若經疏開玄抄)> 등이 대부분 구양순체의 필획, 사경체의 결구로 인쇄되었다.

고려 후기 사경은 형식과 계층이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충 렬왕과 충선왕은 국왕발원사경을 많이 하였다. 사경의 서체에 있어서도 구양순체의 날카롭고 가는 필획을 벗어나 둥글고 굵은 필획을 사용하였다. 그래서 <보살선계경>(1280)·<불설아미타경>(1294) 등을 시작으로 굵은 필획의 사경체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사경체의 경향은 <법화경 권1∼8>(1332)·<화엄경 보원행원품>(1334)·<화엄경 권15>(1334)·<법화경 권1∼7>(1340)·<법화경 권1∼7>(1353) 등 고려 말기까지 사경에 사용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본래 사경체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고려 후기 사경에는 필획에 있어서도 사경체와 구양순체가 혼합되어 사용된 시기이다. 그리고 고려 말기에는 개인의 개성이 강한 서체들이 나타나는 시기이기도하다. 한 예로 조맹부체의 유행에 따라 조맹부체의 사경이 출현하였다. 시대는 다르지만 안평대군 이용이 쓴 사경으로 전하는 <묘법연화경 권4∼권7>(1448)은 조맹부체이다. 고려시대에는 사경이 유행한 시대로 사경은 불화와 함께 최고의 불교문화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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