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7권 한국 서예문화의 역사
  • 3 조선시대의 서예 동향과 서예가
  • 01. 조선시대의 서예 동향
  • 조선 후기 서예 동향
  • 2. 18세기 서예 동향
  • 성행한 서체들
이성배

18세기 해서는 이서와 윤두서가 왕희지의 <악의론>을 쓰면서 종전의 단아한 해서가 아닌 고졸한 해서를 쓰게 되었다. 이러한 질박한 해서는 윤순·이광사 등으로 이어지면서 새로운 유행이 되었다. 이에 비하여 조정을 중심으로 정조의 서체반정정책으로 둔중하며 순후한 해서가 널리 쓰였다. 또한, 안진경·유공권·소식은 물론 우리나라의 한호 등의 글씨를 집자한 집자비도 등장하여 다양한 해서가 쓰였다. 한편, 정조 때 화성에 신도시 건설과 맞물려서 수많은 편액과 비문을 쓰게 되었는데, 조윤형·유한지 등 명서가들이 참여하여 뛰어난 필적을 남겼다. 18세기에 대자액서를 잘 쓴 이 로 엄한명(嚴漢明, 1685∼1759)·정하언(鄭夏彦, 1702∼1768)·서유대(徐有大, 1732∼1802)·조심태(趙心泰, 1740∼1799) 등이 유명하다.

이외에 해서를 잘 쓴 이로 한명상(韓命相, 1651∼?)·유명응(兪命雄, 1653∼1721)·조정만(趙正萬, 1656∼1739)·이진휴(李震休, 1657∼1710)·민진후(閔鎭厚, 1659∼1720)·오태주(吳泰周, 1668∼1716)·송요좌(宋堯佐, 1678∼1723)·홍풍조(洪風祚, 1689∼1760)·윤급(尹汲, 1697∼1770)·홍중효(洪重孝, 1708∼1772)·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집두(李集斗, 1744∼1820) 등이 있다.

18세기 행서는 윤순이 송의 미불과 명의 동기창 서체 등을 수용하여 새로운 변화를 선도하고 이광사·강세황·조윤형 등이 이를 따르면서 일대에 풍미하였다. 이들의 행초는 진·당·원의 서풍에서 벗어나 변화와 기교가 많아 당시에 ‘시체(時體)’로 불렸고 정조의 문체반정에서 추구하는 돈실원박(敦實圓厚)한 순정한 서체와는 달라 논란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이외에 행서로 유명한 이로 권상하(權尙夏, 1641∼1721)·이수장(李壽長, 1661∼1733)·윤두서·영조·서명균(徐命均, 1680∼1745)·이진수(李眞洙, 1684∼1732)·박지원(朴趾源, 1737∼1805)·정약용(丁若鏞, 1762∼183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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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하 초서 <오언시>
권상하 초서 <오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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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초서는 광초(狂草)를 많이 썼다. 이서는 자유분방한 연면서(連綿書)를 잘 썼으며 그의 문인인 남하행(南夏行, 1697∼1781)도 거칠면서 자유분방한 광초에 능하였다. 조윤형은 황기로풍의 초서에 능하여 근골있는 필획으로 태세(太細)와 질서(疾徐)의 변화가 매우 많아 일가를 이루었다. 이 밖에도 이병연(李秉淵, 1675∼1735)·남유정(南有定, 1722∼?) 등이 초서를 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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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하행 초서 <오언시>
남하행 초서 <오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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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행서 <증철옹부백부임지행(贈鐵瓮府伯赴任之行)>
정조 행서 <증철옹부백부임지행(贈鐵瓮府伯赴任之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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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예서는 문인학자들이 보다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전보다 더 다양한 자서(字書)나 법첩(法帖)들이 등장하였다. 종래 해서화 경향의 예서에서 벗어나며 크게 당예(唐隷)와 한예(漢隷)의 영향을 받은 예서로 구분할 수 있다. 당 예풍의 예서에 능한 이로 김진규(金鎭圭, 1658∼1716)가 있다. 그의 유묵집인 <죽천유묵(竹泉遺墨)>을 보면 그의 특징이 나타난다. 김장생의 현손인 김진상(金鎭商, 1684∼1755)도 점획이 비후하고 좌우대칭이 강한 당예를 잘 썼으며, <송규렴 신도비>(1746)에서 절정기의 당예풍 예서를 볼 수 있다.

한편, 이 시기에 예서 관련 자서들과 각종 한·위 예서 비탁본이 들어왔다. 특히, 윤동석(尹東晳, 1722∼1789)의 글을 보면 송대 홍괄 (洪适, 1117∼1184)이 지은 『예석(隷釋)』, 누기(婁機, 1133∼1211)가 편찬한 『한예자원(漢隷字源)』, 명대의 도종의(陶宗儀, ?∼1369)가 지은 『서사회요(書史會要)』와 조함(趙崡)이 지은 『석묵전화(石墨鐫華)』(1618)를 거론하고 있어 당시 송·명대에 간행된 예서 관련 자서들이 많이 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예서를 잘 썼던 그는 한·위 예서로 쓴 비를 40여 종을 수장하고 발문도 썼는데, 그 중 <예기비(禮器碑)>·<조전비>·<사신비(司晨碑)>·<형방비(衡方碑)>·<공주비(孔宙碑)>·<공화비(孔和碑)>·<공표비(孔彪碑)> 등이 있다. 그가 수집한 한·위 예비는 그와 교우관계에 있었던 이광사에게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김광수(金光遂, 1699∼1770)도 금석문 수집과 감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중국에서 한대 예서인 공림한비(孔林漢碑) 3종과 <조전비> 등 한·위 비의 탁본을 대거 구입하여 지우인 이광사 등에게 영향을 미친다. 남공철(南公轍, 1760∼1840)도 <화산묘비(華山廟碑)>· <공자묘비(孔子廟碑)> 등 한나라 비의 탁본을 수집하였으며, 성해응(成海應, 1760∼1839)도 <일자석경(一字石經)>·<장천비(張遷碑)>·<상서석경(尙書石經)> 등 한나라 예서 탁본과 당 현종이 예서로 쓴 <석대효경(石臺孝經)> 등 당나라 예서 탁본도 수집하였다.49) 이희순, 「조선시대 예서풍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석사학위논문, 200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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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사 서 <이경석 묘표>
이광사 서 <이경석 묘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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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시 예서에 능한 인물을 보면, 윤순의 경우 전서와 예서가 매우 드물었지만 현재 전하는 예서를 통해 그의 한나라 예서의 풍모를 볼 수 있다. 그 제자인 이광사는 윤동석과 김광수의 진장(珍藏)을 통해 한·위의 여러 비를 학습해야 한다는 인식을 강하게 갖게 되었으며, 후한의 <예기비(禮記碑)>와 위의 <수선비(受禪碑)>를 중시하였다. 그가 예서로 쓴 <이래 묘갈(李浹墓碣)>(1750)과 <이경석 묘표(李景奭墓表)>(1751) 등 비문과 <사공원시첩(司空圖詩帖)>(1751)과 <수북첩(壽北帖)>(1770) 등 진적을 보면 한나라 예서의 특징이 잘 나타난다.

초기에 이광사에게 배웠던 조윤형도 <조송하필법(曺松下筆 法)>(1788)·<송옹서첩(松翁書帖)>(1796) 등에서 <사신비>·<조전비>·<예기비> 등 한나라 예서첩을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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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지 <성의수기(誠意修己)>
유한지 <성의수기(誠意修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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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는 전예, 그림 및 전각에 뛰어난 이인상을 “조윤형의 예법과 화법에 문자기(文字氣)가 있다.”라고 평하였다. 그의 예서는 일부 당나라 예서의 성향도 보이지만 대체로 한나라 예서의 영향을 많이 받아 독특한 경지를 이루고 있다. 특히, 단양 사인암에 글씨를 쓴 4언시(1751)의 경우 예서와 전서가 섞이고 장법의 변화가 풍부하여 무애의 경지를 볼 수 있다.

송문흠은 송준길의 4대손으로 이인상과 가깝게 지냈으며 예서에 능하여 당시 이인상의 전서와 병칭하였다. 그의 예서는 당나라 예서와 한나라 예서의 성향이 보지만, 특히 40대에 쓴 <경재잠(敬齋箴)>(1751)은 <조전비>를 학습한 흔적을 역력히 볼 수 있다.

한편, 유척기(兪拓基)·유언용(兪彦鏞)·유한준(兪漢雋)·유만주(兪晩柱)·유한지(兪漢芝) 등에 이르는 기계 유씨 집안은 높은 수준의 문한과 서화 수장으로 유명하였다. 그 중에 유한지는 <기원첩(綺園帖)>·<병암진장첩(屛巖珍藏帖)> 등 진적과 <유홍 신도비(兪泓神道碑)>·<김무택 신도비(金茂澤神道碑)> 등 비문에서 금석학적 인식을 바탕으로 한나라 예서를 폭넓게 수용하여 개성있는 글씨를 썼다.

18세기 전서는 대부분 소전을 썼으며, 권규·김진규(金鎭圭, 1658∼1716)·민진원(閔鎭遠, 1664∼1736)·김진상(金鎭商, 1684∼1755)·조명규(曺命敎, 1687∼1753)·유척기·윤동섬(尹東暹, 1710∼1795)·조윤형·이한진(李漢鎭, 1732∼?)·이조원(李肇源, 1758∼1832)·유한지 등이 유명하다. 대전 을 잘 쓴 이로 이서우(李瑞雨, 1633∼?)·권규(權珪, 1648∼1723)·이만부(李萬敷, 1664∼1732)·이만기(李萬基)·이징하(李徵夏) 등이 있으며, 대부분 남인들로 허목의 전서를 추종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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