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7권 한국 서예문화의 역사
  • 3 조선시대의 서예 동향과 서예가
  • 01. 조선시대의 서예 동향
  • 조선 전기 서예 동향
  • 1. 서예정책
이성배

조선은 건국 이후 정치·사회·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특히, 고려 말에 등장하여 조선을 건국한 신진사대부는 성리학을 중심 이념으로 하는 조선의 문화 주체자로서 자부심과 사명의식이 대단하였다. 이들은 성리학을 이론적 토대로 삼아 정치와 경제와 사회의 개혁뿐만 아니라 예술 영역도 새롭게 인식하고 해석하였다.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사조가 조선 예술의 성격을 다양하고도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도록 작용한 것이다.

성리학이 예술 영역에 영향을 미쳤다면 그 중에서 서예 부문도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성리학이 예술정신을 점차 지배하던 조선 초기의 서예는 이전과 구별되는 이론적 특징과 서풍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조선왕조는 고려와 같이 학교에서 서예박사를 두어 교육하거나 과거과목의 하나로 서예를 따로 분류하지 않았다. 대신에 학교와 해당 관청에서 해당 관원에게 필요에 따라 교육을 실시하였다.1) 조선왕조의 기본 법서인 『경국대전』, 「예전」, 취재를 보면 교서관 관원에게 매월 提調가 八分과 大篆과 上方篆 등의 글자를 시험 보도록 하였고 과목의 차서를 장부에 기록하여 성적의 상하를 증빙하도록 하였다. 대전은 비갈에 사용하고, 소전은 도서에 사용하며, 상방전은 인장에 사용한다. 따라서 교육 내용과 과목이 그리 체계적이지 못하여 폐단이 발생하였다. 예를 들면 세종 때 의정부에서 “교서관(校書館)에서 전자(篆字)를 익히는 학습법은 육전(六典)에 실려 있으나 출척(黜陟)하는 법이 없어서 기꺼이 공부하는데 힘쓰지 않아 도서(圖書)와 비갈(碑碣)의 전액(篆額)을 쓸 수 있는 자가 적어 실로 염려스럽습니다. 지금부터 매월 시험을 치르고, 성적을 보고할 때 비록 중하등(中下等)이라도 자학(字學)이 상등(上等)이면 자학의 등급에 따라서 폄출(貶黜)을 허여하지 말고, 매번 상등이며 십분 정밀하고 익숙한 자는 단계를 거치지 않고 임용하도록 권한 후에 따르도록 할 것을 청합니다.”라는 계(啓)를 올리고 있다.2) 『세종실록』 권83, 세종 20년 11월 4일. 이러한 내용은 조선왕조의 서예 교육이 제도적으로 정착되지 않아 발생한 것이다.

조선왕조는 서예정책의 일환으로 법첩(法帖)을 수집하고 간행하여 배포하였다. 조정에서 법첩을 간행하여 널리 배포한 것은 조선왕조에 생긴 새로운 현상이었다. 이전에는 주로 집자(集字) 형태로 행해졌던 것이 인쇄술과 제지술의 발달에 힘입어 새로운 방식으로 나타난 것이다. 역대 왕들은 표준으로 삼을 수 있는 서체를 구하기 위해 꾸준히 역대 명첩(名帖)을 수집·간행하고 좋은 활자를 주조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세종부터 문종·세조·성종 때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러한 서예정책을 뒷받침하는 법첩 수집과 간행 사례들을 몇 가지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세종조의 경우를 살펴보기로 한다. 세종 17년(1435)에 허조(許稠)가 아뢰기를 “지금 승문원관이 글씨 쓰는 것은 법도가 바르지 않은데 참으로 좋은 서체를 보지 못한 까닭입니다. 좋은 서체는 진자(晉字)만한 것이 없으니 원컨대 구하여 좋은 법을 취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자, 상이 말하기를 “나는 글씨 쓰는데 뜻을 두지 않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설암체(雪庵體)를 숭상하는데 조금 기이 하고 특이하다. 그러나 좋은 서체를 얻을 수 없어서 마침내 글자 모양이 심히 비루하게 되어 진자만 못하다. 내가 장차 구하여 내릴 것이다.”라고 하였다.

세종 24년에는 당시에 각 도의 비문(碑文)을 대소 신료에게 하사하는 일이 있었다. 처음에 왕이 각 도의 사찰과 사당의 비명을 탁본하여 세법으로 삼고자 각 도에 모인(摹印, 탁본)을 바치도록 하였다. 이에 각 도는 모인하기 위한 장활지(長闊紙)를 만들라는 차자(箚子)를 내리고, 젊은 사람을 징발하고, 또 밀랍과 먹과 전(氈, 솜털로 만든 모직물)을 수렴하도록 하였다. 1년 정도 모인하도록 하자 민폐가 매우 많아 마침내 더 이상 만들 수 없었다. 모인한 것을 신료에게 하사하였는데 한 사람이 10여 장을 얻는 이도 있었고, 심지어 하급 관료인 내노선부(內奴膳夫, 종7품 잡직)까지 받았는데 또한 모두 지나치게 많이 받았다. 이러한 일 때문에 당시 경상도의 민간인 사이에서는 “민간의 전관(氈冠)은 아마도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이 나돌았다.3) 『세종실록』 권96, 세종 24년 5월 28일. 이러한 일화는 민폐를 끼쳤지만 좋은 비명을 모인하여 서법으로 삼으려는 정책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무렵 안평대군(1418∼1453)은 자신이 수장한 조맹부의 필적을 중심으로 <비해당집고첩(匪懈堂集古帖)>을 간행하였다.4) 안평대군은 그가 수장하고 있던 법첩을 이미 1443년(세종 25)에 간행하였다(이완우, 「조선시대 송설체의 토착화」, 『서예학』 2, 2001, p.251). 이것은 좋은 필적을 널리 유포하려는 당시 조정의 정책과 부합되는 것이다.

문종조의 경우를 살펴보면, 안평대군이 <역대제왕명현집고첩(歷代帝王名賢集古帖)>, <왕희지진행초삼첩(王羲之眞行草三帖)>, <조자앙진초천자문(趙子昻眞草千字文)> 등 서법판본(書法板本)을 진상하자 교서관(校書館)에 주어 다른 사람들이 모인하도록 허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5) 『문종실록』 권4, 문종 즉위년 11월. 여기에 등장하는 판본은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다. 안평대군은 당시 상당한 분량의 중국 서화를 수장하고 있었다. 서첩 중에 송설의 필적이 많았는데, 고려 말부터 만권당을 통해 들어온 송설의 필적 중에서 상당수가 조선 왕실로 흘러들어 온 것과 또 개별 적으로 수집한 것이었다. 신숙주의 <화기(畵記)>에 의하면 안평대군은 수백 축의 서화첩을 소유하고 있었다.6) 『保閑齋集』 권14, 「畵記」. 그 중에서 글씨는 오도자(吳道子)의 그림에 쓴 소동파의 제찬, 곽충서(郭忠恕)의 그림에 쓴 휘종의 어필, 이공린(李公麟)의 그림에 쓴 휘종의 어필, 소동파의 진서조주인본(眞書潮州印本)이 1축, 조맹부의 행서 26축, 선우추(鮮于樞)의 초서 6축이 있다. 따라서 안평대군은 송·원대의 법첩을 주로 수장하였고, 특히 송설의 법첩을 많이 보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안평대군은 조맹부의 행서와 선우추의 초서를 좋아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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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대군(이용)의 <칠언절구>
안평대군(이용)의 <칠언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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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대군(이용)의 <오언율시>
안평대군(이용)의 <오언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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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대군이 서화 수집을 얼마나 좋아하였는지는 다음 일화에서 살필 수 있다. 단종 즉위년(1452)에 수양대군이 명을 다녀왔는데, 이 때는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사이에 정치적 알력이 있었고, 극도의 긴장감이 맴돌던 시기였다. 안평대군은 당시 김종서(1390∼1453)와 황보인(?∼1453), 이현노(?∼1453) 등과 연계하여 인사 행정인 황표정사(黃標政事)를 장악하고 있었고, 이징옥을 시켜 무기를 함경도 경성에서 한양으로 옮기는 등 실력을 키우고 있었다. 그런데 수양 대군은 중국을 다녀와서 황표정사를 폐지하는 등 정치적으로 적대적인 안평대군을 곤경에 빠지게 하였다.

당시 기록을 보면 “세조가 순안(順安)에 이르러 용(瑢, 안평대군)이 심한 지경에 이르렀음을 위무하고 구해 온 중국 법첩을 주자 용이 매우 좋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7) 『단종실록』 권4, 단종 1년 2월 14일. 수양에게 정치적인 궁지에 몰린 상황인데도 단지 법첩을 받고 좋아 하였음은 안평이 법첩을 수집하는 벽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를 통해 안평대군은 예술적인 감성은 뛰어날지 모르지만 정치적인 능력은 미치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조 때 조정은 법첩 간행과 수집을 더욱 활발히 하였다. 세조는 즉위년(1455)에 주자소에 명하여 교서관이 소장한 고첩(古帖), 조맹부의 <증도가(證道歌)>·<진초천자(眞草千字)>·<동서명(東西銘)>, 왕희지의 <동방삭화찬(東方朔畵讚)>·<난정기(蘭亭記)>, 설암의 <두타첩(頭陀帖)>, 영흥대군 이염(李琰)이 집에 소장한 <조맹부적벽가(趙孟頫赤壁賦)> 등의 판본을 인쇄하여 성균관에 보내서 유생들로 하여금 교범으로 사용하도록 하였다.8) 『세조실록』 권2, 세조 1년 10월 14일.

세조 3년(1457) 군신이 모인 자리에서 세조는 왕희지와 조맹부 서첩을 내어 보여주고 서법을 의논하고 있었다. 이 때 정인지가 말하기를 “본조의 사람들은 서법은 모두 속되어 예전만 못합니다.”라고 하자, 세조가 말하기를 “법첩을 널리 배포하면 당연히 글을 잘 쓰는 자가 나올 것이다.”라고 하였다.9) 『세조실록』 권8, 세조 3년 7월 6일. 이 대화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의 기준을 왕희지와 조맹부의 서법으로 삼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조선 초기 이 두 서체가 중심 서체가 되어 글씨를 잘 쓰고 못 쓰는 판단기준이 된 것이다.

세조 5년 전지로 예조에 이르기를 “나는 법첩을 많이 인쇄하여 국중에 널리 배포하고 싶으니 만일 조학사(趙學士)가 쓴 진필(眞筆)이나 <진초천자문> 등의 글씨를 진상하는 자가 있으면 상 을 후하게 내릴 것이고, 또한 병풍이나 족자나 법첩은 모각한 뒤에 다시 주인에게 돌려 줄 것이다. 이것을 안팎으로 알려라.”라고 하였다.10) 『세조실록』 권16, 세조 5년 6월 24일. 이 말은 세조 때에도 지속적으로 조맹부 법첩을 중심으로 모각되어 간행하였음을 알려 주는 것이다.

세조 7년에는 이암·한수·공부·최흥효·신장·성개 등의 필적을 찾아 궁중에 두도록 하였다.11) 『세조실록』 권24, 세조 7년 6월 5일. 이어 성종 6년에는 <난정법첩(蘭亭法帖)> 5부를 한명희, 신숙주, 윤자운, 홍윤성, 노사신에게 나누어 주었고,12) 『성종실록』 권51, 성종 6년 1월 29일. 또 성종 24년에는 이극돈이 비명(碑銘) 인본(印本) 3폭을 진상하면서 이르기를 “이것은 비록 불가의 일이지만 그 필적은 반드시 왕우군의 것입니다. 또한, 법첩에도 『증도가』나 『원각경』이 있기 때문에 감히 드리는 것입니다.”라는 기록이 있다.13) 『성종실록』 권278, 성종 13년 8월 14일. 이 두 대목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법첩 간행이나 수집의 대상이 조맹부첩 중심에서 왕희지첩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현상은 성종 시기에 조선 서예사의 흐름이 바뀌고 있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물론 성종조와 중종조에도 조맹부나 선우추 등의 법첩을 진상하고 수집하는 내용이 지속되고 있다.14) 성종 15년 5월과 21년 3월에도 조맹부 글씨를 진상하는 기록이 있고, 중종 19년 5월에는 선우추 글씨를 진상하는 기록이 있다.

중종은 중국 황실의 도서관인 천록각(天祿閣)과 비서각(秘書閣)처럼 궁중 안에 도서를 두어 치도(治道)에 도움을 주어야 하며 이를 위해 서책의 무역을 강조하였고, 각종 비첩과 서화 등을 구하려 하였다.15) 『중종실록』 권23, 중종 10년 11월 4일. 이처럼 역대 왕들이 어필이나 국내외의 명필의 비첩이나 글씨를 수장한 것은 활자에 활용하거나 유가적인 치세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명의 사신에게 선물로 주거나 대마도와 유구국 등에 서화를 주어 외교 수단으로 삼기도 하였다. 이러한 풍조를 바탕으로 서화에 뛰어난 군주들이 등장하였고, 서화를 완상하는 궁중 문화가 등장할 수 있었다.

선조는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과 정룡(鄭龍) 등이 가져온 서화에 관심을 갖고 감상을 하였으며, 명대 서예가인 문징명(文徵明)과 축 윤명(祝允明)에 대해서 <진초십칠첩(晉草十七帖)>을 가장 잘 썼다고 하였다.16) 『선조실록』 권202, 선조 39년 8월 6일. 선조는 한호(韓濩)와 윤근수(尹根壽) 글씨를 좋아하여 두 사람의 글씨를 구해 보았다. 특히, 한호로 하여금 <천자문>을 쓰도록 하여 조정에서 간행함으로써 조선 중기에 국정서체로 크게 성행하도록 하였다.17) 이완우, 『석봉 한호 서예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사학위논문, 1998에서 석봉체의 성행에 대해 잘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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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안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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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는 글을 숭상하는 정책으로 유생들에게 학문을 권장하고 서책을 보급하기 위해 활자와 인쇄문화를 발전시켰다. 조선 전기의 활자는 서예 명가의 글씨를 바탕으로 주조되었기 때문에 서예의 독특한 분위기를 잘 반영하고 있고, 정치 변화에 따라 여러 번 활자를 주조하여 이에 따른 서체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태종 3년 처음 주자소를 설치하여 본격적으로 많은 책을 찍어 냈는데 이 때 처음으로 주조된 활자가 구양순체를 사용한 계미자(癸未字)이다.

세종 2년(1420)에 계미자의 단점을 보완하여 두 번째 주조한 활자가 경자자(庚子字)인데, 이 활자는 구양순체를 바탕으로 하면서 기필 부분과 전절 부분을 좀 더 부드럽게 처리하였으며, 좀 더 단아하지만 작고 빽빽한 느낌을 준다.

세종 16년(1434)에는 처음으로 갑인자를 주조하였는데 진양대군 유(瑈)가 일부 부족한 글자를 썼으며, 일명 위부인자(衛夫人字)라고 한다. 그런데 판본을 살펴보면 오히려 송설의 연미한 필획을 살필 수 있다. 특히, 기억할 만한 것은 갑인자를 바탕으로 한글 활자를 병용하였는데, 이것을 초조 갑인자 병용 한글자라고 한다.18) 이 활자는 이후 재주갑인자, 무오자, 무신자, 임진자, 정유자로 改鑄되면서 조선 말기까지 이어진다. 활자가 아름다워 다른 활자가 만들어지는데 기술을 제공하였으며, 각 개주 활자 마다 각각의 특징이 있다고 한다. 이하 활자에 대해서는 천혜봉, 『한국서지학』, 민음사, 1996을 참조. 세종 18년에는 진양대군 유의 글씨를 바탕으로 주조한 병진자(丙辰字)가 있다.

문종 즉위년(1450)에 안평대군 글씨를 바탕으로 경오자(庚午字)를 만들었는데, 당대 명필의 필의를 살필 수 있다. 자획이 유려하고 필세가 강건하며 활달하다. 그러나 경오자는 세조의 찬탈로 안평대군이 사사된 후 바로 녹여져 단명하는 불운을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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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인자로 찍은 『자치통감』 강목
갑인자로 찍은 『자치통감』 강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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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는 즉위(1455)하여 곧바로 경오자를 녹이고 강희안(姜希顔)에게 글씨를 쓰도록 하여 을해자(乙亥字)를 주조하였다. 을해자는 불서와 『한글능엄경』을 찍어서 ‘을해자 병용 한글자’라 부른다. 이 활자는 자형이 납작하고 폭이 넓으며 원필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임진왜란 직전까지 갑인자 다음으로 많이 사용되어 판본이 많이 전한다. 송설체를 바탕으로 한 부드러움이 있다.

세조 3년에는 일찍 죽은 왕세자 덕종(德宗)을 위해 친히 『금강경』 글씨를 써서 그것을 바탕으로 동활자를 주조하니 정축자(丁丑字)라 한다. 글씨풍은 송설에 근사하지만 매우 근엄하다. 세조 11년(1465)에는 『구결원각경(口訣圓覺經)』을 인쇄하기 위해 정난종(鄭蘭宗)에게 크고 작은 글씨를 쓰도록 하고 한글 활자를 함께 사용하니 이를 을유자(乙酉字, 1465)라 한다. 자체가 단정치 않고 불경의 간행을 위해 만들었으므로 일부 혹평이 있었다.

성종 16년(1485) 갑진자(甲辰字)가 주조되었는데, 이전 활자보다 획이 바르고 단아하다. 성종 24년에는 활자가 더 커진 계축자(癸丑字)를 만들었는데 덜 세련되었다는 평을 듣는다. 이어 중종 11년(1516)에 갑진자가 닳고 유실된 것이 많아 다시 병자자(丙子字)를 주조하였다. 선조 21년(1588)에서 23년 사이에는 주로 사신 등 경서와 국역본을 찍기 위해 주조되어 경진자(庚辰字), 방을해자(倣乙亥字) 등으로 불린다.

이상으로 살펴본 조선 초기의 서예정책은 제도적인 교육의 미비로 여러 문제가 나타나고 있으며, 이를 보완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역대의 명첩(名帖)을 수집 간행하여 배포하면서 인쇄문화의 발달로도 이어졌다. 그리고 이를 통해 서체가 보급되고 발전되는 효과를 볼 수 있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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