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7권 한국 서예문화의 역사
  • 4 근·현대의 서예 동향
  • 02. 일제강점기의 서예 동향
  • 서예교육과 전시
이승연

구한말까지는 서예가 문인들의 필수적인 교양으로 여겨져 오랜 수련을 쌓아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던 시대와는 달리, 일제강점기에는 교육제도의 혁신과 서사도구의 변화에 따라 서서히 전문적인 교육이 필요한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따라서 공·사립 서화학원과 연구회 등이 출현하여 서예의 이론과 실기를 학습하고, 작품을 발표하는 형식이 도입되었다.

1910년에는 친일단체에 의한 서예 교육 기관으로 조선미술회가 발족하였다. 조선미술회는 사자관(寫字官)과 도화서(圖畵署)의 화원(畵員)을 규합하여 조직된 단체로, 운영은 구 황실이 전담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출연에 의하여 조선의 청년 자제로 하여금 미술을 연구하게 하였으나 1919년 폐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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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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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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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민족의 정신과 문화를 계승하기 위한 서예교육의 절실함과 우리 문화재를 전시할 공간에 관한 필요성은 서화계의 인사들에게도 강하게 인식되어 1911년 한국 최초의 근대 미술학원인 경성서화미술원(京城書畵美術院)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 미술원은 한말 마지막 화원이었던 안중식·조석진(趙錫晋, 1853∼1920)이 주축이 되어 결성되었으며, 이 해에 개원한 서화미술회(書畵美術會)는 7∼8년간 당시 미술 활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이왕직(李王職)의 뒷받침으로 윤영기(尹永基, 1834∼1926)가 주도하고, 이완용이 회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수업 연한은 4년제로, 서과교사(書科敎師)는 정대유(丁大有, 1852∼1927)·강진희(姜璡熙, 1851∼1919), 문인화는 김응원(金應元, 1855∼1921)이 지도하였다. 수업과정은 전서·예서·해서·행서 과정으로 나눠서 진행되었고, 졸업증서에 구체적으로 수업 이수 과정을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 교육 체계가 상당히 안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서예 전공 학원의 효시가 되었다.

1913년 이 미술회에서 개최한 ‘서화대전람회’는 우리나라 역대 서화작품을 전시하는 소장전의 성격을 띠었다. 오세창은 수장품 중에서 정좌관심(靜坐觀心)의 서(書)와 탄은(灘隱)의 죽(竹), 이오정(李悟亭)의 서(書), 고려인(高麗人) 신덕린(申德隣)의 산수(山水) 등 고서화 진품을 특별 출품하였다. 그러나 회원들의 독립운동 참여와 안중식의 작고로 1918년 문을 닫았다.

민족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서예를 전문적으로 배우려는 지망자가 많아지면서 개인적인 사설 교육 기관이 각 지역에서 창립되었 다. 1914년 평양에서는 윤영기가 지원하고 주도한 기성서화회(箕城書畵會), 1915년 경성에서는 김규진에 의한 해강서화연구회(海岡書畵硏究會), 1922년 대구에서는 서병오에 의한 교남서화연구회(嶠南書畵硏究會), 1923년 경성에서는 서화협회의 사업으로 서화학원(書畵學院)을 3년제로 만들어, 동양화·서양화·서부의 세 전공으로 나누어 학생을 선발하여 지도하였다. 김돈희는 경성에 상서회(尙書會)를 만들어 적극적으로 후배 양성을 하였다.

이러한 사설 서화연구소와 강습소는 선비의 글씨시대가 끝나고 변화하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직업적·전문적 서예시대의 개막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당시 서화가들은 후학을 양성함과 동시에 우리 전통 서화 작품 및 회원들의 작품을 전시할 공간을 모색하여 1910년에는 오세창·김가진·안중식·이도영 등이 전시에 관한 구체적인 논의를 심도있게 진행하였다. 그들은 서울 종로에 있었던 청년회관 아랫층에 서화포(書畵舖, 지금의 화랑)를 개설하기로 합의하였으나 결국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김규진은 1913년 자신의 사진관에 최초의 근대적 영업화랑인 고금서화관(古今書畵館)을 병설하여 자신의 서화작품과 다른 여러 명가의 작품을 진열하고 판매 및 주문에 응함과 동시에 고서화도 취급하였으나 전문적인 화랑이나 전시관은 마련되지 못하였고, 대부분이 중앙학교나 보성학교·덕수궁 등을 빌려서 전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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