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7권 한국 서예문화의 역사
  • 3 조선시대의 서예 동향과 서예가
  • 02. 조선시대의 주요 서예가
  • 조선 후기 주요 서예가
  • 10. 윤순(尹淳, 1680∼1741)
이성배

윤순의 호는 백하(白下)이고 윤두수의 5대손이다. 그는 조선 양명학의 거두인 정제두의 문인이며 동생 정제태의 사위이기도 하다. 시·문·서화에 능하였다. 그의 해서·행서·초서는 왕희지·이옹·소식·미불·문징명·동기창 등 위·진의 고법과 당·송·명 등 역대 서예를 두루 섭렵하여 제가의 장점을 터득하였다. 전서는 소전을 따랐고, 예서는 한나라 예서를 배워 옛것에 해박하고 지금의 것에 통달하였다.

특히, 왕희지와 미불의 서풍이 가미된 행서에 능하여 단아하고 유려하며 성품이 반영되어 맑고 빼어났다. 그는 이서의 서예가 왕희지 중심으로 머물 때 여기에서 벗어나 역대의 서예에서 장점을 본받으려 하였다. 이러한 정신이 문인인 이광사·강세황·조윤형 등으로 하여금 한·위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갖도록 하였다. <고시서축(古詩書軸)>(1737)은 그가 역대 서예에 관심을 갖고 장점을 터득한 노년의 경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글씨의 발문에서 강세황은 자태횡생(姿態橫生)을 지적하고 조윤형은 수미지태(秀眉之態)가 지나침을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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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순 행서 <고시서축(古詩書軸)>
윤순 행서 <고시서축(古詩書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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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문체반정을 통해 문체를 국초의 질박한 문풍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듯이 서체반정을 통해 국초의 순박한 서체로 돌이키려 하였다. 이어 정조는 “우리나라 명필로는 안평대군을 제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안평대군은 낭미필로 백추지에 글씨를 썼는데 오직 한호만이 그 묘리를 깨달았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서예가들이 모두 비해당과 석봉의 문호를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판서 윤순이 나오자 온 나라 사람들이 쏠리듯 그를 따랐으니, 이에 서도가 한번 크게 변하여 진기가 없어지고 점차 마르고 껄끄러운 병통을 열어 놓게 되었다며 이제 서풍을 순박한 쪽으로 돌려놓고자 하는 바이니, 그대들로부터 먼저 촉체(蜀體)를 익혀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71) 이민식, 「정조시대의 서예관과 서체반정」, 『정조시대의 명필』, 한신대학교 박물관, 2002, pp.108∼109. 윤순의 글씨는 당시 시체(時體)로 불리며 유행서풍의 중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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