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7권 한국 서예문화의 역사
  • 3 조선시대의 서예 동향과 서예가
  • 01. 조선시대의 서예 동향
  • 조선 전기 서예 동향
  • 2. 서체의 변화
이성배

조선 초기 서예는 송설체를 중심으로 성행하고 왕희지체는 일시 그 주류에서 벗어나지만 여전히 많은 관심을 받고 있었다. 고려 말에 수용된 송설체는 신진사대부를 중심으로 수용되었고 이암 등 명서가를 배출하였다. 고려 말의 송설체 수용은 이전의 신라 이후 왕(王)·구체(歐體) 중심의 서풍에서 일대 전환을 가져오게 되는 서예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19) 이성배 「고려서예의 특징」, 『서예학』 2, 한국서예학회, 2001, p.242. 당시 송설체는 신진사대부들이 조선 왕조를 건국하는 주체가 되면서 조선 초의 대표적인 서체로 널리 쓰게 되었고, 이로써 송설체의 토착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20) 이완우는 「조선시대 송설체의 토착화」, 『서예학』 2, 한국서예학회, 2001에서 송설체가 조선화되는 과정을 잘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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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대군 초서
안평대군 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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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 행초
문종 행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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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안평대군 이용(1418∼1453)은 조선 초기 서예를 이끈 중심 인물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예유파를 형성시킨 인물로 평가받는 안평대군의 예술적 성향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사람들로는 집현전 학사들이 있었다. 세종 2년(1420)에 설치된 집현전에는 많은 소장 학사들을 중심으로 한글 창제 등 많은 활동을 하였고, 이후 그들은 문학 등 다방면에서 많은 활동을 하여 조선 초기 문화를 새롭게 이끌어 가던 당시 젊은 두뇌들이었다. 대표적인 집현전 학사들로는 남수문(1408∼1443)·이석형(1415∼1477)·박팽년(1417∼1456)·이개(1417∼1456)·성삼문(1418∼1456)·서거정(1420∼1488)·성임(1421∼1484) 등이 있다. 이들은 조선 초기 서예를 송설체 중심으로 주도하였으며 안평대군과 연계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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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 행서 <몽유도원도발>
신숙주 행서 <몽유도원도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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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 행서 <금석옥묘갈명(金錫沃墓碣銘)>
송인 행서 <금석옥묘갈명(金錫沃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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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행초 <조기(早起)>
성종 행초 <조기(早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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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대군과 집현전 학사들의 교유는 <몽유도원도권>과 <소상팔상도시첩> 등에 실린 발문과 시문에 잘 나타나 있다. 특히, <몽유도원도권>에 안평을 포함하여 집현전 학사 등 22명 23점의 글씨는 당시 서예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백미이다. 안평대군의 글씨는 송설보다 더 연미하고 유려하며 강건하여 그의 글씨에 대한 국내외의 비평은 늘 화려한 수식어로 가득하다. 그의 글씨는 문종과 성종 등 왕실에서도 호응하였으며 일부는 거의 흡사할 정도였다. 또한, 그의 글씨는 문종 때 인쇄활자로 주조되기도 하였다.

문종은 세종처럼 서화에도 뛰어나고 송설체로 쓴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김안로(金安老)는 문종 글씨에 대해 해법(楷法)에 뛰어나 굳세고 생동하는 진기(眞氣)가 진인(晉人)의 오묘한 경지에 이르렀지만 석각본 몇 점만이 전하고 있다고 평하였다.21) 『문종실록』 권13, 문종 2년 병오 5일. 한편, 성종은 자신이 안평대군과 흡사할 정도로 글씨에 뛰어났으며, 조맹부 글씨를 적극 수집하였고 궁중에서 간행한 조맹부첩의 진위를 밝힐 정도로 감식안도 뛰어난 군주였다.22) 『희락당집』 권8, 「용천담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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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초서 <증별시>
김구 초서 <증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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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조 기록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왕희지첩에 대한 수집과 간행 및 배포가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따라서 송설체보다는 왕희지체 중심으로 다시 회귀하는 경향이 생긴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성종 때 등장하는 사림과도 연계된다. 사림은 성리학적 대의명분을 중시하며 계유정난과 이를 통해 등장한 훈구 세족의 정치·경제적 모순에 대해 비판하였다. 이들의 관점에서 볼 때 조맹부도 송의 황실 출신으로 송을 멸망시킨 원에 출사하였기 때문에 대의명분의 입장에서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인물에 대한 비판은 그의 학문과 예술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결국 이들은 순정(純正)하면서 고법(古法)의 기준이 되는 위·진(魏晉)글씨를 찾게 되고, 이에 왕희지체를 찾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서, 자신들의 표상으로서 새로운 예술적 구심점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를 구심점으로 삼아 기존의 예술을 비판하면서 새 시대의 예술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것이다.

16세기 서예는 성종 때의 문물진흥책으로 등장한 왕희지체가 중심이 된다. 그러나 이들이 추구하였던 왕희지체는 사실 본 모습과는 좀 거리가 있었다. 당시 사용한 법첩은 송대에 새긴 <순화각첩(淳化閣帖)>을 후대에 다시 새긴 번각본이어서 왕희지체의 본의를 많이 상실하였으며, 여기에다 당시 성행했던 송설체와 혼용되면서 송설체의 연미함이 제거되고 근엄하고 단아한 느낌의 서체로 변형되었던 것이다.

왕희지체는 중종반정 이후 등장한 사림파 소장학자들, 특히 기묘명현(己卯名賢)들을 중심으로 유행하게 되었다. 자암(自庵) 김구(金絿, 1488∼1534)가 그 중심 인물이며, 그들의 이상적인 정치적 이념에 맞게 절의에 문제 있는 송설체보다는 순정한 왕희지체를 추구하였 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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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 초서 <귀거래사(歸去來辭)>
이우 초서 <귀거래사(歸去來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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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 1493∼1564)은 생기있는 운필을 보였고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은 근엄 단중한 필치를 보였으며, 이암(頤庵) 송인(宋寅, 1516∼1584)은 송설체를 쓰면서도 단아하였다. 다시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은 아취있는 글씨를,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는 청경한 필치를,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 1537∼1616)는 영화체(永和體)라 불릴 정도로 고고(高古)한 글씨를, 석봉(石峯) 한호(韓濩, 1543∼1605)는 왕희지체를 연구하여 특유의 석봉체를,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은 단아한 운필을 보였다.23) 이완우, 앞의 글, pp.257∼258 참조.

특히, 한석봉의 등장으로 새로운 서체와 서풍을 추구하게 되었다. 선조 때 관아에서 『천자문』의 간행과 배포(1583)로 송설체와 다른 석봉의 독특한 해서가 집권층을 중심으로 확대될 수 있었다. 행초도 송설체에서 벗어나 왕희지의 전아(典雅)한 서풍(書風)을 추구하게 되었다. 석봉은 명대 왕세정(王世貞)의 의고적인 서론과 왕희지 서체의 추구에 동조하였고, 이러한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조선 서예는 점차 명대 장필(張弼) 등의 광초서풍(狂草書風)의 영향에서 벗어났다. 황기로(黃耆老)의 노봉(露鋒)의 필세가 강한 광초에서 옥봉(玉峰) 백광훈(白光勳, 1537∼1582), 송호(松湖) 백진남(白振南, 1564∼1618), 옥산(玉山) 이우(李瑀, 1542∼1609) 등의 초서처럼 필획이 평이하고 원필이 많으며 단아한 서풍으로 변하였다.

이 시기 송설체를 잘 쓴 이로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 1486∼1562), 동고(東皐) 김로(金魯, 1498∼1548), 이암 송인, 남창(南窓) 김현성(金玄成, 1542∼1621) 등이 있다. 그 중 송인은 단아한 송설체를 썼고, 김현성은 필세가 강경하고 청경한 필의로 썼는데, 모두 석봉과 영향 관계가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들이 쓴 송설체는 시간이 흐를수록 조선화되어 점차 조맹부의 필의와 멀어져 갔고, 이후 17세기 이르러서는 점차 왕실이나 한정된 소수가 쓰는 서체로 위축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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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광훈 초서 칠언절구
백광훈 초서 칠언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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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기로 초서 <경차>
황기로 초서 <경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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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성 해서 <심경찬(心經贊)>
김현성 해서 <심경찬(心經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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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살펴본 조선 전기의 서체 변화는 먼저 송설체가 크게 성하였고, 다시 왕희지체로 중심 이동을 하였다. 또한, 송설체가 점차 토착화되는 과정을 볼 수 있으며, 왕희지체를 바탕으로 성립된 석 봉체도 조선화된 독특한 특성을 잘 보여주며 널리 성행하였다. 이러한 서체의 변화는 정치 세력이나 문화 주체 세력의 부침에 따라 궤를 같이 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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