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7권 한국 서예문화의 역사
  • 3 조선시대의 서예 동향과 서예가
  • 01. 조선시대의 서예 동향
  • 조선 후기 서예 동향
  • 1. 17세기 서예 동향
  • 성행한 서체들
이성배

17세기 조선 서예는 국내적으로 양란 이후 정치·사회·사상·문화 등의 새로운 구심점으로 등장한 성리학을 바탕으로 심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의리를 바탕으로 한 성리학적 비판정신은 중심 서체의 변화를 일으켰으며, 성리학적인 서예인식이 반영된 많은 제발문(題跋文)이 등장하였다.

해서의 경우 조선의 서예계는 왕희지체를 중심으로 성립된 석봉체(石峯體)가 중심 서체로 널리 쓰였고, 송설체는 왕실과 일부 사대부를 중심으로 쓰이고 있었지만 미약하였다. 석봉체는 노론을 중심으로 많이 쓰였는데, 송준길(1606∼1672)·송시열(1607∼1689) 과 그 문인들을 중심으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둔중하고 굳센 안진경체는 노론을 중심으로 쓰였는데 이것은 주자체(朱子體)와 마찬가지로 충절과 의리를 갖춘 덕성을 중시하였기 때문이다. 안진경체를 잘 쓴 이로 정일양(鄭一陽, 1642∼?)·박태유(朴泰維, 1648∼1710)·박태보(朴泰輔, 1654∼1689) 등이, 편액과 대자로 유명한 이로 이광(李珖, 1588∼1645)·이중(李仲)·신확(申瓁, 1652∼1688) 등이 있다. 또한, 군주로서 숙종(1661∼1720)은 송설체를 잘 썼고, 궁중의 여성으로서 인목왕후 김씨는 신사임당과 견줄 정도로 서예에 뛰어났으며, 정명공주(1603∼1685) 역시 대자에 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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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해서 <사밀풍군(詞密豊君)>
숙종 해서 <사밀풍군(詞密豊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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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복장 해서 <공신교서>
이복장 해서 <공신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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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 해서를 잘 쓴 이로 이복장(李福長, 1570∼?)·김집(金集, 1574∼1656)·이흘(李忔, 1568∼1630)·이현(李炫, 1584∼1637)·김준(金竴, 1588∼1634)·이경석(李景奭, 1595∼1671)·이정영(李正英, 1616∼1686)·남구만(南九萬, 1629∼1711)·박세당(朴世堂, 1629∼1703)·한구(韓構, 1636∼?)·심익현(沈益顯, 1641∼1683)·이진휴(李震休, 1657∼1710) 등이 있다.

행서의 경우는 석봉체를 비롯하여 왕희지·조맹부·동기창 등의 서체가 널리 유행하였다. 오준(吳竣, 1587∼1666)·조문수(曺文秀, 1590∼1645)·송준길·송시열 등은 석봉체의 영향을 받아 많은 금석비문을 남겼고, 김상헌(金尙憲, 1570∼1652)과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은 동기창체로 유명하였다. 드물게 김생체를 써서 유명한 서예가로는 변헌(卞獻, 1570∼1636)과 이관징(李觀徵, 1618∼1695) 등이 있다. 이 외에 차천로(車天輅, 1556∼1615)·이명한(李明漢, 1595∼1645)·허목(許穆, 1595∼1682)·이유태(李惟泰, 1607∼1684), 왕으로는 효종과 정조 등이 행서를 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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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진남 초서 <차운시(次韻詩)>
백진남 초서 <차운시(次韻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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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초서는 황기로 초서가 널리 쓰였고, 왕희지와 선우추, 그리고 명대 서가의 초서를 많이 썼는데, 금초보다는 광초를 즐겨 썼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진남(白振南, 1564∼1618)·김대덕(金大德, 1577∼1639)·이지정(李志定, 1588∼1650)·조속(趙涑, 1595∼1668)·윤순거(尹舜擧, 1596∼1668)·이유상(李有相, 1623∼1673)·이오(李俁, 1637∼1693)·이하진(李夏鎭, 1628∼1682) 등이 뛰어났으며, 드물게 여성 서예가로 안동 장씨(1598∼1680)가 알려졌다.

17세기 조선 예서는 아직 독창적인 풍모보다 명대 사신을 통해 들어온 한대 <하승비(夏承碑)> 서풍의 예서 경향과44) 조선 초기의 예서는 원대 조맹부의 <六體千字文> 등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16세기에 李滉이 쓴 <性理群書跋>은 송대의 劉球(1392∼1443)가 간행한 『隷韻』을 기본으로 한 예서로 보인다. 또 이황의 문인인 許筬(1548∼1612)은 당시 문인들에게 알려진 명 말의 사신 金湜과 宋珏(1576∼1632)의 예서의 영향을 받았는데, 그들의 예서는 한대의 <夏承碑> 서풍이었다. 이처럼 조선 초기 예서는 송·원·명 예서의 영향을 받았다. 송대 유구(劉球)가 편집한 『예운(隷韻)』, 문징명이 쓴 <예서천문(隷書千文)>이 조선에 일정 부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 시기 금석탁본에 대한 관심이 점차 증가하고 명과 청에서 예서법첩을 들여오면서 예서의 관심이 증가하였으니, 이는 묘갈 등으로 나타났다. 이때의 예서는 해서가 섞인 독특한 예서와 고문전서(古文篆書)가 반영된 전서풍 예서였다.45) 이희순, 「조선시대 예서풍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석사학위논문, 2008 참조.

17세기 예서는 주로 해서 경향의 예서로 쓰여졌다. 대표적으로 김상용(1561∼1637)의 아들인 김광현(金光炫, 1514∼1647)과 그의 손자 인 김수빈(金壽賓, 1626∼1676)이 해서가 섞인 독특한 예서를 잘 썼다. 그리고 예서로 <송이창묘표(宋爾昌墓表)>를 쓴 송준길과 그의 아들인 송광식(1625∼1664)이 이들과 유사한 예서를 썼다. 홍석구(洪錫龜, 1621∼1679)가 남긴 예서첩인 <동호묘필(東湖妙筆)>은 문징명의 <예서천문>의 영향을 받은 듯 유사성을 보이지만 독특한 장법과 많은 변화를 주고 있다. 김수증(金壽增, 1624∼1701)도 예서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서한예첩후(書漢隷帖後)>에서 고예(古隷)에 관심을 갖고 사행 길에 연경에서 <조전비(曹全碑)>를46) <조전비>는 명 萬曆 연간(1573∼1619)에 출토되어 당시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구하는 등 예서에 관한 많은 지식을 습득하였다고 하였다. 이후 <조전비>는 한양과 기호 지역을 중심으로 한예비첩(漢隷碑帖)을 수장하는 풍조를 낳았으며, 여러 서가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러나 김수증은 <정몽주 신도비>·<김상용 순의비> 등 생전에 많은 비를 예서로 썼지만, 한의 예서보다는 『예운(隷韻)』을 바탕으로 자형과 파책을 강조한 독특한 예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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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두서 초상
윤두서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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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남인들을 중심으로 고문 전서의 영향을 받은 예서가 쓰였다. 이러한 예서는 6경(六經)과 선진고문(先秦古文)을 중시한 허목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허목이 쓴 예서는 현재 전하지 않지만 이익이 쓴 <발미수전예삼첩(跋眉叟篆隷三帖)>을 보면 고문 전서를 바탕으로 예서를 쓴 것으로 보인다. 허목의 신도비는 그의 사후 60년 만에 세운 것으로 후면에 허목의 자명(自銘)으로 된 예서가 있는데 고문 전서를 바탕으로 한 자형을 많이 볼 수 있다. 허목의 영향을 받은 윤두서도 이러한 전서풍 예서와 해서풍 예서인 당의 예서도 썼다.

17세기에 쓰인 전서는 주로 대전(大篆)과 소전(小篆)으로 구분된다. 대전은 허목과 그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썼다. 그는 중국에서 가져온 <형산신우비(衡山神禹碑)> 와 우리나라의 <웅연석문(熊淵石文)>을 바탕으로 초서 필의를 섞어 기괴하고 창고(蒼古)하며 예술적 감각이 뛰어난 고전을 써서 그의 문인과 남인을 중심으로 유행하였다. 그렇지만 위비논란과 지나치게 기고(奇古)하여 이정영(李正英) 등에게 배척되기도 하였다. 소전은 다시 진전(秦篆)과 당전(唐篆)으로 구분되며 당전은 옥저전(玉箸篆)으로 불린 이양빙전(李陽氷篆)을 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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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영 전서 <금성휘묘갈명두전(金成輝墓碣銘頭篆)> 탁본
이정영 전서 <금성휘묘갈명두전(金成輝墓碣銘頭篆)>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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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쓰인 대표적인 전서 참고서를 보면, 광해군 때 인물로 전자관(篆字官)에 특선된 경유겸(景惟謙)이 지은 『전자편람(篆字便覽)』이 있는데 소략무법(疏略無法)하다는 평을 들었다. 김진흥(金振興, 1621∼?)은 전문학관(篆文學官)에 등용된 전문 서예가로, 여이징(呂爾徵)에게 전주(篆籒)를 배우고, 명 사신 주지번(朱之番)에게 전결(篆訣)을 얻어 전서를 잘 쓴다는 이름을 얻었다. 그는 전서로 쓴 <전대학(篆大學)>·<전자음서(篆字韻書)>로 고전(古篆)을 보급하는데 힘썼다. 전서로 쓴 <대학장구>와 <전해심경(篆海心經)>(5권)이 있고 <송계각체전첩(松溪各體篆帖)>이 있다. 신여익(申汝濯)은 『전운(篆韻)』을 지었다. 허목은 6경 고문을 연구하기 위하여 고문자를 정리한 「고문음율(古文韻律)」을 지었다. 그는 고문을 준비하기 위하여 『삼체석경(三體石經)』, 허신의 『설문해자(說文解字)』, 남송 곽충여(郭忠恕)의 「한간문(汗簡文)」, 풍숙(豊叔)의 『금석고문(金石古文)』 등 많은 중국 서책을 참고하였고, <고문운부>·<금석운부> 등을 편집하였다.

이외에 전서로 유명한 이로는 오억령(吳億齡, 1552∼1618)·김상용(金尙容, 1561∼1637)·김상헌·김광현·여이징(呂爾徵, 1588∼1656)·김수인(金壽仁, 1608∼1660)·김수항(金壽恒, 1629∼1689)·이정영(李正英, 1616∼1686)·송규렴(宋奎濂, 1630∼1709)·김만근(金萬根, 1633∼1687)· 민유증(閔維重, 1630∼1687)·신익상(申翼相, 1634∼1697)·이오(李俁, 1637∼1693)·김창숙(金昌肅, 1651∼1673)·이간(李偘, 1640∼1700) 등이 있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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