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7권 한국 서예문화의 역사
  • 3 조선시대의 서예 동향과 서예가
  • 01. 조선시대의 서예 동향
  • 조선 전기 서예 동향
  • 5. 석비(石碑)와 비액(碑額)의 변화
이성배

조선시대는 유학을 숭상하면서 이전의 화려했던 비의 양식이 많이 쇠퇴하고 단순하고 소박한 형식으로 나타났다. 조선시대 석비는 크게 서원비, 능묘비, 선정비 등으로 분류되는데, 왕릉의 능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민간에서 주도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규모가 작아지고 소박해지며 조각과 양식이 퇴화된 대신 용도에 맞게 다양한 양식으로 나타났다. 조선시대 묘비는 대개 방형의 받침석, 비신, 옥개형의 가첨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시대는 유학을 숭상하고 효를 강조하면서 화장보다는 매장형의 장례문화가 발달하였기 때문에 어느 시대보다 다양한 묘비를 볼 수 있다.

조선시대 비는 기본적으로 몇 가지 규정과 양식을 갖고 있다.41) 조선시대 묘역에 대한 규정은 『세종실록』 권26, 세종 6년조에 처음 나타난다. 또 『國朝五禮儀』에서 成墳할 때 묘의 높이를 4척으로 제한하였으며, 『四禮便覽』에서는 분묘의 다양한 석물에 대해 규정하였다. 묘비 종류는 기본적으로 묘표, 묘갈, 신도비로 나눌 수 있는데, 기본적인 종류와 차이점이 있고 규정이 있지만 지역마다 차이를 보이며, 시기마다 변하고 있어 정확하게 정의를 내릴 수 없다.

비문의 전면에 쓰인 서체는 해서가 제일 많았다. 대체로 조맹부체, 한석봉체, 왕희지체, 안진경체를 많이 썼으며, 단아하고 강건하며 맑고 해서로 쓴 모양이 바른 필체를 선호하였다. 예서도 부분적으로 썼는데 독특한 팔분예서를 중심으로 썼으며, 이는 조선 중∼후기 율곡학파에서 많이 나타났다. 전서는 비문보다 비액으로 많이 썼다. 이들 서체는 공통적으로 성리학적 미감과 선비정신을 드러내기 적합한 서체를 중심으로 선호했음을 볼 수 있다.

비액은 석비의 표제를 기록하는 양식으로 전서를 많이 사용하므로, 흔히 두전(頭篆)으로 부르지만 드물게 해서나 예서로 쓰기도 한다. 두전은 소전을 많이 썼는데 당 이양빙(李陽氷)의 전서를 많이 썼다.

조선 초기 석비의 표제기록 양식은 제액(題額)·제액식(題額式) 두전 양식이 주로 사용되었다.42) 이하 내용은 손환일, 『한국 금석문의 두전』, 서화문화사, 2011 참조. 조선 초기 제액으로는 <태조 건원릉 비>(1409, 정구)·<세종 영릉신도비>(1451, 이용)·<대원각사비>(1471, 강희맹) 등을 들 수 있다. 제액의 양식은 비신과 이수 부분이 일체형으로 되어 있으며, 이수형식의 석비 조성이 줄어들면서 조선 중기 이후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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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벽골제비의 제액식 두전
김제 벽골제비의 제액식 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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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맹담 신도비의 두전
안맹담 신도비의 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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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온 묘표의 전면표제양식
심온 묘표의 전면표제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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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액식 두전은 고려 중기에 발생하여 유행한 양식으로 비신의 상단에 제액보다는 큰 글자로 쓴다. 조선 초기의 제액식 두전으로 <김제 벽골제비>(1415, 정□임 전)가 있다. 제액식 두전의 양식은 조선 초기부터 조선 말기까지 꾸준하게 사용되었다.

두전은 고려 후기부터 사용하여 조선시대에 가장 많이 사용된 형식으로 비신의 상단에 주로 전서로 크게 쓴다. 때로 팔분예서나 해서, 또는 행서를 쓰는 경우도 있다. 조선 초기에는 전서 두전을 주로 썼다. 조선 초기의 두전으로 <억정사 대지국사비>(1393, 선진 전)·<용문사 정지국사비>(1398)·<권근 신도비>(1447)·<신빈 금씨묘비>(1465, 안혜 서)·<안맹담 신도비>(1466, 안빈세 전)·<윤자운 신도비>(1478, 정난종 서)·<한계희 신도 비>(1483, 안침 서)·<한명회 신도비>(1488)·<월산대군 이정 신도비>(1489)·<어유소 신도비>(1491, 안침 전)·<금겸광 신도비>(1492)·<홍응 신도비>(1492, 홍흥 서전)·<한확 신도비>(1495, 임사홍 서)·<남양부 부인 홍씨 신도비>(1497)·<이소 묘갈>(1499)·<이육 신도비>(1499, 신은이 전) 등이 있다.

전서 두전은 일반적으로 조선시대의 두전 양식으로 되어 조선 말기까지 유행되었다. 두전은 다시 전면표제양식으로 유행한다. 이러한 전면표제양식은 <공양왕릉 묘표>(15세기 초)·<성여완 묘표>(1401) 등에서 처음 볼 수 있다.43) 경기도박물관, 『경기묘제석조미술』(上), 2007, pp.14∼15. 이러한 양식을 이어받은 <심온 묘표>(1418)는 팔분예서로 전면에 썼으며 안평대군 글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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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건원릉 신도비 이수 부분
태조 건원릉 신도비 이수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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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영릉 신도비
세종 영릉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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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전은 일반적으로 진전(秦篆)인 소전(小篆)과 당전(唐篆)인 이양빙의 철선전(鐵線篆)을 썼는데 대체로 소전을 많이 썼다. 소전은 <윤효손 신도비>(1519, 이언호 전)·<정난종 신도비>(1525, 강징 서)·<송질 신도비>(1545, 김로 서)·<정과필 신도비>(1565, 이황 서)·<허엽 신도비>(1582, 남응운 전) 등이 있다. 조선 전기에 전서를 쓴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언호(李彦浩, 1477∼1519)·조연(趙淵, 1489∼1564)·채무일(蔡無逸, 1496∼1546)·남응운(南應雲, 1509∼1587)·오억령(吳億齡, 1552∼1618) 등이 있다.

이상으로 조선 전기 석비와 비액의 서체를 살펴보았다. 석비 표제의 양식은 석비의 변모와 함께 하였다. 일부는 고려의 양식을 이어받았지만 시대의 변화에 따라 유행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비액의 양식과 서체는 다양해지면서 양감(量感)이 있고 단아한 미의식이 반영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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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희 신도비
한계희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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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확 신도비
한확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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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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