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7권 한국 서예문화의 역사
  • 3 조선시대의 서예 동향과 서예가
  • 02. 조선시대의 주요 서예가
  • 조선 전기 주요 서예가
  • 8. 황기로(黃耆老, 1521∼?)
이성배

16세기의 중종 때 활동한 황기로는 자가 태산(鮐山), 호가 고산(孤山), 매학정(梅鶴亭)이며 생몰연대가 분명하지 않다. 광초에 능하였으며, 필력이 웅장하고 자유분방함이 있으며 초성(草聖)이라는 칭호가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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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기로 초서 <약교림수반 자자공성룡(若敎臨水畔 字字恐成龍)>
황기로 초서 <약교림수반 자자공성룡(若敎臨水畔 字字恐成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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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을 보면, 황기로는 술을 좋아하고 초서를 잘 써서 그의 글씨를 얻고자 하는 사람은 큰 잔치를 베풀고 그를 맞이했으며, 멀고 가까운 곳의 손님들이 각자 무늬없는 흰 비단과 화선지를 가져와 쌓인 것이 천백 축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가 글씨를 쓰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황기로는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힘썼다. 붓이 좋고 나쁨을 가리지 않았으며, 또한 자신의 집에 좋은 붓도 가져가지 않았다. 다만, 먹을 두어 말 정도 갈게 하고 주인집의 닳아빠진 몽당붓으로, 예컨대 아이들이 담장 모퉁이에 버린 붓, 부인들이 한글 편지를 쓰고 남은 것 같은 것들을 모두 합쳐 묶어서 두어 자의 긴 붓대를 사용하여 붓대 머리를 꺾어 버리고 노끈으로 얽어 묶었다. 날이 저물도록 술에 흠뻑 취해 붓을 잡을 생각을 안 하니 모든 손님들이 늦어졌다. 술이 취해 붉은 색 푸른 색을 분간하지 못할 만큼 된 뒤에 주먹으로 붓대 끝을 잡고 손가락을 쓰지 않았으며 먹을 적셔서 멋대로 휘둘렀다. 한 번 휘둘러 수백 장의 종이를 다 썼는데 해가 다 기울지 않아서 끝냈다. 그 글씨는 용이 나는 듯 호랑이가 움켜잡는 듯 귀신이 출몰하는 듯한 형태가 천 가지로 변하여 형용할 수가 없었다. 그의 글씨는 장욱과 장여필에게서 비롯되는데, 그 신묘하고 괴이함을 헤아릴 수 없으며 대부분 스스로 조화를 이루었다. 비 록 중국의 수백 대 동안이라도 또한 짝할 만한 이가 드물 것이다.65) 『어우야담』 권3, 「서화」.

이 기록을 보면 황기로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술을 마시면서 글씨를 즐겼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붓을 가리 않고 취흥을 극대화하여 만용에 가깝게 자신의 재기를 발산하는 등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황기로의 행초는 당 장욱과 명 장필(1425∼1487)의 광초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특히 장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66) 장(여)필은 명 인종대에 태어나 헌종대에 활약한 인물로. 본명은 弼이며, 호는 東海이고, 汝弼은 字로 松江 華亭사람이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초서에 특히 뛰어나서 술에 거나하게 취해 흥이 나면 잠깐 사이 수십 장을 쓰는데, 빠르기가 풍우 같으며, 날쌔기가 龍蛇 같고, 기울어진 것은 떨어지는 돌 같으며, 파리한 것은 枯藤 같았다. 그의 狂書醉墨은 세상에 퍼져서 비록 해외에 있는 나라라도 모두 그의 묵적을 구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顚張(즉 장욱)이 다시 나타났다고 여겼다고 하였다(『中國書法大辭典』, 書譜出版社, 張弼條 참조). 장필의 초서가 조선 초기에 많은 영향을 미쳤음을 여러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황기로는 술을 좋아하여 만취상태에서 광초 쓰기를 좋아하고, 또 대단한 속필을 구사하였으며, 많은 작품을 썼다. 또 구애받는 삶을 싫어하고, 도덕적인 제약을 가하는 제도와 인습의 틀을 벗어나려 하였기 때문에 글씨에서 고법에 머무르지 않고 창의적인 예술을 추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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