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7권 한국 서예문화의 역사
  • 3 조선시대의 서예 동향과 서예가
  • 02. 조선시대의 주요 서예가
  • 조선 전기 주요 서예가
  • 6. 이황(李滉, 1501∼1570)
이성배

16세기에 활동한 퇴계 이황은 성리학자로 잘 알려졌지만 시서와 문학에도 뛰어났다. 퇴계의 서예의식은 다음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근세에 조맹부와 장필의 글씨가 성행하여 모두 후학을 그릇되게 함을 면하지 못하네. 글자 쓰는 법은 마음의 법에서 나오니 글씨를 익히는 것은 글씨로 이름을 얻으려 해서는 안 되네. 창힐과 복희씨의 문자를 만든 것은 저절로 신묘했으며 위진(魏晉)의 풍류는 차라리 방류(放疏)하지. 오흥(조맹부)을 배우려다 고의(故意)를 잃을까 두렵고, 동해(장필)를 흉내내다 허사될까 두려워라. 다만, 점획은 모두 존일(存一)하도록 하고 인간 세상에서 떠도는 비난과 칭찬에는 마음 두지 마소.62) 『退溪先生文集』 권3, 「和子中閒居二十詠 習書」.

퇴계는 조맹부와 장필의 글씨를 비판하고 위·진의 글씨를 높이며, 또한 세속적인 명성보다는 심성을 수양하는 존일의 관점에서 서예를 중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그의 ‘경(敬)’ 사상이 반영된 것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글씨를 반드시 반듯하게 썼으며, 비록 과문(科文)이나 잡서(雜書)를 베끼더라도 거칠게 쓰는 일이 드물었다. 다른 사람에게 글씨를 요구하지 않았는데 남의 잡스런 글씨를 싫어했기 때문이다.63) 『退溪先生言行錄』 권5. 후학은 그의 글씨를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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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 해서 <천자문(千字文)>
이황 해서 <천자문(千字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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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비록 우연히 한 글자를 쓰더라도 점획을 정돈하여 쓰지 않은 것이 없어서 모든 글자체가 방정하고 단중하였다. …… 먹을 갈 때는 반드시 자세를 방정하게 하였으며 조금도 기울어짐이 없었다.64) 李德弘, 『艮齋集』 권6, 「溪山記善錄」.

<천자문>은 바로 퇴계의 ‘경(敬)’ 정신이 잘 드러난 것이다. <천자문> 글씨는 점획이 안정되었고 자형이 매우 단아하며 성리학자의 성정이 잘 반영되어 ‘글씨는 그 사람이다(書如其人)’의 면모를 잘 드러내고 있다. 점획이 분명하고 자간과 행간을 넓게 하여 안정적인 장법을 취하였다. 성리학적 미의식을 가진 조선 선비들이 추구한 이성 서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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