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7권 한국 서예문화의 역사
  • 3 조선시대의 서예 동향과 서예가
  • 01. 조선시대의 서예 동향
  • 조선 후기 서예 동향
  • 2. 18세기 서예 동향
  • 금석문에 대한 관심의 고조
이성배

영조와 정조시대에 문풍이 크게 진작되면서 금석문 자료 수집이 더욱 많아졌으며, 방대한 분량의 금석문집을 간행하는 풍조가 나타났다. 그 중에 영조 때 김재로(金在魯, 1682∼1759)가 지은 『금석록(金石錄)』은 조선시대의 비문을 중심으로 비문 전체를 탁본하여 서첩으로 묶은 것으로, 원편 226책, 속편 20책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인데 현재 26책만 전한다.

한편, 금석비문의 수집 풍조가 확산되면서 금석이나 금석탁본에 대한 비평과 제발(題跋)의 풍조가 성하였다.51) 이완우, 앞의 논문, p.101. 유척기는 금석학에 조예가 있어 당대 금석학의 권위자로 인정을 받았다. 홍양호(洪良浩, 1724∼1802)는 <제신라문무왕릉비>·<제신라태종왕릉비>·<신라진흥왕북순비(新羅眞興王北巡碑)>·<제무장사비(題鍪藏寺碑)> 등 역대 유명한 금석문 10개에 제와 발을 썼다. 남공철(1760∼1840)은 『금릉집』의 <서화발미(書畫跋尾)>에서 중국의 금석 서화 명품 60여 종에 대한 제발을 썼는데, 비문이 20여 종이었다. 이들의 제발문을 보면 금석문에 대한 뛰어난 감식안과 열정을 볼 수 있다.

이처럼 18세기 서예는 수양성과 중화미를 중시하였던 성리학적인 서예인식에서 점차 벗어나 개인의 심(心)·정(情)·욕(欲)을 인정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자유로운 표현을 중시한 양명학적 미의식이 새롭게 등장하여 조선 후기 서예 인식에 큰 변화를 주었다. 또한, 아속의 전화가 발생하여 진·원의 특정 서체에서 벗어나 선진(先秦)이나 한·위의 전예 등을 바탕으로 개성과 창신성을 중시하는 글씨를 잘 쓰는 자가 나타났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 비평이 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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