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7권 한국 서예문화의 역사
  • 3 조선시대의 서예 동향과 서예가
  • 02. 조선시대의 주요 서예가
  • 조선 전기 주요 서예가
  • 1. 안평대군과 그 유파
이성배

송설체가 조선 초에 크게 성행할 수 있었던 그 중심에는 안평대군 이용이 있었다. 안평대군은 바로 15세기 조선 서예를 주도한 인물로 당시에 이미 상당한 분량의 중국 서화를 수장하고 있었다. 그가 수장한 서화자료는 고려 말부터 만권당을 통해 들여온 것과 노국공주가 가져온 자료들 중 상당수가 조선 왕실로 흘러들어 온 것, 그리고 안평대군 자신이 개별적으로 수집한 것이었다.

안평대군은 수 백점의 서화 가운데 행서와 선우추의 초서를 좋아하였다. 그의 서예는 36세의 짧은 생애 동안 조선 초기 서예를 수준 높게 이끌면서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특히, 그의 서예를 따르는 수많은 학자들로 하나의 서예유파를 형성하면서 조선의 서예를 정점에 이르게 하였다.

안평대군은 성장한 후 궁에서 나와 인왕산에 최초의 거처를 정하자, 세종이 당호를 ‘비해당(匪懈堂)’이라 지어 주었다. 그는 이곳을 단장하고 신숙주·성삼문·이개·김수온·이현로·서거정·이승윤·임원준 등 8명과 함께 오언이나 칠언 절구와 율시로 각자가 <비해당48영>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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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견 <몽유도원도권>
안견 <몽유도원도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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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대군과 집현전 학사들의 교유는 <몽유도원도권(夢遊桃源圖卷)>(1447)과 <소상팔경도시첩> 등에 실린 발문과 시문에 잘 나타나 있다. 특히, <몽유도원도권>의 발문과 찬시에 참여한 인물들은 당시 안평대군을 추종하였던 인맥들로 파악할 수 있다. 이 모임에 참여한 인물은 안평대군, 신숙주(1427∼1475), 이개(1417∼1456), 하연(1376∼1453), 송처관, 김담(1416∼1464), 고득종, 강석덕(1395∼1459), 정인지(1396∼1478), 박연(1378∼1458), 김종서(1390∼1453), 이적, 최항(1409∼1473), 박팽년(1417∼1456), 윤자운(1416∼1478), 이예(1419∼1480), 이현로(?∼1453), 서거정(1420∼1483), 성삼문(1418∼1456), 김수온(1409∼1481), 만우(千峰, 1357∼1477?), 최○로 모두 22명이다.52) 여기에 수록된 인물의 순서는 1947년에 일본 동경에서 현재의 두루마리 형식으로 표구되면서 정해진 것이다. 1929년에 內藤湖南이 논문으로 소개하였을 당시에는 이와 순서가 달랐다고 한다(안휘준·이병한, 『몽유도원도』, 예경문화사, 1988, pp.71∼72 참고). 안평대군이 세종 29년(1447) 4월 20일에 도원을 노니는 꿈을 꾸고 그것을 안견에게 설명하고 그리도록 하여 3일 만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그림에 감탄한 안평대군은 2편의 글을 썼고, 나머지 21명은 21편의 찬시를 써서 모두 23점의 시문을 유묵으로 남겼다. 여기에 참여한 인물들은 시문과 서화에 능한 정인지, 김종서, 이현로 등 중진 및 원로들과 음악에 조예가 있던 박연, 그리고 만우 같은 승려시인들이었다.

특히, 참여인물 중 집현전 학사 출신은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이개, 서거정, 윤지운, 최항, 김담, 이예, 송처관으로 10명이다. 이들은 모두가 당대의 문화와 예술을 주도한 최고의 재사(才士)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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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대군(이용) 해서 <몽유도원도발문(夢遊桃源圖跋文)>
안평대군(이용) 해서 <몽유도원도발문(夢遊桃源圖跋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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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대군은 또한 도원에 대한 꿈을 꾼 지 4년 후에 꿈속에서 본 곳과 비슷한 백악의 서북쪽 산록에 무계정사를 짓고 조정과 재야의 많은 인재들과 교유하였다. 이에 대해 『용재총화』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비해당은 왕자로서 학문을 좋아하고 더욱 시문에 뛰어났다. 서법에 뛰어나 천하에 제일이 되었고, 또 그림과 거문고와 비파의 기예에 뛰어났다. 성격은 또한 들뜨고 방탕하며, 옛것을 좋아하고 뛰어나기를 탐하였다. 북문 밖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또 남호(南湖, 현재 용산 부근)에 임하여 담담정(淡淡亭)을 지었다. 만 권의 책을 소장하고, 문사들을 불러 모아 12경시를 짓고, 48영을 지었다. 혹은 밤에 등불을 켜고서 얘기하고, 혹은 달이 뜰 때 뱃놀이를 하며, 혹은 점을 치고 혹은 장기와 바둑을 두며 음악을 계속하면서 술을 마시고 취하여 즐겼다. 일시의 이름난 학자로서 그와 교유를 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무뢰배나 잡업에 종사하는 이들도 그에게 모여들었다. 바둑판과 바둑알은 모두 옥을 사용하였고, 금니로 글씨를 썼으며, 사람들에게 비단을 짜게 한 다음 즉시 붓을 휘둘러 진초(眞草)를 어지럽게 쓰기도 하였다. 그의 글씨를 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즉시 써주었으니 일화가 대부분 이와 같았다.53) 成俔, 『慵齋叢話』.

안평대군은 그야말로 거문고·바둑·글씨·그림 등에 매우 다재다능하고 성격이 호방하여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다양한 인물과 교유 하였다. 이 때 성삼문도 이들 문사 그룹에 참여하여 <차무계수창시운5수(次武溪酬唱詩韻五首)> 등 수창시(酬唱詩)를 남겼다.54) 『成謹甫集』 권1,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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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대군(이용) 초서
안평대군(이용) 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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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다양한 신분과 선비들이 참여하여 완성한 <몽유도원도>와 그 발문은 조선 회화사 연구뿐만 아니라 시문과 서예를 연구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들의 글씨는 조선 초에 성행한 송설체의 진면목을 여실히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들이다.

안평대군의 글씨는 조맹부보다 더 연미하고 유려하며 강건하여 그의 글씨에 대한 국내외의 비평은 늘 화려한 수식어로 가득하였다. 문종과 성종 등 왕실에서도 안평대군의 글씨에 호응하였으며 일부는 거의 흡사할 정도였다. 또한, 그의 글씨는 문종 때 인쇄활자로 주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안평대군과 그를 추종하던 집현전 학사의 일부가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로 인해 죽음을 당하면서 많은 작품들도 정치적인 이유로 소실되었거나 그의 글씨를 꺼리게 되었다. 세조 때 중국 사신 예겸이 신숙주가 갖고 있는 글씨에 대해 물었을 때, 신숙주는 차마 안평대군 글씨라 말하지 못하고 거짓으로 친구 강희안 글씨라고 하자 세조가 이를 듣고 안평대군 글씨를 내주도록 하였다는 일화가 있는데, 이는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55) 『喜樂堂集』 권8, 「龍泉談寂記」.

안평대군과 그를 추종한 유파들이 활동한 때는 세종대왕이 그 자신이 유교적인 덕목을 갖춘 군주로서 정치·경제·문화·예악·국방 등 모든 분야에서 실질적인 조화를 구현하려한 시기였다. 당시의 정점에 달한 문화와 정신을 반영한 글씨가 안평대군과 그 유파가 쓴 <몽유도원도권>의 발문과 찬시(贊詩)이다. 이 글씨는 아름다운 송설체에서 벗어나 세련되고 청경(淸勁)한 기상과 운치가 있어서 조선 초기의 서예를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으로 평가된다. 곧, 이 시기에 조선 전기의 서예가 만개한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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