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7권 한국 서예문화의 역사
  • 3 조선시대의 서예 동향과 서예가
  • 03. 조선시대 서예의 역사적 의의
  • 조선 전기 서예의 의의
이성배

조선조 서예정책을 보면 서예를 전문적으로 교육시키는 학교제도나 응시하는 과거 과목이 없었고 단지 해당 관청에서 필요에 따라 교육하였다. 이러한 체계적인 교육의 부족 때문에 당시 각 관아에서 자학(字學)의 미비함을 지적하는 계가 올라올 정도였다. 이에 군주들은 지속적으로 역대 명첩(名帖)을 수집하고 간행하여 글자를 보정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서예정책을 보면 시기별 명첩간행의 변화를 볼 수 있다.

초기에는 진서(晉書)를 중심으로 구하다가 문종·세조 때는 차츰 송설첩(松雪帖)을 중심으로 변하며, 성종 무렵에는 다시 진서인 왕희지첩(王羲之帖)을 중심으로 간행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는 정치세력의 추이와도 연관되었다. 또한, 인쇄 활자도 계속 다양한 서체로 주조되었는데 여기에 당대의 명필이 참여하여 수준 높은 활자문화를 이룰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인쇄 활자의 서체도 안평대군의 경우처럼 정치적 영향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조선 전기 서체의 변화를 보면 초기는 송설체를 중심으로 크게 성행하여 많은 명서가를 배출하였고 점차 조선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대표적인 서예가인 안평대군 이용은 왕실과 집현전 학사 등 많은 추종자를 두어 우리 서예사에서 최초의 서예유파를 탄생시켰다. 그렇지만 초기의 송설체 중심의 서풍은 정치세력의 교체와 함께 한풀 꺾이고 성종·중종 이후 점차 왕희지체 중심의 위·진서풍으로 변하였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 있던 사림들은 단아하면서 근엄한 글자 형태로 변한 왕희지체를 많이 쓰게 되었는데, 그 속에는 송설체의 영향이 남아 있었다. 이 시기의 한석봉은 송설체와 위·진의 서체를 고법으로 삼고 또한 당·송과 원·명의 개성적인 서체를 수용하여 독특한 석봉체를 완성시켰다. 이렇게 조선화된 석봉체는 상하 계층에서 널리 쓰게 되었다.

조선 전기의 서예 의식은 비교적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역대 서예에 대한 비평의 빈약함은 서예와 서예사에 대한 인식 부족 때문이라 말할 수 있다.

조선 전기 서론(書論)에서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정자와 주자의 성리학적 서론의 영향이었다. 이 서론은 서예를 도덕적인 심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인식하였는데, 이것은 주자의 예덕상관론의 입장을 계승한 것이다. 이처럼 수양론을 강조한 서법은 사대부들을 중심으로 서예인식을 좀 더 심화시켰다.

조선 전기의 서예 경향은 고법을 중시하는 유형과 창의를 중시하는 유형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전통 서법을 중시하고 고아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유가의 상고의식이나 주자의 지금 사람들은 옛사람에 미치지 못한다는 ‘금인불급고인(今人不及古人)설’의 영향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유형은 고법을 통한 내면적 심화를 의미하며 법통과 학통을 중시하는 유가의 도통 의식과도 관련 있는 것이다. 이 유형은 해서와 행서에 주로 나타나며 위·진 글씨와 송설체 를 고법으로 여겼다. 이용·성임·신장·박팽년·신숙주·강희안·성수침·이황·이이 등이 여기에 속하며 한호의 해서도 이 유형에 해당한다.

이에 비하여 창의를 중시하는 입장은 고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창의적인 필획을 강조하며 자유로운 운필을 강조한다. 필획에 윤갈이 나타나고 자형에 태세가 있으며 장법이 보다 자유롭다. 이 유형은 전체적인 질서보다 자유로운 개성을 강조하며 기존의 틀을 벗어나려 한다. 이러한 유형에 적합한 것은 행서와 초서인데, 특히 광초를 통해 표현하기를 좋아하였다. 최흥효·김구·정사룡·황기로·어숙권·양사언·김인후·백광훈·백진남·이우·이산해 등이 이 유형에 속하며, 한호의 대자해서와 대자행초도 여기에 해당한다.

편액서에 대한 자료도 미미하여 고려 말 조선 초에 성행한 편액 글씨와 작가에 대한 사실이 간략히 전하고 있다. 편액 글씨는 왕조의 개창으로 궁궐과 사당·사찰 등의 건축과 함께 발달하였다. 편액 글씨체는 송설체보다 설암체가 더 성행하였는데, 이는 독특한 운필과 웅건한 기상이 대자해서를 쓰기에 적합하였고 건국 초기의 기상과도 부합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안평대군·성임·한석봉 등은 편액글씨에 능하였다.

조선 초기의 석비는 초기에 고려 말의 양식을 따르지만 유가적 이념에 맞는 새로운 형식으로 변모하였다. 비액의 양식과 서체도 변하여 성리학적 미의식을 구현하기 적합한 소전과 이양빙의 전서를 선호하였다.

조선조의 정국이 점차 안정되고 문물이 흥하면서 세련되고 안정된 해서와 개성있는 행·초서가 많이 쓰였다. 서예를 유가적인 인성 수양의 도구로서 보기도 하고 안정적인 질서와 구조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의식을 표현하는 수단으로도 보았다. 성리학적 중화미의 구현과 인격완성을 중시하였으며, 특히 왕희지나 조맹부의 해서와 행서를 고법(古法)으로서 좋아하였다. 이에 비하여 행·초서는 고법을 벗 어나 개성적이고 자유분방한 감성 표현에 적합한 장욱과 회소와 장필 등의 초서를 선호하였다. 조선 전기 초서는 이 두 유형의 서체가 공존하거나 경쟁하면서 더욱 활기차게 전개되었다.

안평대군은 조선 초의 서풍을 주도한 대표적인 인물로, 송설체의 진수를 얻은 행·초서는 필세가 호방하고 아름다우며 세련되어 국내외에 널리 알려졌다. 특히, 중국 사신들이 그의 글씨를 높이 평가하고 즐겨 찾았다. 집현전 학사인 박팽년과 신숙주와 성삼문 등도 매우 뛰어난 송설풍의 행초를 썼다. 이에 비하여 최흥효는 느긋하면서 낙천적이며 자유분방한 위·진의 초서를 구사하였다. 성리학자로 잘 알려진 김구는 행초를 쓰기 전에 검무를 추며 긴소리(長音)를 질러 감정을 고양시킨다는 점이 독특하였다. 황기로는 장욱과 장필의 영향을 받아 취중에 광초 쓰기를 즐겼으며, 그의 삶과 글씨는 형식적인 틀에 얽매임을 거부하였다. 그의 광초는 당대는 물론 조선 후기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한편, 이황은 성리학자로서 단아한 필획과 온건한 필세의 글씨를 써서 그의 ‘경’ 사상을 드러내었다.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서예가인 한호는 위·진 고법을 바탕으로 하는 해서와 행서에 뛰어났으며, 후에는 이를 벗어나 개성있는 대자해서와 행초에도 뛰어났다. 조선 성리학이 퇴계와 율곡에 의해 정점에 이른 시기에 그는 조선 서예의 특성이 강한 석봉체로 위상을 한 단계 높였다.

요컨대 조선의 문화는 사대부가 주체가 되어 성리학을 중심이념으로 삼았다. 성리학은 조선의 서예 정책이나 서풍의 변화는 물론 서론과 비평 등에서 사대부들이 서예를 심성수양의 측면으로 심도있게 인식하는 중심 사상으로 등장하였다. 그렇지만 사대부들은 자칫 개념 중심으로 경직되기 쉬운 성리학적 예술인식에서 벗어나 감성의 절제와 자유로운 표현을 통하여 균형있는 성정(性情)의 수양을 도모하는 조화로운 서예인식을 보여 주었다. 이같이 조선 초기의 서 예의식은 이학적 인식을 중심으로 새로운 형태의 계승과 비판을 전개하면서 심화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