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7권 한국 서예문화의 역사
  • 4 근·현대의 서예 동향
  • 02. 일제강점기의 서예 동향
  • 서화협회의 서풍
이승연

서화협회는 1918년 6월 조석진·안중식·강진희·정대유·현채·김응원·오세창·정학수·강필주·김규진·김돈희·이도영·고희동 등 13인에 의해 발기된 순수 미술단체이다. 처음에는 회원전 형식이었으나 공 모전 형식을 병행하여 신인 서예가들의 등용문이 되었다. 이 협회는 이전에 이미 존재했던 서화미술회(이완용·조석진·정대유·김응원·강진희·강필주·이도영 등이 주도)와 서화연구회(김규진 주도)가 통합된 양상을 취하였다. 발족 동기는 『서화협회 회보』를 통해 “조선 미술의 침쇠(沈衰)함을 개탄하여 조선의 서화가들을 망라하고 신·구서화의 발전과 동서미술의 연구와 향학 후진의 교육”이라고 밝혔다. 이를 달성하기 위한 사업으로는 휘호회와 전람회, 의촉 제작, 도서인행(圖書印行), 강습소 운영 등을 추진하여 1936년까지 15년 동안 꾸준히 실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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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창, <전서육곡병(篆書六曲屛)> 일부
오세창, <전서육곡병(篆書六曲屛)>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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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부터 제1회 서화협회전을 개최하기 시작하여 출품된 작품 수가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나, 5회에는 90여 점, 11회에는 100여 점, 13회에는 200여 점, 15회에는 250여 점으로 많아졌지만, 1936년에 15회를 끝으로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였다. 제1회 서화협회전(1921. 4. 1∼4. 3)은 서울 중앙학교(지금의 중앙중·고교)강당에서 개최되는데, 출품작은 안평대군·정선·이한철·김정희 등의 고서화와 회원들의 작품이 출품되었다. 이어 제2회(1922)는 보성학교 강당에서, 제3회(1923)는 정회원 글씨 35점과 김정희 등 옛 글씨를 전시한 후 매년 전시되다가 1936년 일제의 탄압과 함께 일부 발기인들의 이탈과 선전(鮮展)으로의 전향, 그리고 사회적 인정의 퇴색과 궁핍한 재정 등의 이유로 끝을 맺었다. 마지막 협회전에는 서부(書部)에 김돈희·오세창·안종원·이석호·민형식 등 회원 입선자 외에 일반부 입선자들도 출품하였다.

주요 사업 중의 하나였던 회지 발간도 이루어져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잡지인 『서화협회 회보』를 1921년 10월 25일에 발간하였으나 2회에 그치고 말았다. 제1호에 김돈희가 「서의 연원」·「서도 연구의 요점」을, 오세창이 서화사 연구정리의 결 과를 탑원초의(塔園草衣)란에 「서가열전」으로 ‘나대편(羅代篇)’ 과 ‘여대편(麗代篇)’을 실었는데, 이는 『근역서화징』의 집필기간 중에 시도된 시범 연재물이었다. 그림에서는 이도영이 동양화 강좌를, 고희동이 서양화 강좌를 게재하였다.

이처럼 어려운 시대상황 속에서 개최된 협전은 한국 최초의 민전으로서의 가치와 신인 서화가들의 등용문, 서화 이론을 강론할 수 있는 장으로서 긍지와 자존심이 매우 높았으며, 많은 국민들로부터 민족적 색채가 강한 전시회가 되기를 요청받기도 하였다. 출품된 작품경향 또한 일본 서풍에 물들지 않은 순수성을 표현하려고 힘썼으며, 그 이면에는 일제에 항거하려는 민족의식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민족 고유의 미술전통을 계승하고자 진행된 협전을 빌미로 삼고 민족적 색채를 약화시키기 위해 1922년에 조선미술전람회를 구성하여 교란작전을 폈다. 언론 또한 협전에 대해 처음에 가졌던 폭발적인 관심과는 달리 총독부의 홍보전략에 의해 점차 소홀하게 되었으며, 미술인들도 여러 가지 이권이 생기는 선전에 관심을 갖고 동참하게 되면서 협전은 서서히 끝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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