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7권 한국 서예문화의 역사
  • 3 조선시대의 서예 동향과 서예가
  • 02. 조선시대의 주요 서예가
  • 조선 전기 주요 서예가
  • 9. 한호(韓濩, 1543∼1605)
이성배

석봉 한호는 왕희지 필법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여 고법을 지향하되 단순히 ‘모양을 베끼는 것(形似)’에 머물지 않고 고인의 정신세계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그는 장지·종요·왕희지·왕헌지 등의 전아한 위·진 고법은 물론 당·송·원·명의 개성있는 글씨와 서론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명대의 왕세정(王世貞)의 서예 제발(題跋)과 서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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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호 해서 <해서 천자문>
한호 해서 <해서 천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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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봉의 대표작인 <해서 천자문>은 1583년에 선조의 명으로 쓰였는데 이후 초학자들의 기본 학습서로 널리 애용되었다. 석봉의 대자해서는 설암의 영향을 받았으며 <대자 천자문>을 비롯하여 도산서원과 옥산서원 등에 많은 편액서를 남겼다.

행서는 주로 왕희지체를 바탕으로 쓰다가 노년에 원숙하고 고박한 서풍을 구사하였다. 한편, 초서는 이왕의 고법을 바탕으로 장욱·회소·장필·축윤명(祝允明) 등의 서체를 탐구하여 개성이 강하였다. 보다 자유로운 기상을 보여주는 <초서 천자문>이 알려져 있는데, 박팽년이 송설체로 쓴 <초서 천자문>과 하서 김인후가 장필의 초서풍으로 쓴 <초서 천자문>과는 또 다른 원필로 원숙한 개성을 보여주고 있다.

석봉체는 한동안 서자관(書字官)으로 활동하여 왕실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선조 어필과 인목대비 및 정명공주의 필적에서도 석봉체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당시 사대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백광훈의 아들인 백진남에게 『석봉필결』을 써주는 등 글씨로 교유를 하여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사실은 최립(崔岦)과 오준(吳竣), 김집(金集), 이경직(李景稷)과 이경석(李景奭) 부자, 송준길(宋浚吉) 등의 글씨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석봉 글씨에 대해 국내외에서 높은 평가를 내렸고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조선 후기에 일부 비판도 제기되었지만, 송설체 중심에서 위·진 고법에 대한 관심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67) 이완우, 『석봉 한호 서예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사학위논문, 1998,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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