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7권 한국 서예문화의 역사
  • 3 조선시대의 서예 동향과 서예가
  • 01. 조선시대의 서예 동향
  • 조선 후기 서예 동향
  • 3. 19세기 서예 동향
이성배

19세기 조선은 정조 이후 순조·헌종·철종으로 이어지는 동안 왕권이 약화되고 세도정치로 인해 정치·경제·사회적인 폐해가 야기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전세·군포·환곡에 대한 횡포가 심해진 삼정의 문란으로 민심이 급격히 이반하였으며, 마침내 민중봉기로 표출되었다. 이에 후대에 실학자로 불린 많은 지식인들이 이를 시정하려는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이들은 주로 서울 근교, 즉 경기에 거주하면서 한(漢)·송(宋) 학문의 절충을 통해 유교적 이상과 도덕성을 제고하려 하였고, 현안 문제인 토지문제·정치제도 등에 대한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이들은 중농학파, 중상학파, 북학파로 구분되며, 서구의 과학과 기술 등 새로운 사상과 문물을 수용하여 자주적이며 근대 지향적인 학문체계를 세우고자 하였다. 또한, 우리의 역사와 지리에 관심을 갖고 정약용의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1811), 한치윤의 『해동역사(海東繹史)』(1814), 김정호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1861) 등을 간행하였으며, 민중종교인 동학이 성하기도 하였다. 또한, 중인 계층 문화의 등장과 판소리·소설·민화 등 서민문화가 크게 대두하였다. 이처럼 19세기의 다양한 문화 현상은 조선 문화의 근대지향적인 경향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19세기 정치·문화의 변화는 서예에서도 영향을 미쳐서 전반기에는 개성이 강한 다양한 서체(書體)와 서론(書論)이 등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활발하고 다양한 서예 문화를 이루었다. 청의 고증학과 금석학 등은 조선의 서예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때문에 위(魏)·진(晉)이나 진(秦)·한(漢)의 서예에 관심을 가지면서 질박하고 골기 강한 서예를 중시하였다. 신위, 이삼만, 김정희, 조광진 등이 크게 활약하였다. 그러나 중기를 넘으면서 병인양요·신미양요·강화도조약 등 외세와의 충돌과 이를 극복하려는 대원군의 내정개혁의 시도, 임오군란과 갑신정변·동학농민전쟁과 일본의 간섭, 명성황후시해·을사늑약·정미조약·경술국치 등 끊임없이 급변하는 정치적 혼란으로 인하여 사회·경제·문화 등이 침체하였다. 서예도 예외가 아니어서 새로운 변화를 수용하고 침잠할 수 있는 정신적 여유가 없어지면서 크게 쇠퇴하였다.

19세기 해서를 보면 자하(紫霞) 신위(申緯, 1769∼1845)처럼 동기창·옹방강 등의 영향을 받아 단아한 해서를 썼으며,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7)처럼 연미함보다는 골기(骨氣)를 중시한 고졸한 해서를 쓰기도 하였다. 또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7)처럼 청의 영향으로 옹방강풍의 구양순체를 쓰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청의 비학(碑學)으로 새롭게 주목을 받았던 북위 해서의 영향은 아주 미미하였다. 이외에 해서를 잘 쓴 대표적인 이로는 김노경(金魯敬, 1766∼1840), 의순(意恂, 1786∼1868), 윤정현(尹定鉉, 1793∼1874), 심희순(沈熙淳, 1819∼?), 전기(田琦, 1825∼1854), 정학교(丁學敎, 1832∼1914), 김경림(金景林, 1842∼?), 유한익(兪漢翼, 1844∼1923), 윤용구(尹用求, 1853∼1939) 등이 있다.

19세기 행서는 일부 명의 서풍과 청의 영향으로 위·진 이전으로 소급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대표적인 인물로 신위 등은 명대 서예와 청대 서예를 수용하여 유려한 행서를 잘 썼다. 이에 비하여 이삼만은 위·진의 서예에 관심을 가지면서 우졸하고 골기있는 서예를 썼다. 김정희는 청의 고증학과 금석학의 영향을 받아 강하고 독특한 풍격의 행서를 완성하였다. 그의 행서는 문하생과 추종자들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조선 서단의 대미를 장식하였다. 이외에 행서로 유명한 이로는 조광진(曺匡振, 1772∼1840), 권돈인(權敦仁, 1783∼1859), 김명희(金命喜, 1788∼1857), 조희룡(趙熙龍, 1797∼1859), 이남식(李南軾, 1803∼1878), 이상적(李尙迪, 1804∼1865), 박규수(朴珪壽, 1807∼1876), 허유(許維, 1809∼1892), 신명연(申命衍, 1809∼1892), 조석원(曺錫元, 1817∼?), 김병기(金炳冀, 1818∼1875), 윤정기(尹廷琦, 1814∼1879), 이하응(李昰應, 1820∼1898), 한응기(韓應耆, 1821∼1892), 전기(田琦, 1825∼1854), 윤광석(尹光錫, 1832∼?), 민규호(閔奎鎬, 1836∼1878), 김성근(金聲根, 1835∼1918), 김윤식(金允植, 1835∼1920), 김홍집(金弘集, 1842∼1896), 민태호(閔台鎬, 1843∼1884), 김가진(金嘉鎭, 1846∼1922), 이도재(李道宰, 1848∼1909), 김옥균(金玉均, 1851∼1893), 윤용구(尹用求, 1853∼1939), 민영익(閔泳翊, 1860∼1914), 안중근(安重根, 1879∼1910) 등이 있다.

19세기 예서를 보면 청대 고증학과 금석문의 영향을 받아 서한의 고예(古隷)가 성하였다. 청대 초기에는 예서에 대한 저술로 한비(漢碑)의 특징을 분석한 곽종창(郭宗昌, ?∼1652) 『금석사(金石史)』를 비롯하여, 만경(萬經, 1659∼1741)의 『분예우존(分隷偶存)』, 고애길(顧藹吉, 강희 연간 때 인물)의 『예변(隷辨)』이 있는데, 그 중에 『예변』은 추사 김정희가 한비를 학습할 때 사용한 자서류였다. 김정희는 청의 옹방강·완원과 사제의 연을 맺었으며 옹수곤·섭지선 등과 지속적인 교류를 하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특히, 완원의 「북비남첩론 (北碑南帖論)」과 「남북서파론(南北書派論)」은 포세신(包世臣)·강유위(康有爲)로 이어지는 청대 비학의 이론적 근거가 된 것으로, 김정희의 서론과 예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추사는 고예를 바탕으로 변화가 많고 독특한 풍격의 예서를 썼으며, 문자향서권기를 강조한 그의 서예정신이 반영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추사의 예서는 그를 추종한 조광진(曺匡振, 1772∼1840), 권돈인(權敦仁, 1783∼1859), 의순(意恂, 1786∼1868), 김명희(金命喜, 1788∼1857), 신관호(申觀浩, 1810∼1884), 이하응(李昰應, 1820∼1898), 전기(田琦, 1825∼1854) 등으로 확산되었다. 이외에 예서로 유명한 이로 이남식(李南軾, 1803∼1878), 이유원(李裕元, 1814∼1888), 서승보(徐承輔, 1814∼?), 유치봉(兪致鳳, 1826∼?), 김석준(金奭準, 1831∼1915), 정학교(丁學敎, 1832∼1914), 민규호(閔奎鎬, 1836∼1878), 민태호(閔台鎬, 1843∼1884), 노경설(盧敬卨, 1847∼1908), 정유대(丁有大, 1852∼1927), 안중식(安中植, 1861∼1919) 등이 있다.

19세기 초서를 보면 이삼만(1770∼1847)이 골기가 강하며 독특한 유수체(流水體)로 알려진 초서를 잘 썼다. 김정희는 초서를 대부분 행서와 함께 썼으며, 그의 영향을 받은 이로 조광진(曺匡振, 1772∼1840), 민규호(閔奎鎬, 1836∼1878), 민태호(閔台鎬, 1843∼1884) 등이 있다.

19세기 전서를 보면 역관인 오경석(吳慶錫, 1831∼1879)이 중국의 금석문을 많이 수집하면서 전서를 잘 썼고, 권동주(權東壽, 1842∼?)는 정이문자(鼎彛文字)를 잘 썼다. 이외에 신위(申緯, 1769∼1845), 심상규(沈象奎, 1766∼1838), 전기(田琦, 1825∼1854), 유치봉(兪致鳳, 1826∼?), 김석준(金奭準, 1831∼1915), 정학교(丁學敎, 1832∼1914), 민태호(閔台鎬, 1843∼1884), 민영환(閔泳煥, 1861∼1905) 등이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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