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7권 한국 서예문화의 역사
  • 4 근·현대의 서예 동향
  • 01. 구한말의 서예 동향
이승연

근대는 구한말의 정치적 혼란과 외세의 침략으로 인하여 전통문화의 정체성이 균열되고 혼란에 휩싸였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1876년 강화도조약을 계기로 밀려오기 시작한 서구문화와 임오군란(1882)·갑신정변(1884)으로 인한 청·일 양국의 개입은 정치·외교·문화면에서도 기존의 질서와 계통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시기 서예에서도 중국과 일본서풍의 영향을 크게 받았는데, 특히 한말에 내한한 청대의 서예가들과 정치인들의 영향에 의해 청대 서풍이 본격적으로 유입되었으며, 더욱이 해외유학파에 의한 서·화·각의 영향은 매우 컸다.

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하면서 나라와 문화를 모두 잃은 비극적인 상황에서 구한말에 활동하였던 서예가들은 나라를 잃은 울분과 설움을 금서(琴書)로써 달래거나 친일세력으로 변하여 당대 최고의 명예를 유지하는 두 양상으로 나타났다. 이 시기의 작품전시는 민족서예가들의 활동무대가 된 서화협회전[書畵協會展, 일명 협전(協展)], 일본서예가와 친일서예가의 혼재 양상을 보인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 일명 선전(鮮展)]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일본서풍의 영 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공모전이라는 형식을 통해 신인작가 등용문의 장이 열리는 시발점이 되었던 시기라고도 할 수 있다.

구한말에는 조선 후기의 거두였던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영향으로 종래의 조선서풍이 이어졌으며, 아울러 청대의 비학(碑學)과 첩학(帖學)의 서풍을 적극 수용하여, 한예(漢隷) 이전의 서법을 중심으로 한 비학과 왕희지(王羲之, 303∼361, 321∼379) 서체를 중심으로 한 첩학이 함께 유행하였다.

더욱이 19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옹동화(翁同和, 1830∼1904)와 오대징(吳大徵, 1835∼1902) 등의 서예가와 원세개(袁世凱, 1859∼1916)·이홍장(李鴻章, 1823∼1901) 등의 정치인들이 자주 내한하고 외교사행이 빈번해지면서 청말 대가들의 진적(眞跡) 유입이 원활하게 이루어져 청대의 금석학과 고증학의 영향은 더욱 커졌다. 이와 더불어 비학의 영향으로 서체에서도 고대의 전서와 예서를 임모하거나 방작하는 학습법이 널리 퍼져, 전예에서는 등석여(鄧石如, 1743∼1805)·섭지선(葉志詵, 1779∼1863)·오대징·오창석(吳昌碩, 1844∼1927) 등의 서풍이 유행하였다.

그러나 행서와 초서에서는 첩학의 학습법으로, 당대(唐代)의 구양순(歐陽詢, 557∼641)·안진경(顔眞卿, 709∼785)·유공권(柳公權, 778∼865), 송대(宋代)의 미불(米芾, 1051∼1107)·소식(蘇軾, 1036∼1101)·황정견(黃庭堅, 1045∼1105), 원대(元代)의 조맹부(趙孟頫, 1254∼1322), 명대(明代)의 동기창(董其昌, 1555∼1636), 청대(淸代)의 유용(劉墉, 1719∼1804)·하소기(何紹基, 1799∼1873)·옹방강(翁方綱, 1733∼1818) 등의 서풍이 널리 수용되어 문인들 사이에 크게 유행하였다.

또한, 이 시기는 개화기로, 여항(閭巷) 서화파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문화계를 주도하였는데, 특히 이들 중 역관(譯官)은 외국을 왕래 하면서 새로운 문물을 접할 기회가 많아 견문이 넓고, 외교상 시·서·화의 재능을 필요로 하였으므로 이들 중에서 시인과 서화가가 많이 배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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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석, <축수서화대련(祝壽書畵對聯)> 일부
오경석, <축수서화대련(祝壽書畵對聯)>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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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중인(中人) 출신의 서화가들은 추사의 영향으로 글씨에서는 금석문에 의한 전예(篆隷)와 북비(北碑)를 숭상하고, 그림에서는 수묵법(水墨法), 갈필법(渴筆法), 서권기(書卷氣), 사의성(寫意性) 등 남화적(南畵的) 형식과 기법을 중시하는 경향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추사의 북학적 학문과 문자향서권기(文字香書卷氣)의 예술철학에는 같이 공감하고 추종하였지만, 서풍(書風)은 따르지 않아 조맹부·문징명(文徵明)·축윤명(祝允明)·동기창 등의 서체에 일맥이 닿는 다른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다. 특히, 역관들은 가숙(家塾)을 통해 익힌 달필(達筆)에 자기 개성이 첨가된 면모를 보였다. 그 일례로 추사의 말년 제자이며, 중인 출신인 오경석(吳慶錫, 1831∼1879)·김석준(金奭準, 1831∼1915)·정학교(丁學敎, 1832∼1914) 등이 추사의 영향으로 전서와 예서에 뛰어났다.

그 중에 개화사상을 일찍이 받아들인 오경석은 역관으로서 중국을 13차례 내왕하며 그 곳의 학자·서화가·금석학자·전각가 등 60여 명과 교유하면서 그들을 통해 많은 서화 작품 및 금석 탁본을 구하여 국내로 유입하였고, 이러한 자료들은 당시의 개화파 및 서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줌과 동시에 스스로도 서화와 금석학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가숙에서 조맹부, 동기창의 필골(筆骨)을 지닌 이상적(李尙迪, 1804∼1865)으로부터 직접적인 지도를 받아 해서와 행서의 기본적인 틀을 갖추었다. 해서에서는 안진경체를 주로 썼고, 예서에서는 추사 금석학의 영향으로 한비(漢碑) 중 <예기비(禮器碑)>를 즐겨써서 나름대로의 서풍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의 글씨에서 추사체의 면모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역관으로서의 필체가 따로 있었으며, 중국에서 구한 많은 금석탁본과 서화가들과의 교유를 통한 영향으로 인하여 독자적인 서예관을 형성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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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준, <오언율시(五言律詩)>
김석준, <오언율시(五言律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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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금석학적인 면에서는 김정희의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의 영향을 크게 받아 각지의 비석과 유적을 답사하여 편찬한 『삼한금석록(三韓金石錄)』을 비롯하여, 『삼한방비록(三韓訪碑錄)』·『천죽제차록(天竹薺箚錄)』 등을 남겨 한국금석학 발전의 토대를 만들었다. 오경석의 소장품과 추사금석학의 학맥은 그의 아들 오세창(吳世昌, 1864∼1953)으로 이어져 한국서화사의 보고인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을 비롯하여, 『근묵(槿墨)』·『근역서휘(槿域書彙)』·『근역화휘(槿域畵彙)』·『근역인수(槿域印藪)』를 완성할 수 있게 한 동기와 바탕을 제공해 주었다.

김석준은 전(篆)·주(籒)·해(楷)·초(草)의 자체(字體)에 모두 능하였지만, 특히 안진경체와 북조예법(北朝隷法)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북예체(北隷體)의 제일인자’로 불렸으며, 붓 대신 지묵법(指墨法)에 묘정을 이루어 쓴 지두서(指頭書) 의 창시자로도 알려져 있다.

정학교는 전·예·행·초서에 모두 능하였으나, 행·초서에서는 미불·동기창 서풍을 수용하였고, 대자초서에서는 광초(狂草)에 가까운 서풍을 구사하였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비학의 수용과 더불어 첩학의 수용 또한 적극적으로 이루어져 청대의 행·초서풍이 유행하였다. 특히, 하소기의 행·초서풍이 크게 유행하면서 안진경 행초를 보고 쓰 는 서예가들이 늘어났고, 송대의 미불과 소식·황정견의 서풍에도 관심을 많이 갖게 되었다. 하소기는 안진경의 <쟁좌위첩(爭座位帖)>을 바탕으로 진(秦)·한(漢)과 남북조의 서풍을 가미하여 개성적인 서풍을 이룬 서예가로, 중국뿐만 아니라 국내의 박태영(朴台榮, 1854∼?)·홍승현(洪昇鉉, 1855∼?)·강위(姜瑋, 1820∼1884)·지운영(池運永, 1852∼1935)·지창한(池昌翰, 1851∼1921)·현채(玄采, 1886∼1925)·김옥균(金玉均, 1851∼1894)·안중식(安中植, 1861∼1919) 등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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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학교, <예서대련>
정학교, <예서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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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하소기 서풍을 가장 빠르게 받아들였던 강위는 이상적·김석준과도 매우 긴밀하게 지냈으며, 3차례에 걸쳐 북경과 상해를 오가며 청대 서풍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상해지역에서 크게 유행하였던 하소기 서풍을 수용하게 된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더욱이 지창한의 행·초서에서는 하소기 서풍을 방불할 정도로 영향이 컸으며, 당시 서화가들은 그림쓰는 화제에도 하소기풍을 많이 썼다. 이중 현채의 <달마도(達磨圖)>에 쓰여진 화제(畵題)는 그 영향을 역력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현채는 해서 중에서 안진경체를 잘 썼으며, 행·초서에서는 하소기 서풍 외에도 조선 후기에 유행하였던 유석암·옹방강 서풍을 자연스럽게 구사하기도 하였다.

이 외에도 개화파인 박영효(朴泳孝, 1861∼1939)의 행초에서는 청대의 서예가 이병수(李秉綬, 1754∼1815)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당시 청과의 정치적인 외교와 문서, 내한자들에 의한 영향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는 글씨뿐만 아니라 문인화, 전각(篆刻) 부문에서도 중국의 영향을 받게 되었는데,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이 큰 역할을 하 였다. 그는 1895년 이후부터 주로 상해의 천심죽재(千尋竹齋)에 거주하면서 중국 서화가들과 깊은 교유를 하였다. 특히, 오창석과는 서화와 전각으로, 포화(蒲華, 1830∼1911)와는 묵죽(墨竹)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오창석과 30년의 교유 중 300여 과(顆)의 인장을 받았으며, 그 가운데 213과가 『전황당인보(田黃堂印譜)』와 『오창석인보(吳昌碩印譜)』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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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창한, <행서십곡병(行書十曲屛)> 중 일부
지창한, <행서십곡병(行書十曲屛)>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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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채, <달마도(達磨圖)>
현채, <달마도(達磨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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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효, <행서>
박영효, <행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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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당대 최고의 서화가였던 허련(許練, 1809∼1892)·서병오(徐丙五, 1862∼1935)·김규진(金圭鎭, 1868∼1933) 등과도 깊이 교유하여 ‘운미난(芸楣蘭)’을 창안함과 동시에 중국의 동기창·축윤명·유용·하소기 등의 여러 서체와 추사체의 영향을 받아 자가풍의 행서를 구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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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복, <전서>
이한복, <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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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익, <묵난도>
민영익, <묵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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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익의 활발한 서화활동은 한·중서화교류 및 오창석·제백석(齊白石, 1863∼1957)의 화풍과 전각풍 유입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문인화에서는 김용진(金容鎭, 1882∼1968)·서병오·서동균(徐東均, 1902∼1978)에게, 전각에서는 오세창·이한복(李漢福, 1897∼1940)에게 영향을 주어 근대 서풍 및 화풍을 주도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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