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7권 한국 서예문화의 역사
  • 3 조선시대의 서예 동향과 서예가
  • 02. 조선시대의 주요 서예가
  • 조선 전기 주요 서예가
  • 4. 최흥효(崔興孝, 태종∼세종 때 활동)
이성배

최흥효는 생몰 연대가 분명하지 않으며 태종부터 세조 때까지 주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당시에 ‘최지초서(崔之草書), 용지행서(瑢之行書)’라 칭할 정도로 초서에 뛰어나서 안평대군도 그의 초서를 청할 정도였다. 다음 일화는 그러한 내용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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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팽년 행서 <오언율시>
박팽년 행서 <오언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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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흥효 초서
최흥효 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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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안평대군은 최흥효의 글씨가 자기와 같은 필법임을 좋아해서 그의 집을 자주 방문하였다. 최흥효는 안평대군이 큰 화를 피하지 못할 것을 알고 마침내 서법을 고쳐 괴이한 것을 숭상하였다. 안평대군은 크게 애석하게 여기고 드디어 서로 소원하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최흥효는) 화를 면하였다. 그의 여덟 폭 글씨는 지금 각으로 전해져 병풍으로 많이 있으니 ‘자류행차시(紫騮行且嘶)’ 등의 글씨가 이것이다.57) 『於于野談』 권3, 「書畵」.

최흥효는 자신의 글씨를 선서(善書)라 자부하며 여러 관사를 돌아다니면서 글씨를 써주고 술을 대접받았지만, 글씨가 거칠고 비속하다고 평가받고 있었다. 또한, 안평대군은 최흥효의 글씨를 청하여 받아보았지만 마침내 조각내어 도배해 버리고 말았다고 하였다.58) 『용재총화』 권3, 「서화」.

최흥효는 낙천적이고 자유분방한 성품의 소유자이며, 초서에 나타나듯이 원윤(圓潤)한 필체가 유려한데, 스스로 칭하기를 동진의 유익(庾翼)의 서법을 본받아 글씨를 잘 쓴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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