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7권 한국 서예문화의 역사
  • 4 근·현대의 서예 동향
  • 02. 일제강점기의 서예 동향
  • 조선미술전람회의 서풍
이승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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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조선미술전람회 도록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 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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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을 계기로 무단적 식민정책을 문화정치로 전환한 총독부는 민족성이 강한 서화협회전을 와해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동경의 제국미술전람회 운영을 본떠 1922년에 조선미술전람회를 창설하였다.

이 전람회의 설립배경에는, 첫째 강압적인 지배로부터 국민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방안이었으며, 둘째 조선에 살고 있던 미술가들의 작품활동을 신장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1921년 12월 총독부가 주관한 의견 수렴회의에서 한국인 참가자들에 의해 서예부가 채택되어 동양화·서양화·서의 3부로 나누어 시행되어 오다가, 1932년 제11회 때에는 서·사군자가 완전히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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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돈희, <행서>
김돈희, <행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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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는 민족 진영의 저명하고 영향력있는 서화가들을 끌어 들여 선전에 협력하게 하였고, 수상자들을 언론에 대대적으로 크게 보도하여 일반인들의 관심까지 유발시켰다. 이에 서화협회까지 포섭하기 위해 협회 회원들을 강압적으로 유도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였고, 미술학교를 설립해 주겠다는 일시적 약속으로 인해 그들에게 이용당했던 회원들도 있었으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에 독립운동가이며 민족사상가인 오세창과 최린(崔麟, 1878∼1958)까지 선전에 참여하게 되어. 오세창은 제1회 선전에서 <전서>로 서부(書部)에서 2등상을 수상하였으나 선전의 성격과 방향을 간파한 뒤로는 출품을 거절하고 관계를 끊었다.

제1회부터 심사위원으로 일본인과 한국인이 동시에 선정되어 함께 심사를 하였는데, 한국인으로는 이완용·박영효·박기양·김돈희·정대유·김규진이 선정되었다. 그 후 제2회에는 일본인 타구치 미보우(田口米肪)와 함께 1회 심사위원들이 그대로 심사하였으며, 제3회와 제4회는 이완용·박영효·김돈희·정대유·김규진, 제5회는 김돈희·김규진, 제6회는 김돈희·김규진, 제7회는 김돈희, 제8회와 제9회는 김돈희·김규진, 제10회는 김돈희가 맡아서 심사하였다.

이들 심사위원들 중 유독 김돈희는 선전기간 내내 심사를 맡아, 입·특선을 하려면 김돈희체라야 한다는 풍조까지 생길 정도로 선전의 서풍에 큰 영향을 미침과 동시에 일본인들조차 수상을 위해 그의 서풍을 추종하기에 이르렀으며, 심지어는 조선총독부 고관들을 직접 지도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서화협회가 창립될 때 13인의 발 기인으로도 참여하였고 서화협회의 4대 회장을 역임한 적이 있으며, 서화협회 강습소에서는 서부(書部)의 주임교사로 활동하였지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더 왕성한 활동을 하여, 작품출품과 함께 서예부의 심사를 거의 도맡아 하였다.

김돈희는 전·예·해·행·초 오체를 모두 잘 썼으나, 해서는 안진경과 황정견 필법을 겸수하였다. 그가 <정희하비(鄭羲下碑)>를 보고 쓴 작품이나 저수량의 서(書)를 보고 쓴 작품도 있는 것으로 보아 북위서(北魏書)와 당(唐)의 해서를 두루 연마하여 자가풍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행서는 왕희지, 황정견의 서체를 고루 섞어 썼으며, 초서는 손과정(孫過庭, 648∼703)의 <서보(書譜)>에 근간을 두고 많은 연마를 하였다. 예서는 한예(漢隷)를 깊이 연구하여 한(漢)의 <장천비(張遷碑)>와 <조전비(曹全碑)> 필의(筆意)로 많이 썼으며, 이를 토대로 자유분방하고 변화가 많은 서풍을 형성하였다. 또한, 전각에 있어서는 한인풍(漢印風)의 단정함과 다양한 포치와 결구를 갖추고 있음을 『성당인보집(惺堂印譜集)』을 통해 볼 수 있다.

당시 선전 초기의 작품 성향은 일본 사람과 조선 사람이 함께 출품하여 입선과 특선, 그리고 수상을 겨루면서 서풍의 차이가 컸다. 조선인의 작품은 구한말의 서풍이 많았고, 일본인은 청말의 서예가 양수경(楊守敬, 1839∼1915)의 영향이 짙어 북위서풍이 많았다.

선전 10회 동안 입선작은 평균 50여 점으로, 한국인보다 일본인이 더 많았으며, 서체는 전서·예서·해서·행서·초서·한글·가나로, 행서가 가장 많았다. 그러나 김돈희가 선전에 깊게 관여하여 매년 심사를 하자, 점차 그의 서풍은 한국인뿐만 아니라 일본인까지 모방하기에 이르렀으며, 이 선전으로 말미암아 일본서와 조선서의 구별이 없게 되는 특성을 띠게 되었다.

서체에 있어서는 한국 출품자들의 작품에서는 전서와 예서에서 출중한 작품이 많은 반면, 일본 출품자들은 행·초서 작품들이 많았다. 총독부가 주도하고 일본인 심사위원에 의해 수상작이 선정되면서 일본 서예가들이 대거 진출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일본서풍은 자연스럽게 한국서단에 전파되었다.

선전은 처음부터 공모전의 성격을 띠어 신인 서예가들의 등용문이 되면서 서예의 대중화라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총독부가 선전 작품의 고가매입에 따른 이익을 강조하면서 서화가 부와 명예의 수단으로 인식되어 명예욕과 출세욕에 불타는 작가들을 양산하는 병폐를 만들었다.

1932년 선전에서 서부가 폐지된 이후 선전 출품자들과 서예가들의 반발에 의해 ‘선전에서 분리된’이라는 전제를 달고 조선서도전(朝鮮書道展)이 대신 개최되어 손재형(孫在馨, 1903∼1981)·송치헌(宋致憲, 1887∼1963)·이철경(李喆卿, 1914∼1989)·강신문(姜信文) 등이 출품하였으며, 제3회에는 김윤중(金允重)·송치헌 등이 입선한 이후로는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였다. 이후 1940년부터 문인화전람회가 개최되었으나 2회까지만 개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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