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7권 한국 서예문화의 역사
  • 3 조선시대의 서예 동향과 서예가
  • 01. 조선시대의 서예 동향
  • 조선 전기 서예 동향
  • 3. 서예 의식의 변화
  • 창의 중시의 서예 의식
이성배

초서는 고법 중시에서 벗어나 새로움을 취하는 창의 중시에 더 적합한 서체이다. 조선 전기의 초서는 당의 장욱(張旭)과 명대의 장필(張弼)의 영향을 많이 받아 자유분방함이 더하였다.

황기로는 안평대군 이후의 고기를 갖지 않았기 때문에 비판을 받지만 장필의 영향을 많이 받아, 글씨의 획이 드러난 기세가 표일하고 자유분방하여 후에 초성(草聖)으로 불렸다. 다음 자료는 그의 그러한 면모를 잘 보여준다.

내가 일찍이 황기로의 글씨를 본 적이 있었는데, ‘무(無)’자의 초서에 가로 획이 5, 6획이고 세로 획도 5, 6획을 넘으니 이것은 옛 필법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기롱하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지금 보건대 청송의 글씨는 선우추(鮮于樞)의 필법을 따르고 조송설(趙松雪)의 필법을 섞은 것이다. 황기로의 글씨는 미친 듯 자기 멋대로 써서 동방 초서의 으뜸이니 성수침의 글씨로 어찌 비길 수 있으랴.36) 위와 같음.

성수침은 선우추의 초서와 조송설의 행서를 섞어서 고법을 중시한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황기로는 자유분방하게 운필하여 초성으로 지칭되지만 고법을 따르지 않아 비판을 받았다. 황기로는 고법에서 벗어나 보다 생기 있고 창의적인 글씨를 추구하여 동방 초서의 으뜸이 된 것이다. 송찬(宋贊)은 황기로의 말을 통해 보통 사람들이 잘 모르는 죽은 글씨와 산 글씨의 차이를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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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해 초서
이산해 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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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광훈 초서 <증사내옹(贈四耐翁)>
백광훈 초서 <증사내옹(贈四耐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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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황기로가 사는 집에 간 적이 있었는데 보니 자리에 하얀 비단과 무늬 있는 전지(箋紙)가 꽂혀 있었다. 그는 책상을 밀치고 초서 두 장을 뽑아 나에게 보여 주고 빈종이 두 장을 꺼내서 나에게 모방하여 쓰라고 하였다. 나 또한 조금은 운필할 줄 알기에 황기로의 글씨와 같도록 모방하였다. 그가 칭찬하여 말하기를 “내 글씨를 구하는 것이 하루에 수 백 장이라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겠으니 대신 당신 글씨를 사용해야겠습니다. (사람들의) 보통 안목으로 어찌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하고는, 시렁 위에서 고법첩(古法帖)을 뽑고 자신이 이미 써 놓은 것 중에서 두 장을 뽑아 자법(字法)을 비교해 보니 모두 고인의 서법이고 한 글자도 자신이 창의적으로 쓴 글씨가 없었다. 또 내 글씨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무슨 자와 무슨 획은 모두 죽은 것입니다. 글씨를 공교(工巧)하게 연마하지 않으면 잘 쓰기 어렵습니다.”라고 하였다. 황기로의 필적은 쉽게 우열을 논평할 수가 없었다.37) 위와 같음.

황기로는 글씨란 자획이 죽은 것과 산 것이 있다고 여겨서 고법을 공교하게 연마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의 뜻은 단순히 고법을 추종하는데 있지 않고 고법을 바탕으로 한 창의성에 있었다.

김구도 초서를 쓸 때 사람들이 숙(熟)하다고 칭찬하면 반드시 화를 냈고, 생(生)하다고 하면 기쁜 얼굴을 하였다고 한다.38) 위와 같음. 익숙하다는 말은 법에 빠지는 것이고 틀에 갇히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비해 생경하다 함은 법을 벗어나고 고정된 틀에 얽매이지 않으며, 또한 정형화되지 않은 창의적인 세계를 구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김구가 화를 내고 기뻐하는 것은 이러한 의미를 갖는 것이라 본다.

조선 전기에 초서에 능한 이로 김인후(金麟厚)가 있는데, 장필의 영향을 받아 자유분방한 초서를 잘 썼으며 <초서천자문>이 전한다.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는 필세가 호방한 필치가 두드러졌으며, 백광훈(白光勳)과 백진남(白振南)의 초서는 원필이 많으며 필획이 단아하고 필세가 강하다. 이우(李瑀)는 더욱 단아하면서 골기가 강한 필세가 날렵한 초서를 쓰고 있다.

이상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 전기 서예는 고법만 추종하지 않고 새로움을 추구하며 자신만의 창의적인 필획을 중시하였던 의식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창의 중시 의식은 조선 전기 서예가 전통적인 고법을 강조하면서 정형화되려는 미의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의 창조를 지향하며 조선 서예를 보다 생동감 있게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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