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7권 한국 서예문화의 역사
  • 3 조선시대의 서예 동향과 서예가
  • 03. 조선시대 서예의 역사적 의의
  • 조선 후기 서예의 의의
이성배

임진·병자 양란 이후 조선은 사상과 문화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흐트러진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성리학적 질서의 심화로 예론이 활성화되었으며, 소중화 의식을 바탕으로 한 문화적 자부심과 주체의식이 고양되었다. 조선 후기 서예는 이러한 변화와 부합되는 특징을 갖는다.

17세기는 청에 대해 복수설치 의식과 명에 대한 의리의식이 상충하면서 명조 서예의 영향이 지속되었다. 또한, 성리학이 인성론에 대한 논의와 예송논쟁 등으로 심화되자 서예와 서론에서도 수양을 강조하고 변화보다 순정함과 복고 경향이 나타났다. 먼저 송준길·송시열은 석봉체를 내재적으로 계승하면서 충의의 상징인 안진경체를 가미하여 둔중하면서 굳센 필의의 글씨를 썼고, 수양과 중화미를 중시한 이학적 서예의식을 갖고 있었다. 아울러 허목은 독창성이 강한 창고한 고전을 썼다. 결국 17세기 서예와 서론은 다양성 대신 심화를 택하였고, 사대부들의 문화적 자존의식이 반영된 독특한 면모를 드러낼 수 있었다.

18세기는 청조 문화에 대한 북학의식이 강하여 청에 대한 친교와 교류가 보다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청조의 금석고증학의 영향으로 전서와 예서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18세기 서예에는 수양과 중화미보다 개성과 창의성 및 다양성의 조화를 추구하는 풍조가 등장하였다. 다시 말해서 서예 미학에서 아속(雅俗)의 전화가 발생한 것이다. 이러한 풍조는 특정 서체와 이론에서 벗어나 고금의 다양 한 서체에 일가를 이룬 명가와 기존의 서예에 불만을 갖고 비평을 하는 등 생동감 있는 서예문화기로 발전하였다.

19세기는 이전의 창신성과 다양성의 난만(爛漫)한 분위기에서 벗어나 새롭게 결집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속(俗)의 고졸함을 강조하는 서예풍조가 성하였으며 다른 하나는 실학사상을 바탕으로 청의 학문 경향인 금석비학을 수용하여 기존의 틀을 벗어나려 하였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진(晉)·당(唐)의 서예보다 한(漢)·위(魏)의 질박하고 필력이 강한 골기를 강조하였다. 또한, 개성이 강한 서론으로 독창성을 강조하였고 기존의 서예를 비판하는 등 분위기를 쇄신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처럼 분위기를 일신하며 흥기하던 서예는 19세기 후반 조선의 근대화 과정에서 쇄국과 개방의 과정에서 나타난 정치·사회·문화 등의 혼란과 함께 제대로 만개하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 19세기 후반 조선이 쇠퇴하는 시기에 옹동화(翁同龢)·오대징(吳大徵)·강유위(康有爲)·오창석(吳昌碩) 등 청말의 서예와 서예이론, 그리고 전각(篆刻) 등이 전해졌지만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였다.

이상으로 살펴본 조선 후기 서예의 특징을 몇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서예의 내재적인 발전으로 조선화가 진행되었다. 17세기에는 왕희지체의 조선화를 의미하는 석봉체 해서가 크게 유행하였다. 석봉체는 조정에서 <석봉천자문>으로 간행하여 조선을 대변할 수 있는 서체로 유행하였다. 석봉체의 영향을 받은 동춘당 송준길과 우암 송시열의 양송체는 이학적인 서예정신을 반영하면서 심화되었다. 미수 허목은 3대의 고전(古篆)을 바탕으로 깊은 연구를 통해 초서의 운필이 가미된 기이하고 굳센 전서를 완성하였다. 이는 중국 서예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것으로 독자성이 강하다. 또한, 진·당·송·명의 초서를 바탕으로 성립된 황기로풍의 초서가 유행하였다. 이러한 예들은 모두 문화적 주체성과 자부심을 바탕으 로 나타난 현상들이다. 18세기에도 조선 서예에는 내재적인 발전을 하면서 중국에서 서예를 수용하여 이를 심화시키는 현상이 나타난다. 옥동 이서와 윤두서는 왕희지의 <악의론(樂毅論)>을 바탕으로 고졸한 해서인 소위 동국진체를 쓰게 되었고, 윤순과 이광사 등도 고졸한 해서를 발전시켰다.

둘째로 명·청 서예의 영향이다. 중국과 교역을 통해 다양한 자서(字書)와 새로운 법첩(法帖)이 들어와 영향을 미쳤다. 왕희지와 조맹부 서예가 전범(典範)이 되었던 것에서 벗어나 송대의 소식과 미불, 명·청의 장필·이동양·문징명·축윤명·동기창·옹방강 등의 서예가 유행하였다. 특히, 윤순은 미불과 동기창의 영향을 많이 받아 변화가 많고 창신성이 강한 서예를 유행시켰다. 이 서체를 당시 시체(時體)라 불렸고 정조는 서체반정의 서예정책을 실시하였다.

셋째로 금석문 자료 수집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였다. 양란 이후 한예(漢隷)·위예(魏隷)나 선진의 전주(篆籒)·종정문(鐘鼎文) 등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우리 금석자료에도 관심을 가져 거질(巨帙)의 금석자료집을 간행하기 시작하였다. 금석문에 대한 관심은 서예에도 영향을 미쳐서 한·위의 예서와 선진의 고문대전(古文大篆)에도 관심을 가지면서 기존 서예와 합류하여 서예문화를 보다 풍요롭게 하였다.

넷째로 성리학적 미의식과 양명학적 미의식이 반영된 서예비평과 서론이 등장하였다. 성리학이 심화되면서 성(性)과 이(理)의 보편성을 반영한 인식이 확대되면서 서예와 서론에서 인성도야를 위한 수양론과 중화미를 중시하였다. 대다수 성리학자들의 제발문과 이서의 『필결』 등에서 성리학적 서예의식을 찾아 볼 수 있다. 이에 비하여 양명학은 심(心)과 정(情)과 욕(欲)을 긍정하면서 보다 자유로운 비판과 창작을 추구하게 되었다. 실용성을 강조한 윤순의 서론, 이광사의 『서결(書訣)』 등의 일부 학자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섯째로 아속(雅俗) 전환의 미의식 변화가 발생하였다. 아의 미의 식은 진(晉)·당(唐)·원(元)의 해서·행서·초서 첩을 중심으로 전아함을 강조하였다. 이에 비하여 속(俗)의 미의식은 선진(先秦)이나 한·위의 금석 비문을 통해 전서와 예서를 주목하였고 개성과 창신성을 구현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조선 후기 서예는 아속의 전환이 나타나면서 서예 미의식의 질적인 변화가 나타나고 심화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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