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7권 한국 서예문화의 역사
  • 3 조선시대의 서예 동향과 서예가
  • 02. 조선시대의 주요 서예가
  • 조선 전기 주요 서예가
  • 2. 성삼문(成三問, 1418∼1456)
이성배

성삼문은 자가 근보(謹甫), 호는 매죽헌(梅竹軒),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그는 고려 말 조선 초에 활동하였고 태종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시문과 초서에 뛰어났던 성석린(1338∼1423)의 증손이고, 무관 출신으로 도총관을 지낸 성승(?∼1456)의 아들로 홍성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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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문 행초 <제비해당몽유도원도기후(題匪懈堂夢遊桃源圖記後)>
성삼문 행초 <제비해당몽유도원도기후(題匪懈堂夢遊桃源圖記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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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438년에 식년문과에 합격하고, 1442년에 왕명으로 사가독서를 하였다.56) 사가독서란 세종 6년(1424)에 처음 실시된 것으로, 임금이 신하에게 1년 정도의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도록 한 제도이다. 사가독서를 하던 장소는 진관사 외에도 여러 곳이 있었다. 東湖(옥수동 부근), 西湖(마포 부근), 南湖(용산 부근)가 있었고, 그곳을 湖堂이라고 하였으며, 장소에 따라 각각 東湖堂, 西湖堂, 南湖堂으로 불렀다. 삼각산 진관사에서 집현전 학사인 박팽년·신숙주·이개·하위지·이석형과 함께 독서하면서 수창시(酬唱詩)로 <삼각산연구(三角山聯句)>를 남겼다.

성삼문은 이 무렵에 한글 창제를 위해 설치된 정음청(正音廳)에서 정인지, 최항, 신숙주, 강희안, 박팽년, 이개 등과 함께 연구하였다. 성삼문은 당시 요동에 있던 황찬(黃瓚)을 13번이나 방문하여 음운에 대해 깊이 연구하는 등 열정을 보였으며, 이는 훗날 1446년에 한글을 창제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후 집현전 학사와 수찬을 거쳐 경연관이 되었다. 1454년에 집현전 부제학과 예조참의를 지냈고, 1455년에 예방승지가 되었다. 이 해에 수양대군이 단종에게서 양위를 받을 때 국새를 안고 통곡하였다고 한다. 다음 해에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 김질의 밀고로 발각되어 참형되니 세상에서 ‘사육신’이라 하였다. 1691년에 신원되었고, 1758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성삼문은 안평대군과 시서화로 교유하면서 매우 가깝게 지냈다. 당호를 매죽헌으로 지은 것도 서로 밀접함을 의미한다고 본다. 그는 안평대군이 꿈을 꾸고 안견이 3일 만에 그린 <몽유도원도권>(1447)에 대해 찬시 <제비해당몽유도원도기후(題匪懈堂夢遊桃源圖記後)>를 짓고 행·초서로 썼다. 필체가 활발하고 유려하여 송설체의 묘결(妙訣)을 터득하였음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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