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7권 한국 서예문화의 역사
  • 3 조선시대의 서예 동향과 서예가
  • 02. 조선시대의 주요 서예가
  • 조선 후기 주요 서예가
  • 21. 이삼만(李三晩, 1770∼1847)
이성배

이삼만은 호가 창암(蒼巖)이며 정읍과 전주에서 활동하였다. 이광사의 영향을 받아 해서, 행서, 초서와 대자에 능하였고 대체로 힘있고 고박한 글씨를 썼다. 또한, 그의 초서는 막힘이 없어서 그의 글씨를 유수체(流水體)로 부르기도 한다. 이삼만은 엄격한 학서기준과 과정을 중시하였고 엄청난 면학을 강조하였다. 당시 서예에서 추구하던 진(晉)·당(唐) 서예에서 벗어나 진(秦)·한(漢)·위(魏) 서예에서 고법(古法)을 추구하여 독자적인 경지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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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삼만 해서 <백개골기동달(伯喈骨氣洞達)>
이삼만 해서 <백개골기동달(伯喈骨氣洞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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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졸한 해서로 쓴 <백개골기통달>과 초서로 쓴 <산광수색>은 연미함에서 벗어나 골기와 필세가 강한 우졸(愚拙)한 서예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한법(漢法)은 모나면서 파리하여 정채가 적으면서 골기(骨氣)가 많다. 당법(唐法)은 비후하면서 두툼하여 골기가 적으면서 태(態)가 낫다. 그래서 한의 채옹(蔡邕)은 골기에 통달하여 또한 진인(晉人)이 미치지 못한다. 지금 한법(漢法)에 전념한다면 어찌 진당(晉唐)을 걱정하겠는가.”라는 주장을 반영한 것이다. 이삼만에 대해 “붓을 대는 곳에는 소를 돌리는 듯한 힘이 있고, 굴절하는 곳은 대나무를 꺾는 듯한 기세가 있으며, 붓을 옮기는 곳은 성난 사자가 돌을 파내는 듯한 기상이 있으면 근골있는 글씨라고 한다. 그러므로 필력이 많고 근골이 많은 것을 성(聖)이라고 한다.”라고 하여, 필력과 근골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그는 조선 후기의 종(鍾)·왕(王)을 중시하는 서예 경향을 반영하면서 한 단계 더 나아가 골기(骨氣)가 강하고 질박한 진·한·위의 서예미감을 반영하여 독자적인 경지를 추구하였다. 그의 서예와 서론에 나타나는 우졸(愚拙)의 미감(美感)은 당시 조선 서예가 추구하는 한 서예 경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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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삼만 초서대자 <산광수색(山光水色)>
이삼만 초서대자 <산광수색(山光水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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