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7권 한국 서예문화의 역사
  • 3 조선시대의 서예 동향과 서예가
  • 01. 조선시대의 서예 동향
  • 조선 전기 서예 동향
  • 3. 서예 의식의 변화
  • 이학(理學)적 서예 인식
이성배

조선 초기는 서예이론과 비평 등에 관한 체계적인 글이 매우 적어서 일부 자료에서 산견되는 기록을 통해 그 성향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의 서예를 이해하는데 먼저 사대부들의 성리학적인 서예인식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들은 서예를 단지 쓰는 대상이 아닌 또 다른 기능을 갖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졌다.

서예를 심성 수양이나 학문적 이념과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았던 이학적 서예의식이26) 이학적 서예의식은 程子와 朱子의 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주자의 「書字銘」을 보면 明道先生이 ‘某는 글자를 쓸 때 매우 恭敬스럽게 하니, 글자를 예쁘게 하려하지 않고 단지 이것을 배우네.’라고 하였다. 여기서 ‘敬’이란 主一無適의 의미로 하나에 집중하여 방심하지 않는 것으로 성리학의 대표적인 수양법의 하나이다. 정자는 글씨를 예쁘게 쓰기보다 집중하여 쓰는 행위 자체에서 敬을 배운다고 하는 것이다. 주자는 정자의 이러한 관점을 계승하여 銘을 짓기를 ‘붓대를 잡고 毫에 먹물을 적셔서/종이를 펴고 운필을 하네. 하나 됨이 그 속에 있어一在其中/점들마다 획들마다 그러 하지. 뜻을 방종하면 거칠어지고/예쁨을 취하면 眩惑되어라. 반드시 (이것을) 받든다면/신명함이 그 덕에 나타나리.’라고 하였다. 이것은 글씨 쓸 때 한결 같은 마음이 그 속에 있어야지 마음의 평정이 무너져 지나친 상태를 경계하는 의미이다. 마음이 풀어져 지나치면 마음이 거칠어지며, 또 반대로 예쁘게 하는데 지나치면 마음이 현혹되어 빠져버리게 되는 것이다. 지나치거나 뜻을 방자하게 하거나 지나치게 빠져서 헤어나지 못함을 경계한 것이다. 반영되고 있다는 점이다. 다음 사료에는 그러한 요소들이 나타나고 있다.

시강원 하위지(河緯地)가 경연에서 아뢰기를 “대저 글씨를 배우는데 필법을 본받을 뿐만 아니라 또한 마땅히 법도가 아닌 글을 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전하가 쓰신 대자(大字)를 보니 청정(淸淨)하고 현허(玄虛)한 말이 있는데, 이는 경전(經傳)에 실린 것이 아니며 의미로 볼 때 반드시 불서(佛書)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노산(魯山, 단종)이 말하기를 “내가 보는 법첩은 조맹부가 쓴 것으로 불서가 아니다.”하고는 꺼내어 보여 주었는데, 조맹부의 글씨로 그 문장의 뜻이 『노자』와 같았다. 하위지가 다시 아뢰기를 “조맹부가 쓴 <동서명(東西銘)> 같은 것은 필법으로 쓸 만합니다.……”라고 하자, 노산이 말하기를 “당연히 경의 말을 따르겠다.”라고 하였다.27) 『단종실록』 권11, 단종 2년 4월 29일.

노산(단종)은 문장 내용과 상관없이 단순히 글씨를 썼지만, 하위지(1387∼1456)는28) 하위지는 세종 때 집현전 학사로 많은 활동을 하였으며, 세조 2년에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節死한 死六臣의 하나였다. 글씨뿐만 아니라 거기에 내포한 의미도 거론하였다. 하위지가 권한 <동서명>은 송대 횡거 장재가 성리학의 요지를 정리한 것이다. 글씨를 쓸 때 유교적인 내용을 써야 한다는 이학적 서예관이 조선시대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학적 서예인식은 조선 전기 사대부들이 서예를 어떠한 인식 기준으로 보고 있는지 알려 주고 있다.

성종 때 부사 신은윤(辛殷尹)이 조맹부 진적 족자 한 쌍을 바치며 상소하여 말하기를 “상고에 문자가 없다가 복희씨가 처음으로 팔괘를 그으니 이는 자획(字畫)의 시초입니다. 요·순·우는 이 획을 마음에 얻어서 그 쓰임을 미루어 천하를 화목하게 하는데 이르렀고, 왕희지와 장욱은 이 획을 글씨에 얻어서 고금에 묘절(妙絶)하였으며, 유공권은 이 획을 마음에 얻었던 까닭에 ‘심정필정(心正筆正)’이라는 말을 하였고, 정자는 이 획을 마음에 얻어서 글자를 쓰는데 심히 공경스러웠으며, 주자는 이 획을 마음에 얻어서 하나(一) 됨이 그 속(中)에 있고, 양자운은 또한 말하기를 글씨는 마음의 그림이며, 마음을 그리고 형상하는 데에서 군자와 소인이 드러난다고 하였습니 다. 원컨대 전하는 공권의 말을 예(體)로 삼고, 정씨의 경(敬)을 사표로 삼으며, 주자의 중(中)을 잡고, 자운의 심화(心畵)를 생각하여 심신(心神)에 모아서 널리 정사를 베풀면 그 다스리는 도는 삼황오제와 짝할 만합니다.”라고 하였다. (상이) 명하여 표피 2장, 후추 5말, 소목(蘇木) 20근을 하사하면서 전(傳)에 이르기를 “글씨 족자를 바쳐서 이것을 하사하는 것이 아니라 너의 상소에 유공권의 ‘심정필정’이라는 말이 있어 특별히 기뻐서 하사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29) 『성종실록』 권166, 성종 15년 5월 11일.

신은윤이 볼 때 처음 획을 그은 복희씨나 이 획에서 심득하여 정치 방면에 응용하여 천하를 화목하게 다스렸던 고대 성인이나 이를 심득한 후대 서예인들 모두 심성 수양의 측면으로 발현시켰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왕희지와 장욱의 ‘묘절’, 유공권의 ‘심정필정’, 정자의 ‘경’, 주자의 ‘중’, 양자운의 ‘심화’는 근본이 같은 것으로 보았다. 신은윤은 글씨와 정치는 수양의 관점에서 동일체로 본다는 이학적 관점에서 성종에게 건의하였고, 성종은 ‘심정필정’이라는 말을 기뻐하여 상을 내렸다.30) 성종의 이러한 태도는 唐의 穆宗(821∼824)이 유공권(778∼865)에게 用筆의 근본을 물었을 때 ‘用筆在心, 心正則筆正’이라 대답하며 서예를 통해 정치를 간언한 사실과도 부합되기 때문이다.

이학적 입장에서 글씨를 본 대표적인 이로는 김구(金絿, 1488∼1533)를 들 수 있다. 그는 중종 때의 성리학자이고,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서예가이며, 인수체(仁壽體)로 유명하다. 그는 일찍이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조금 잔박(淺薄)한 재주가 있어서 문장과 글씨가 후대에 전해질 것이다. 만일 내가 처신을 헛되이 하여 옳음을 잃는다면 반드시 후세에 냄새를 남기게 될 것이니 마땅히 배로 조심하고 힘쓰며 평생 좋지 않은 일을 하지 않아야 괜찮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예와 덕의 상관성을 강조하는 주자의 이학적 서론과도 밀접하다.31) 『주자대전』 「문」 84. 주자 서예론의 요점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今人不及古人’의 古法重視의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書札與德性有相關’의 藝德相關論이라는 修養論的 관점이다. 특히, 두 번째 관점은 藝와 德의 상관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주자는 왕형공의 글씨를 ‘躁擾急迫’한 것이 병통이라 지적하고, 한위공의 글씨를 ‘安靜詳密, 雍容和豫’라고 하여 글씨와 덕이 상관있다고 여겼다. 그가 글씨가 유명하여 화인(華人)이 구입하였다는 말을 듣고 절필하여 세상에 전하는 글씨가 적게 된 것도32) 『해동명신록』. 역시 같은 맥락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조선 전기의 서예는 이학적 심미기준으로 서예를 이해하고 평하려는 인식이 점차 주류를 이루는 경향을 볼 수 있다. 특히, 정자와 주자의 이학적 서론을 받아들여 글씨를 단순한 서사 대상으로 보지 않고 수양의 대상으로 보는 등 내면의식을 강조하면서 마음과 글씨는 일치(心書一致)한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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